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골짜기 - 평지에서 만난 사람들(4)
2006-02-22 11:29:34
평지에 대한 우리들의 세 번째 답사지는 소렉 골짜기였다. 소렉 골짜기에서 만난 삼손도 그리고 벧세메스로 걸어오던 두 암소의 눈물도 우리는 마음속에 모두 담아두고 다음 목적지인 엘라 골짜기를 향해 출발한다.
차가 출발한지 채 1분 정도 되었을까? 나는 차안의 모든 분들에게 왼쪽 편 낮은 산들을 주의 깊게 보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도로변 가로수 사이로 언뜻 보이는 텔을 향하여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엘라골짜기에서 바라본 텔 아세가
저곳이 '텔 야르묵'입니다. 모두가 '왜 갑자기 묵 이야기를 하나' 하는 표정들이다. 사실 그 누가 내 입에서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야르묵' 텔이 여호수아와 싸웠던 아모리 백성들의 성이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수10)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도와 아모리 사람들의 연합군과 싸웠던 여호수아 10장 사건을 모르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땅과 그 땅의 지명들에 대해서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온지 벌써 100년이 훌쩍 넘었다. 기독교 인구 천만 시대라고 말한다. 그런 한국교회가 구약학자들은 수없이 배출하면서도, 성서 고고학자 한 사람 제대로 배출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일본은 그들의 돈으로 갈릴리 호수 주변의 텔을 발굴했으나, 이스라엘이나 근동지역에서 한국교회의 경제적 지원으로 텔 하나 발굴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돈이 없어서겠는가? 믿음이 없어서겠는가? 일본보다 교세가 작아서인가? 관심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텔 야르묵'에 대한 설명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우리들은 벌써 엘라 골짜기를 달리게 된다.
엘라 골짜기
엘라 골짜기는 블레셋 지역에서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는 세 번째 통로로서, 그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큰 골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을 수 있는 전략적인 접근로이다.
엘라 골짜기를 통과하여 산 능선 길을 따라 해발 700-1,000m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면 곧바로 베들레헴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다윗이 왕이 되어 수도로 삼았던 헤브론에 이르고, 북쪽으로 가면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고향이며 첫 수도였던 기브아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차단하거나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전략적 도로인 것이다.
엘라와 아세가
아 세 가
엘라 골짜기의 지형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본다면, 아마 매복전술을 펼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블레셋 다섯 방백 중의 하나인 골리앗의 고향 '가드'에서 엘라 골짜기를 따라 산악지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우뚝 솟은 이스라엘 성 '텔 아세가'를 만나게 된다. '아세가'는 이 골짜기를 타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올라오는 블레셋 군을 저지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1차 방어성인 셈이다.
아세가
소 고
'아세가'에 이르러 엘라 골짜기는 좁아지며, 오른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바꾼 다음 몇 백 m를 채 못가서 다시 왼쪽으로 90도 급선회한다.
골짜기는 이곳에서 산악지역으로 향하여 약 1.5km 정도 들어가는데, 이쪽 산과 저쪽 산이 멀지 않아 이쪽 편에서 저쪽 편에 서 있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이며, 그 중간에 시내가 흐른다(삼상17).
이곳에 엘라 골짜기를 지키는 이스라엘의 2차 방어성 '소고'가 위치해 있다
엘라골짜기와 이웃 요새들
아둘람과 그일라
소고에서 다시 산악지역을 향해 올라가면, 골짜기가 마치 잎을 벌리듯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이 평지의 산기슭에 '아둘람'과 '그일라'가 위치해 있다.
만약 이 골짜기 주변 산기슭에 매복하고 적을 골짜기 내부로 깊숙이 유인해 들인다면, 순식간에 퇴각로를 차단하고 일거에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장소가 엘라 골짜기이다.
엘라골짜기-1
다윗과 엘라 골짜기
엘라 골짜기를 찾을 때마다 내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큰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기브츠가 하나있다. 그 기브츠 앞 공터에 나무가 하나있는데, 그 나무 밑이 내가 찾는 장소였다.
내가 이곳을 찾았던 이유는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도 있고, 이 골짜기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도 피하며, 엘라 골짜기를 한눈에 조망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시내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라골짜기-2
이 골짜기에서 내가 성지 답사 객들과 나누는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다. 성경의 기록과 현장이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하는지 대조해 보는 일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눈으로, 확인하고, 느끼게 하며, 그 곳에서 활약했던 성경사건의 주인공을 심안으로 보고, 만나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답사 객들과 하는 일은 지리적 상황과 텔의 위치를 확인하고 성경을 읽으며 현장과 대조하는 일이다. 블레셋 군과 이스라엘 군이 항오를 벌였던 장소요,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던 장소이다(삼상17).
엘라골짜기-3
성경은 그때를 이렇게 증거 한다:
사무엘상 17:1-3,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엘라 골짜기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 사람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삼상17:1-3)."
성경 읽기를 잠시 멈춘다. 모두가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소고와 아세가의 위치를 확인해본다. 이편 산과 저편 산을 확인해본다. 이쯤 되면 블레셋 군의 진영과 이스라엘 군의 진영이 떠오른다.
