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호남 지역의 선교사

★ 호남 선교의 선구자 전킨(W.M.Junkin·전위렴) 선교사

영국신사77 2009. 6. 8. 12:37

                          호남 선교의 선구자 전킨(W.M.Junkin·전위렴) 선교사

  안녕하십니까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조선에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이며, 호남지역을 처음으로 선교하신 전킨 선교사님을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사님들이 들어오시기 시작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에는 선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이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전 미국을 다니며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호소하였고, 이 때  언더우드 선교사의 호소를 듣고 전킨은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조선에 선교사로 오기로 결심하고 준비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북장로교와 남장로교가 있었는데 , 북장로교는 언더우드를 비롯해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였지만 , 남장로교는 한 사람도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전킨과  6명의 젊은이들이, 조선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선교부에 지원서를 내었지만, 남장로교 선교부는 재정적인 이유와 그 지역 선교에 관심을 아직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선교사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결속해서 작정기도를 하였습니다. 작정기도한 지, 2개월이 지난 후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인 죤 언더우드가 3천불을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언더우드 선교사 자신도 남장로교 선교부에 헌금을 하여, 남장로교 선교부는 힘을 얻고 1892년 7월에 그들을 조선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전킨선교사는 어려서부터 전도에 열정을 가지고 전도하였습니다. 여름 휴가 때는 각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는 등 선교에 뜻을 두고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길렀습니다.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드디어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에서 10개월간 언어와 한국을 공부한 전킨은, 1893년 9월 남장로교 담당 선교지인 전라도 지방을 답사하였습니다. 도중에 홍수를 만나 냇물에 빠져 죽을뻔 하였고, 숯불가스 중독으로 쓰러지고, 낮에는 발이 아파 보행에 고생을 하고 , 밤에는 주막에서 모기 빈대에게 시달리는 등 고생 감뇌하며 호남지방의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1896년에는 군산에 선교 지부를 설치하고자 군산포구에 거처를 정하고 , 전도로 얻은 교인들과 전킨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군산 구암교회와 개복교회의 시작 되었습니다.

 

 그의 열성은 선교 지역을 군산 인근지방에만 국한하지 않고 옥구·익산·김제 등 지역을 정기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자신의 건강상태를 돌보지 않고 진력하다가 너무 쇠약해지자, 1904년에는 선교사 회의에서 그를 염려하여 임지를 전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주지역에서 20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활동을 억제할 정도로 전도의 열이 누구보다도 강하였습니다.

  전주로 옮겨온 이후 그는 서문밖교회를 담임하고 예배당을 크게 신축했으며, 인근에 6교회를 설립하고 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열정을 쏟다가 1907년 12월에 폐렴으로 몸져 눕게되고 병세가 악화되어, 1908년 1 월 2일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이 땅에 묻혔습니다.

  15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전킨 선교사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호남선교의 초석을 다지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 성도들과 동역 선교사들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학교를 세우는데, 그 학교가 전주의 기전여학교입니다. 전킨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름을 기전이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 벽에 걸려 있는 많은 선교사님들의 사진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킨을 시작으로 해서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아름다운 희생의 삶으로 나타난 열매를 보고, 선교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wmc.or.kr(이용남 선교사)

 

 

 

 

 

                         [부흥의 열매]

                                부흥의 때 철저히 희생한 선교사들-전킨의 별세

 

 

 

 

        남장로교 개척선교사들 시계방향 12시부터

레이놀즈, 테이트양, 테이트, 데이비스양, 전킨 

             레이놀즈 여사, 가운체 전킨 여사

 

 쉴 틈도 없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역의 현장에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불어나는 사역과 힘겹게 투쟁하는 바람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누렇게 익은 선교지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희생도 컸다.

 

 건강 악화로 잠시 사역 현장을 떠난 북장로교 언더우드 부부, 배럿 부인 (Mrs. Barrett), 맥팔랜드 부인(Mrs. MacFarland)은 단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1906년 1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남장로교 선교회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탁월한 언어 실력을 갖추어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도, 부흥운동으로 선교 사역이 놀랍게 확장되면서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헌신적으로 전도 사역에 몰두하다, 1908년 1월 2일 아내와 자녀들을 남기고 급성 폐렴으로 일주일 만에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갔다.


 당시 난방 시설도 없는 추운 겨울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강추위와 힘겹게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북쪽의 겨울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로, 2월에 들어서도 기온이 영하 14도를 기록할 때가 많다. 이와 같은 강추위 속에서 사역을 강행군하다 급성 폐렴에 걸린 것이다.

 전킨이 폐렴에 걸린 것은 1907년 크리스마스 이튿날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심하게 앓았으며, 3명의 의사와 훈련된 한 간호사가 병의 진행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헛수고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전킨은 차분히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제시하고, 둘러 있는 한국인들에게 몇 마디를 남기고는 사랑하는 이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는 옆에 앉은 사람에게 “제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죽는 것은 값진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숨을 몰아 쉬며 “나는-지금-갑니다- 그리고 나는-매우-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죽음이란 승리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영혼은 1908년 1월 2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리스도와 조용히 연합된 그의 육신”은 군산 선교부 묘지에 앞서간 란킨(Rankin) 박사의 무덤 가까이, 세 명의 어린 남자아이들의 무덤 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회색 화강암의 비문에는 한글로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전킨 목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했노라.”


 그와 함께 한국에 첫 발을 디딘 후 16년 동안을 그와 동고동락했던 사랑하는 동료 선교사 레이놀즈가 “드문 인격의 소유자”, “따뜻한 마음의 사람”,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그러면서도 “실천과 성취의 사람”이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전킨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분명히 하늘나라에서는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전킨은 개선장군처럼 승리의 입성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킨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 냉혹하리만큼 침착한 한 줄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의 신실하고 사랑하는 동료 전킨 씨가 일주일 간의 투병 끝에 1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런 동료의 죽음 앞에 할 말을 잃어서가 아니라, 너무도 슬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라면 언제 전염병에 노출되어 죽을지 모른다는 순교적 각오가 이미 뿌리내려 있었기 때문에,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그처럼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킨은 복음 전파에 생명을 아끼지 않다가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 끝없이 확장되는 선교지, 특별히 사경회와 부흥운동의 계절이었던 12월과 1, 2월에 몸을 아끼지 않고 사역에 몰두하다 ,그만 건강을 잃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고, 급기야는 다시 회복할 기회마저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성경 번역과 전도 사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지내고 있던 레이놀즈가 전킨이 남긴 선교지를 맡아야 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