중앙산악지대(Central Mountains) | |
![]() ![]() 2. 세겜 중앙산악지대(Central Mountains) ●네비 사무엘(Nebi Samuel) 예루살렘에서 북쪽 세겜으로 가는 길을 따라 3㎞정도 가서 좌측(서쪽)으로 돌아 다시 4㎞를 가면 해발 900m의 산 정상에 회교사원이 있다. 이 건물이 오늘날 선지자 사무엘의 묘로 알려진 곳이다. 성경에서는 사무엘의 묘가 고향인 라마라고 전하고 있으나 언제부터 이곳이 사무엘의 묘로 알려졌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비잔틴 시태부터 교회가 있어 왔다. 1157년에 건축된 건물 뒤에 세워진 현재의 교회는 회교사원으로 쓰이고 있다. 건물 지하에 사무엘의 묘가 있다. 외형은 회교사원이지만 무덤 안은 회당으로 꾸며져 있다. 이 건물의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면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주위의 골짜기는 물론 서쪽 지중해와 동쪽 요르단 산까지 보인다. ●기브온(Gibeon)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왕상3:4) 네비 사무엘(사무엘의 무덤)에서 북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으로 들판 한 가운데 섬처럼 서 있는 완만한 산이 기브온이다. 이곳은 현재 엘집(el-Jib)이라 불리는 아랍인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기브온의 거민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계략을 써서 이스라엘과 화친한 유일한 가나안 족속이었다(수11:19).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 붙이시던 날 여호수아가 고한대로 태양이 머물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곳이 바로 이곳 기브온이다(수10:12-13).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기브온은 베냐민 지파에게 배당되었다(수18:25).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마샤를 기브온의 큰 바위 곁에서 죽였다(삼하20:10). 그러나 요압도 이곳 여호와의 장막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왕상2:28-34). 그러나 요압도 이곳 여호와의 장막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왕상2:28-34). 기브온에 있는 큰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후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뿐 아니라 부와 영광도 함께 주셨다(왕상3:4-15). 예레미야 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대항해 거짓 예언을 하던 하나냐도 기브온 출신이다(렘28:1). 기브온의 정상에는 큰 원통형 못이 있다. 직경이 11m인 이 못은 벽을 따라 29계단을 내려가서 다시 굴속으로 13m를 더 들어가면 물을 길을 수 있는 곳이다. 이 원통형 못 바로 옆에는 주전 8-7세기의 술 저장고가 있다. 고대 이스라엘이 사용하던 63개의 포도주 저장소로 평균 크기는 깊이 2.2m, 직경 2m로 돌을 파서 만든 것이다. 특히 섭씨 18도를 유지하여 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발견된 술 항아리의 손잡이에서 기브온이라 쓰인 손잡이도 발견되었다. ●벧엘(Bethel) 예루살렘에서 서북쪽 세겜으로 가는길 19km 지점에 벧엘이 있다. 형 에서에게서는 장자권을 쟁취한 야곱은 예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날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베개하던 돌을 취해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집”, 즉 벧엘이라 불렀다. 벧엘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창28:19) 그후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에 돌아오던 길에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 축복을 약속받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창35“6-15) 야곱 이전 족장시대부터 벧엘은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들어와 이곳 벧엘에 장막을 치고(창12:8), 단을 쌓았다(창 13:3). 또한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였으며 예배와 희생의 장소였다(삼상7:15). 솔로몬왕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된 후 북 이스라엘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음으로서 우상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2:26-33). 따라서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곳 벧엘에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했다(암 7:10, 호 10:15). 남 유다의 선한 왕 요시아가 벧엘의 우상을 타파했다(왕하 23:4). 벧엘은 현재 베이틴(Beitin)이란 아랍인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마을 끝 부분의 높은 언덕위에 벧엘이 있다.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있었으나 파괴되었고, 십자군 시대에 성벽을 구축하였다. 최근에 유대인 정착촌이 벧엘 근처에 형성되었다. 야곱이 베개하였다는 돌베개는 스코틀랜드에 옮겨졌다가, 현재는 영국웨스트 민스트 사원의 왕의 대관식 의자 밑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실로(Shiloh) 벧엘에서 세겜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3Km 지점에 신질(Shinjil)이라는 아랍인 마을이 나온다. 