다시 성경을 읽어간다. 어느덧 블레셋 진영에서 골리앗이,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소년 다윗이 나타난다. 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선포한 다윗이 시냇가로 달려간다. 이쯤 되면 일행 중 눈맵시가 제법 있는 사람은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본다. 아마도 물맷돌을 찾는 것이 분명하다.
엘라골짜기-4
골리앗의 고향 가드
다윗과 엘라 골짜기와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엘라 골짜기에서의 첫 승리로 다윗은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역시 이 엘라 골짜기에서의 승리로 인해 다윗은 도피자가 되었다.
사울 왕을 피해 첫 도피처로 삼은 곳이 공교롭게도 엘라 골짜기에 위치한 골리앗의 고향 '가드'가 아니던가? 가드에서 다윗은 대문짝을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며 미친 체하여 살아남았다.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윗이 골리앗의 고향에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해야만 했다.
다윗이 엘라 골짜기의 아둘람 동굴로 피신한다.
이스라엘 군과 함께했던 엘라 골짜기에서, 이제는 환난 당하고 빚진 자들이며 마음이 원통한 자들과 함께한다.
엘라 골짜기는 명암이 교차했던 다윗 인생의 예고편과 같았던 곳이며, 우리들 인생의 한 장면과 같은 곳이 아닌가?
라기스 골짜기 - 평지에서 만난 사람들(5)
2006-02-22 11:33:13
텔 라기스
소년 다윗이 블레셋 군대 앞에서 '사시는 하나님'을 고백했던 전쟁터요, 다윗 인생의 희비가 교차
했던 엘라 골짜기에서,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라기스 골짜기를 향해 남쪽으로 떠난다.
라기스 골짜기는 엘라 골짜기에서 버스로 약 20분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나는 이 짧은 구간의
도로를 좋아한다. 한적한 시골 분위기가 좋고, 평화롭고 차분한 분위기가 좋으며, 평지의 나지막한
산들과 들녘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좋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통과할 때마다 항상 평온함을 느낀다.
라기스로 가는 길
이곳을 통과할 때 내가 머리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포도밭이다. 포도밭
가운데에서도 주인의 손에서 '버려진 포도밭'이다. 울타리가 무너지고,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가
부러지고 썩어 넘어지고, 가지는 마치 헝클어진 머리 같아 보기에도 흉측한 포도밭을 찾아 두리번
거린다. 이러한 나의 행동은 오래전 지도 하나 들고 급우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평지 이곳저곳 유적지를 찾아 걸을 때 얻은 특별한 경험 때문에 생긴 행동이다.
그곳이 정확하게 평지의 어느 곳인지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평지에 펼쳐진 드넓은 꽃밭을
지났고, 수개월이 넘도록 이 들녘에서 양 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아랍인 목동을 만난 직후였다.
우리 일행들 앞에서 걷던 교수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목동을 만나 잠시 휴식을 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우리 모두는 약간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교수는 아무 말 없이 한 학생에게 이사야서 5장을 읽도록 부탁했다:
버려진 포도밭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항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며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헤브론 산지로 올라가는 라기스 골짜기
그때서야 비로소 교수는 손으로 포도밭을 가리키며 '버려진 포도밭'을 눈으로 보고 또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내 눈앞에 펼쳐진 '버려진 포도밭'은 두려움이고 무서움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서 이스라엘의
평지를 걸어 다닐 수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며 한없이 그분께 감사하도록 만들었다. 그 때 그 경험이 너무나 강했기에 난 이곳을 지날 때 버려진 포도밭을 발견하면 가끔 버스를 멈추고 성지 답사객들에게 그 현장을 보여주곤 한다.
3월 7일에서 19일까지 21C 목회연구소가 주관하여 회원목사님과 사모님 서른 분이 성지에 다녀왔다.엘라 골짜기를 출발하여 라기스 골짜기로 이동하는 이 구간에서 난 '버려진 포도밭'을 발견했다. 달리던 버스를 길가에 멈추고, 수년 전 나의 교수가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나 또한 우리 일행들에게 '버려진 포도밭'을 이사야서 5장과 함께 보여주었다.
텔 라기스 성문
우리를 태운 버스는 라기스 골짜기로 향한다. 라기스 골짜기는 평지(쉐펠라)에 위치한 다섯 개의
골짜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드넓은 남방지역과 해안 평야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라기스 골짜기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며 산악지역으로 올라간다. 이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해발
1,000m의 헤브론 산지에 이른다. 그러니 이 골짜기 또한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통로였던
셈이다.
