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서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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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교회(Monastery of the Holy Cross) 이스라엘 박물관이 올려다 보이는 십자가 계곡에 있는 수도원이다. 버스는 9, 24, 99번이 이곳을 지난다. 사각형의 종탑과 높은 벽으로 둘려 있으며 갈색의 둥근 지붕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다. 수도원이라기보다는 요새와 같은 인상을 준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을 못 박았던 십자가를 이곳에서 벤 나무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서 십자가를 만들었던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의 한가지로서 아담의 아들 셋이 아담의 무덤 머리맡에 심었던 가지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산림이 우거져 있지만 예로부터 이곳을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목재를 생산했던 산림 지역이었다. 주후 6세기에 처음으로 수도원이 세워졌으나 누가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614년에 페르시아군과 1009년 칼리프 하킴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11세기 조지안 승려들에 의해서 재건축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7세기 그리스 정교회에서 이곳을 매입한 후 새롭게 단장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술작품들이 이때 그려진 것이다. 19세기에는 동방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교 중의 하난가 이곳에 옮겨왔다. 이곳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중의 하나가 유스티니아 황제의 군대 사령관이 로마를 정복한 후 제2성전에서 전리품으로 가져갔던 제사 기구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가 이 도시가 적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들 기구를 이 십자가 수도원으로 옮겨 어딘가에 묻었다 한다. 이 수도원이 회교도들에 의해서 정복되었을 때 모든 승려들이 죽었는데 성전기구들이 묻혀있는 곳을 아는 승려 한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수도원의 바닥은 새를 묘사한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바닥의 일부는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대부분이 17세기 때의 것이다. 십자가를 만든 나무를 베어낸 자리라고 하는 곳에 제단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Israel;s Museum) 버스(No.9, 24, 99)를 타고 국회의사당(Knesset) 앞에서 내리면 된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5년에 설립되었고 이후에 여러 개의 소규모의 박물관을 통합하고 확장해서 현재의 박물관이 되었다. 박물관을 크게 4개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예술부분 전시관(The Art Exhibition Wing), 성서적 고고학적 전시관(The Biblical and Archaelolgical Museum), 유대인의 종교생활 전시관(The Shrine of the Book)이 있다. 사해사본 전시관과 본 건물 사이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 고고학 정원, 공작실, 농산물진열실 들의 부속시설이 있다. 사해사본 전시관은 입구에서 박물관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흰색의 지붕은 두루마리 성경사본을 보관했던 고대의 토기 뚜껑모양을 하고 있다. 전시관안에는 사해 주변 유대 사막에서 발견된 고대의 편지들, 주석책, 사본들, 그리고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의 중앙에는 둥근 탑과 더불어 유리로 둘러 덮여진 통 안에는 주전 2세기경의 이사야 66장 전권이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족장들을 묘사한 창세기 외경, 하박국 주석, 전쟁사, 그리고 당시 감사 찬송시들이 전시되었다. 첫 번째 두루마리 문서들이 발견된 것은 1947년 양치던 베두인 소년에 의해서였다. 잃은 양을 찾던 소년이 동굴에 던진 돌이 항아리를 깨었고 마침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본이 이곳에 전시되기까지는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처음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가치없이 단지 몇 세겔에 한 고물상에 팔려졌다. 여러곳을 떠돌아 그 중 세 개는 베들레헴에서 수케닉 교수에게 사들여졌고, 4개의 다른 두루마리는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시리아 사람에게 팔린 후 마침내 미국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아량있는 고테스만 가족에 의해서 세계학자들을 흥분시킨 후 8년 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이 중 6개의 두루마리가 이곳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는 예루살렘 록펠러 박물관에 있다. ●히브리대학교 서쪽 캠퍼스(Hebrew University Campus) 이곳 히브리대학교 서쪽 캠퍼스는 스코푸스산에 있는 캠퍼스가 1948년부터 폐쇠되자 1954년에서 1958년에 기바트 렘(Givat Ram) 언덕 남쪽에 건축되었다. 당시 도시 여러곳에서 흩어져있던 단과 대학 건물들이 이곳으로 집합한 것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스코푸스 산에 있는 캠퍼스가 회복되고 확장되면서 많은 부서가 그리고 옮겨가면서 스코푸스산 캠퍼스에는 인문대와 사회과학대가 위치하고 이곳 기바트 렘 캠퍼스에는 자연과학 계열이 자리하게 되었다. 캠퍼스 울타리 밖으로는 16,000석 정도의 경기장이 있다. 캠퍼스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국립도서관은 유대문헌과 성지에 관해서는 이 지역과 해외에서 수집한 진귀한 것들을 비롯해 세계최대의 것이며, 2백만권의 책과 6만여 정기간행물을 갖고 있는 중동 지역에서 최고의 도서관이다. ●600만 학살 기념관(Yad Vashem) 버스(No.18, 20, 27, 39, 40)를 타고 헤젤 산(Mt. Herzl)에서 내려 헤젤 산 서쪽으로 약 80m를 걸어가야 한다. 이곳 야드 바쉠은 유대인 600만 학살 추모관이다. 