이 아랍 마을에서 다시 동쪽으로 5Km를 가면 아름다운 상위에 있는 유적이 실로이다. 가나안땅에 처음 들어온 이스라엘인들은 이곳 실로에 회막을 치고 법궤를 안치하였다(수 18:1). 가나안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는 실로에서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였다(수 18:10). 그후 1050년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에 패전하여 법궤를 빼앗기고 실로가 파괴되기까지 약200년 동안 실로는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다. 멸절의 위기에 놓였던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은 때마침 여호와의 절기에 무도회에 나온 실로의 여자들을 잡아다가 그들의 아내로 삼았다(삿 21:19-23). ●세겜(Shechem) 예루살렘에서 세겜길을 따라 약 60Km지점에 잘 알려진 세겜이 있다. 세겜의 뜻은"목덜미"란 뜻으로, 세겜은 에발산과 그리심산을 양쪽 어깨에 메고 있는 듯이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겜은 또한 나블러스라고 불려지고 있다. 나블러스는 로마 시대부터 쓰여진 이름으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 오늘날 세겜은 요르단 서안(West Bank)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가장 큰 아랍인 도시로서 아랍민족주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유대인과 아랍인과의 갈등이 가장 심하게 대두되고 있는 점령지로서 시내 곳곳에 이스라엘군의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겜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주전 1850년경에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곳 세겜에 이주해 왔고(창12:6-7), 그의 손자 야곱은 천막과 제단을 세우기 위해 땅을 매입하였다(창33:18-19). 야곱의 딸 디나는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거민들을 살육함으로서 디나에 대한 보복을 하였다.(창34장) 요셉의 유언대로 출애굽할 때 가져온 요셉의 시신을 세겜에 매장하였다(수:24:32).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을 세겜에 모아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였다(수24장). 주전 9세기에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은 수도를 세겜에서 사마리아로 옮김으로서 세겜은 더 이상 발전하지는 못했다. 주전 722년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세겜에 앗시리아인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겜 사람들은 이민족과 피가 섞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남 유다 유대인들은 혼종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독자적인 종교생활을 다지기 시작하였고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서만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적대시하게 되었다. 신약시대에 빌립,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세겜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행8:4-5). 비잔탄 시대에 세겜과 그리심산에 교회가 세워졌다. 1948년 독립당시 세겜은 요르단에 속했었으나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텔 발라타(Tel Balata) 성경에 나오는 세겜이 바로 텔 발라타이다. “발라타”란 말은 상수리 나무를 일컫는 아랍어 “발룻”에서 유래된 것으로 야곱이 세겜을 떠날 때 귀중품을 세겜 상수리 나무 아래 묻어 두었다는 그 장소를 연상케 한다(창35:4) 현재에도 고고학 발굴이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족장시대의 도시성벽, 성문, 그리고 바알신전등이다. ●요셉의 묘(Joseph''''s Tomb) 텔 발라타에서 약 100m 남쪽에 요셉의 묘가 있다. 이곳은 야곱이 은 백개를 주고 하몰의 아들에게서 매입하여 요셉에게 준 땅이다(창33:19, 48:21-22).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 요셉의 유언대로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와 이곳 세겜에 장사하였다(수24:32). 그런데 현재의 “요셉의 묘”는 세겜말고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도 있다. 그러나 헤브론에 있는 요셉의 묘는 14세기경 헤롯 건축물을 증축할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세겜에 있는 요셉의 묘는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있었다가 회교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그후 회교사원이 들어섰다. 지붕이 둥근 흰색의 단순한 건물로 베들레헴의 라헬의 묘와 유사하다. 요세의 묘는 회교사원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안에는 회당 분위기를 하고 있다. 요셉의 묘는 다윗의 묘와 같이 석관이 검정천으로 덮여 있고 위에 요셉의 묘라고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묘 양 끝에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회교인들에게도 거룩히 여기는 요셉의 묘는 회교인들이 관리를 해 오다가 1967년부터 이스라엘 유대인이 소유하고 이으며 현재 이스라엘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야곱의 우물(Jacob''''s Well)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텔 발라타에서 동쪽으로 약500m 지점에 야곱의 우물이 있다. 