골짜기에 들어선 후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는 골짜기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우뚝 서 있는 산과 같이
거대한 '텔 라기스'를 만나게 된다. 이 한적하고 평온한 평지의 남쪽, 라기스 골짜기 어귀에서
만나게 되는 '텔 라기스'를 보게 되면, 나라의 운명이 걸린 크나큰 전쟁 때마다 최후의 전장터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라기스 성의 당당했던 옛 모습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들에게 '텔 라기스'는 생소하거나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역사, 지리
그리고 고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장소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텔' 가운데 하나를 말한다면 '텔 라기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라기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으며
, 이 성경의 기록을 증명해주는 유물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르호보암이 세운 견고한 이중 성벽
'텔 라기스'는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에 의해서 이중 성벽을 갖춘 견고한 성으로 세워져, 이 골짜기
와 이스라엘의 남서쪽 지역을 통제하는 군사적·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큰 성이었다
(대하 11:5-12, 23).
이처럼 크고 견고한 성이었기에, 라기스 성은 크고 작은 전쟁에서 남유다왕국의 마지막 보루의
역할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치열했던 전쟁은 BC 701년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과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 사이의 전쟁이었으며, 또 하나는 남유다 왕국이 망하던 BC 586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과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전쟁이었다.
라기스 성은 이러한 큰 전쟁의 최후 격전지였기에 열왕기와 역대기의 저자들, 그리고 당대의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붓끝을 피해갈 수 없었다.
산헤립의 원통형 비문
'텔 라기스'에 대한 크고 작은 발굴 작업이 몇 차례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발굴은
1932~1938년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키(Starkey)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발굴 작업이었다. 이 발굴
작업을 통하여 BC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과 그리고 BC 586년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과의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텔 라기스'에서 발굴되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BC 701년에 이스라엘의 평지 한적한 시골에서 일어났던 라기스 전투에
대한 기록과 27m 길이의 돌에 새긴 그림이, 수 천리 떨어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의 산헤립 궁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증거할 유물들이 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과 동시에, 그 사건의 한 주체였던 아수르의 산헤립 궁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이 쓰여진 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텔 라기스'가 유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헤립 궁전에서 발견된 BC 701년 라기스 성 전투 장면을 묘사한 부조-1
텔 라기스와 히스기야 왕(BC 701년)
어느덧 우리들을 태운 버스가 '텔 라기스'의 남쪽 숲속에 멈춰선다. 숲 속 벤치에 지도책과 성경을 펴고 앉는다. 그 옛날의 당당했던 성채의 위용도, 그 피비린내 넘쳤던 치열한 전쟁의 흔적과 상처를 모두 흙속에 묻어두고, 이천년 이상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는 저 '텔 라기스' 앞에서 우리는 산헤립의 벽화로 눈길을 돌린다.
산헤립 궁전에서 발견된 BC 701년 라기스 성 전투 장면을 묘사한 부조-2
BC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은 히스기야 왕의 반역을 제압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유다의 수많은 성들을 파괴하고 불태운 산헤립은 유다의 마지막 보루인 라기스 성 남쪽 언덕에 진을 치고 치열한 전투에 돌입했다.
이 때의 치열한 전투모습이 산헤립이 만든 27m 부조에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앗수르 군대의
공성 무기 일곱 개가 동시에 성벽을 향해 돌진한다. 궁수 부대와 살수 부대, 그리고 투석 부대의
조직적인 공격에, 활과 돌과 그리고 불방망이로 당당히 맞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묘사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는 막대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어야만
했으며,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어야만 했다
(왕하 18:15-16).
산헤립의 기록에 의하면, 파괴된 성들 가운데 크고 견고한 성이 무려 46개나 되었으며, 불타버린
조그만 성들과 마을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앗수르 군인의
창에 무참히 죽어가야만 했다.
남녀노소를 포함해 200,150명이 포로가 되어 앗수르로 끌려갔다. 수없이 많은 말과 노새, 나귀와
낙타 그리고 크고 작은 가축들이 노획물이 되어버렸다.(참조 왕하 18:13).
너무나 큰 상처를 남기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고 간 전쟁이었다. 남은 것은
오직 무너진 성과 타버린 재뿐이었다. 참으로 비극적인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최후의 전장이 바로
우리들의 눈앞에 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은 왜 포로가 되어 수만리 타국에서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만 했는지, 무엇을 위해 그들은 앗수르 군인들의 창에 무참히 죽어가야만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앗수르 군인들의 창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히스기야가
외친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여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실 것이라고 백성들을 안심시키며"(대하 32:7-8)
이 말은 어떤 의미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을까? 그 무서운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목격자
'텔 라기스'는 우리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상처와 아픔을 땅속에 묻고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이다.
이렇게 혼잣말을 삼켜본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이루려했던 히스기야 왕의 교만이(대하 32:25-26),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은 아닌가?
지도자 한 사람의 오판이 얼마나 크나 큰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
'# 이스라엘[자료실] > 쉐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쉐펠라 (구릉지,평지) (0) | 2009.06.14 |
---|---|
★ 라기스(Lachish) (0) | 2009.06.14 |
★★★※평지(쉐펠라)에서 만난 사람들(1)~(3)<성지칼럼> (0) | 2009.06.04 |
★에스골 골짜기(Va. Eshcol) (0) | 2009.02.10 |
[스크랩] 9. 구브린골짜기-마레사-벧구브린 (0) | 2009.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