히브리어로 야드는 ‘기념’이란 뜻이고 쉠은 ‘이름’으로서 이사야 56장 5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히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이 장소는 1957년에 개관되었으며 매년 유대인 학살일(Holocausr Day) 전날에 공식적인 추목식을 거행한다. 오늘날 야드 바쉠은 유대인에게 사 srydbr장이요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만드는 곳이다. 야드바쉠에는 유대인 학살 연구소, 박물관, 외당, 그리고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기념비와 많은 조각품들이 있고 길 양쪽에 여러 나라에서 유대인을 도운 사람이나 기관이나 단체의 이름이 적힌 나무들이 심기워져 있다. 먼저 주차장 뒤의 첫 번째 건물은 행정기관 건물로서 이곳에는 유대인 학살에 관한 수천권의 참고 서적과 자료들이 있다. 신문, 일기, 수용소의 수용자 명단, 행방불명자나 도망자의 명단, 나치(Nazi) 전쟁에 대한 자료등, 역사박물관에는 연대순으로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수천의 자료와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치당의 정권장악, 유대인 공격, 공동체의 파괴, 유대인 전멸작전, 유대인 지구에서의 재기, 그리고 구조활동 등. 이들 기념관에는 유대인 대학살 때 죽은 600만 중에서 200만의 희생자 기록이 있다. 또한 이곳에 있는 회당에는 나치에 의해서 파괴된 회당들의 남은 잔재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회당의 서쪽에 있는 벽은 통곡의 벽(서쪽벽)과 유사하다. ‘코르자크와 유대인 지구의 어린이들’이란 제목의 조각작품이 있다. 당시 코르자크 선생은 공포에 떨고 있는 유대인 어린이들은 안은 채 함께 가스실로 향하고 있는 모습의 조각은 유대인에게는 물론이요 인류의 스승상일 것이다. 한 전시관의 출구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 “망각은 나라를 망하게 하지만. 기억은 구원의 열쇠다.” ●제2성전 시대의 예루살렘 모형 현재 예루살렘에는 솔로몬에 의해서 건축된 성전이나 그후 재건된 성전은 주후 70년경 로마 디도장군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현재 암아 있는 것은 헤롯왕에 의해서 건축된 성전 서쪽의 서쪽벽(통곡의 벽)뿐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홀리랜드호텔(Holy Land Hotel) 앞에 디도장군에 의해서 파괴되기 직전의 당시의 성전과 시가를 입체적으로 재현한 모텔이 있다. 이곳에 가는 방법은 중앙 버스정류장에서 21, 21A, 99번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이 예루살렘 모형은 제2성전 때부터 주전 66년 로마점령 전까지 예루살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제2성전 당시 사용했던 같은 재료를 써서 지형적 특성이나 당시 주택의 양태나 성전의 구조들을 50분의 1의 크기로 축소해서 실물과 같게 만들었다. 당시 도시의 형태나 모양 그리고 구조를 미쉬나, 탈무드, 그리고 요세푸스와 그리스나 로마작가들의 글과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유물들을 근거로 해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이 모텔은 히브리대학 미가엘 아비요나교수의 지도하에 고고학 및 지리학의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서 설계되고 직접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일은 홀리랜드 호텔의 소유자인 크록(H. Krock)의 지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아비요나 교수가 사망한 이후에도 히브리대의 짜후릴 박사이 지도하에 이 예루살렘 모델은 계속해서 나오는 최근의 연구 자료들을 이용해서 수정과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형은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한 자요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모형도 전체의 이해를 위해서 모자이크로 된 벽의 게시판이 있다. 그리고 제2성전 시대의 위치와 오늘날의 성벽을 잘 비교해 놓은 지도를 매점에서 구할 수 있다. ●헤롯가족의 동굴무돔(Herod''s Cave) 예루살렘 성 동쪽에 예민모세라고 불리는 동네가 있다. 예민모세는 이 마을을 처음으로 세운 모세 몬테휘오리 경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성안의 주거지역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때 확장해서 생긴 첫 정착지이다. 이 마을 뒤쪽에 헤롯가의 무덤이 있다. 무덤 입구는 당시의 전형적인 돌문으로 무덤입구를 막고 있다. 무덤안은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다. ★유대인의 성과 결혼 유대인의 가르침은 결혼과 가정생활에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랍비들의 가르침은 남자는 18세 이전에 꼭 결혼할 것을 권한다. 결혼의식은 “크루바”라고 하는 결혼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서 이루어지며 두 명의 공적 증인에 의해 거행된다. 계약서에 서명한 신랑 신부는 식장으로 인도된다. 결혼식장으로 특별한 장소가 없고 집 앞 마당이나 주택가 공터를 이용한다. 에식의 처음과 끝에는 포도주를 마시는데 이는 그들이 공동운명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예물은 부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금이나 다이아몬든 없는 반지를 교환한다. 예식은 해가 지기 전에 예복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하며, 예식은 저녁7-8시쯤 간단하게 치루어지고 예식이 끝나면 축하객들이 모여 피로연을 베풀고 춤을 추면서 밤 11-12시까지 즐거워한다. 레위기는 근친결혼을 금하고 있지만 유대법은 사촌 삼촌가의 결혼을 금하지 않는다. 유대교 계율 하에서의 이혼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유대교 중심 사상에서 이것은 비극이요 인생의 실패로 간주된다.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의 이혼이 발생하면 성전의 제단조차도 눈물을 흘린다. 정통 유대교는 피임을 경계한다. 혼합결혼에 의해서 매 세대마다 많은 수가 줄어드는 유대교를 보존하기 위해서 많은 자녀를 낳아 큰 가족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아이를 갖는 것이 산모의 건강에 위험할 경우에는 부부관계를 위해서 피임이 가능하고, 낙태 또한 산모의 생명에 치명적일 경우에는 허용된다. [자료제공 : 이강근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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