주후 380년 비잔틴 시대에 야곱의 우물에 처음 교회가 있었으나 529년 파괴되었다. 그후 1187년 십자군에 의해서 다시 교회가 섰었고 이 기초위에 1914년에 러시아 정교회에서 교회를 확장해 짖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 1차 대전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공사를 인수해 재게 되었으나 이것도 재정난으로 인해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현재 방치되어 있다. 야곱의 우물을 중심으로 지붕이 없이 넓게 벽만 있는 건물이다. 야곱의 우물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면 깊이가 약50m나 되는 우물이 있다. 깊이가 32m라고 알려졌었으나 최근 실제로 측량해 본 결과 얻은 깊이이고 지금도 시원한 물을 얻을 수 있다. 구약성경에는 언급이 없지만 신약에서는 야곱이 자기 후손들을 위하여 파 놓은 우물로 언급되고 있다(요4:12).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자신을 계시하던 장소이다(요4:26). 세겜의 아랍인들은 이곳을 “비르 야굽”이라고 부른다. ●그리심산(Mount Gerizim) 예루살렘에서 버스틑 타고 세겜에 도착하면 세겜 입구 왼쪽(남쪽)에 우뚝솟은 산이 그리심산이다. 해발 881m의 높이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과 같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성산으로 여겨지고 있는 산이다. 이 그리심산 맞은편엔 해발 940m의 에발산이 있다. 모세는 그리심산을 축복의 산, 그리고 에발산을 저주의 산으로 불렀다(신27:12-14). 후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대로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각 지파를 나누어 세우고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다(수8:33). 현재도 매년 유월절이 되면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의 지시에 따라 그리심산에서 전통적인 유월절 행사를 한다. 그리심산 정상에 사마리아인들의 제단인 텔 에라스(Tel er-Ras)에서 행해지는 유월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어린양을 잡는 예식이다. 출애굽기 12장에 따라 양을 잡아 물을 뿌리고, 털을 벗겨내고 기름을 제거하여 이들을 태워 버린다. 양의 앞발은 잘라 제사장에게 드려지고 나머지 부분은 깨끗이 닦아 소금을 치고 구워진다. 기도와 더불어 예식이 끝난 후 이 고기는 예복을 입고 신발을 신은 사마리아인들에게 한하여 급하게 먹는다. 먹기를 마친 후 뼈와 뿔 그리고 남은 모든 것은 불에 태워진다. 사마리아인들의 유월절 행사는 때마침 이곳을 찾은 방문객에 많은 매력을 제공한다. 그리심산의 정상에는 또 하나의 성지가 있는데 사마리아인들에 의해서 모리아산으로 믿어지고 있는 곳이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모리아산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이곳 그리심산 정상에서 아들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다고 한다. ●사마리아 성(Sebastiya) 세겜 즉 나블러스에서 북서쪽으로 약15Km지점에 있는 곳으로 히브리어로 숄론(Shomron)이라 하고 아랍인들은 세바스티예(Sebastiya)라고 한다. 고대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사방이 계곡으로 둘러쌓인 해발440m의 완만한 산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다. 주전 876년에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은 디르사에서 수도를 이곳 사마리아로 옮겨 도시를 세웠다(왕상 16:24). 사마리아란 이름은 오므리왕이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산 이 땅 주인 세멜의 이름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후 오므리의 아들 아합 왕은 많은 건물과 요새를 건축함으로서 더욱 발전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주전724년에서 722년에 앗시리아의 침입으로 사마리아성은 함락되었다. 한때 페르시아 시대에 잠시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주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다시 파괴되고 말았다. 주전 30년 헤롯대왕에 의해서 다시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겜의 개발과 더불어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아랍인들은 ''''세바스티예"라고 하는데희랍어의 아랍식 발음이다. 세바스티예는 헤롯 대왕에 의해서 불려진 이름으로 당시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하는 뜻으로 가이사랴나 가이사랴 빌립보와 같이 로마식 이름으로 라틴어 아우구스투스를 칭하는 말이다. 사마리아 성은 1908년부퍼 1966년까지 활발한 고고학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아랍인들의 경작지내에 있는 지역은 이들의 반대로 더 이상 작업이 진행될 수 없어 중단되고 말았다. 현재 불굴된 유물들은 이스라엘 왕들의 궁전, 성전,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건축물 등 당시의 건축기술과 건축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마리아 성의 주요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로마 시대의 성벽: 길이 3,700m 의 성벽으로 헤롯 대왕이 건축한 것이다. *서쪽으로 통하는 문: 헬레니즘 시대의 성벽을 헤롯이 개축한 것이다. *양 옆에 가로 돌기둥이 서 있는 도로: 서쪽 문에서 동쪽 문까지 연결되는 1.7km 의 도로로 돌로 포장 되어있고 양옆에는 600여개의 돌기둥이 서 있다. *상가들이 있던 곳 *북왕국 시대의 성벽: 주전 9세기 아합왕이 세운 것이다. *로마 공회당: 헤롯 대왕의 건축물로 길이 128m, 너비 72m 의 대 광장이다. *로마 시대 원형극장: 현재에도 원형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 관람석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둥근 탑: 주전3-4세기경에 만들어진 지름이 12m, 높이 8.5m의 둥근 탑이다. *아합 왕의 상아궁전: 아합의 상아궁 자리이며, 바알의 신전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세례요한의 유해가 발견된 성전 *코레신전: 주후 2세기경에 세운 가로 95m, 세로 45m의 신전이다. *세례요한 기념성전: 사마리아성(세바스티예) 입구인 아랍인 마을 중심에 있다. 공동묘지에 세례자 요한의 묘를 중심으로 세워진 건물로 주후 4세기경에 작은 교회가 세워졌고 십자군 때에 현재의 교회로 개축했다. 세례자 요한의 묘 양 옆에 선지자 엘리사와 오바다의 묘도 있다. 그리고 묘의 뒤편에는 요한의 부모인 즈가랴와 엘리사벳의 묘도 있다. ●벧산(Beit She''''an) 벧산은 이스라엘 평야의 동쪽 끝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약 25km 밑에 위치하고 있다. 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최초의 마을은 주전 3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벧산의 이름은 이미 주전 19세기경에 이집트의 고대 문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해안과 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약 18회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성경에서는 벧스안(수17:11), 벧산(삼상31:10), 벳산(삼하21:12)등으로 불린다. 주전 13세기 가나안 정복 후 므낫세 지파에게 할당된 곳이며(수1:27), 주전 11세기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서 땅을 잃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죽고 시체가 성벽에 매달려 있었다(삼상31장). 후에 솔로몬에 의해서 다시 정복되었다(왕상4:12) 유대인 학자들은 말하기를 “만일 에덴동산이 이스라엘에 있었다면, 이 에덴동산의 문은 벧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벧산은 그리 매력적인 곳이 못된다. ●므깃도(Megiddo) 아마겟돈으로 알려진 므깃도는 지구상에서 최후의 가장 치열한 전쟁이 일어날 장소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계16:16). 아마겟돈이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므깃도 산”이란 “하르 므깃도(Har Megiddo)에서 연유된 말로 므깃도는 고대 역사에 중요한 도시다. 이집트에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교통요지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는 물론 20세기에 들어서까지 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격전지였다. 므깃도의 언급은 고대 이집트 왕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이집트 룩소의 나르낙 신전 벽에는 주전 1468년에 투트모스 3세가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쓰여 있다. 여호수아 1장 27절에서는 므깃도는 너무 강해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했고 후에 다윗에 의해서 점령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주전 10세기 솔로몬 통치하에서 므깃도는 중요한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왕상9:15). 솔로몬은 므깃도에 병거성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여 가장 강력한 북방의 요새를 건축하였다. 현재 고고학 발굴에서 이때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다 왕 아하시야는 예후에 의해서 므깃도에서 죽었고(왕하9:27). 유다 요시아 왕은 앗수르로 가는 애굽 군대를 방비하려다가 애굽 왕 바로느고에 의해서 죽었다(왕하23:29). 므깃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1차 대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군의 알렌비 장군은 이곳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므깃도의 영웅 알렌비로 불리기도 했다. 더욱 최근인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이스라엘군과 아랍인들의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었다. 므깃도 입구 건물 안데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솔로몬 당시의 므깃도 모형이 있어 역사와 구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흥미있는 고고학 발굴 중의 하난가 있는데 바로 성밖의 물을 안으로 끌어들인 물길이다. 이 수로는 수직으로 25m를 파 내려가서 다시 수평으로 성밖까지 약 70m를 파 나가 물을 얻은 구조이다. 이는 예루살렘의 위렌쉬프트 그리고 하솔의 것과 같은 류의 것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물을 얻었던 독특한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제공 : 이강근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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