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렉 골짜기 산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통과하자마자 오르막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 오르막길 오른쪽 길옆에 언덕이 하나 보인다.
이곳이 소렉 골짜기 산기슭에 위치한 텔 벧세메스(텔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의미한다. 중동지역에는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성을 쌓고 살았던 옛 도시의 흔적이 언덕으로 남아 있는데, 이와 같은 곳을 텔이라고 부른다)이다. 길 가에 차를 세워놓고 30m쯤 걸어가면 텔 벧세메스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 텔 벧세메스에 올라설 때마다 나는 매번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골짜기에 놀라며, 그 골짜기의 비옥함에 놀라고, 이 골짜기에서 펼쳐진 성경사건에 놀라며, 나만이 느낄 수 있었던 아련한 추억 때문에 또 한번 놀란다.
평지가 유명한 성경 사건들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평지에 있는 이러한 골짜기들이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성경 사건들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평지는 블레셋 사람들이 살았던 해안 평야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던 산악지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산악지역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안 평야지역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아야만 했고, 산악지역에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야지역에 사는 블레셋 사람들이 산악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제지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는 중간에 위치한 평지는 두 민족 사이에 가로놓인 최전선인 동시에 완충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벧세메스는 평지의 소렉 골짜기를 장악하고 이 골짜기로 올라오려는 블레셋 군을 제지하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전략적 도시였던 것이다.
소렉 골짜기에 위치한 텔 딤나
나에게 텔 벧세메스와 소렉 골짜기는 아주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벧세메스를 생각하면 나는 그 곳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역사적 사건이 떠오르기 보다는 아름다운 꽃밭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모든 풀들이 말라버린 한여름에 벧세메스에 가도 나에게 벧세메스는 그저 아름다운 꽃밭으로 보일 뿐이다.
어느 봄날 아름다운 노을이 석양을 수놓을 때 벧세메스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느라 여기저기 파놓은 언덕이 아니었다. 석양빛과 어우러진 빨강색 백합화가 언덕을 온통 수놓았는데, 그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텔 벧세메스에 올라서 소렉 골짜기 오른쪽을 바라보면, 넓지막한 골짜기 건너편으로 산들이 놓여있다. 그 산기슭이 힘세기로 유명했던 사사 삼손의 고향 소라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소렉 골짜기와 텔 벧세메스
벧세메스에서 해안평야 쪽으로 소렉 골짜기를 따라가면 삼손의 여인이었던 들릴라가 살았던 곳이며, 거기에서 좀 더 걸어가면 삼손의 첫 번째 부인 블레셋 여인의 고향 딤나(블레셋 사람들의 성)가 이제는 텔(언덕)이 되어 골짜기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다. 그러니 이곳이 사사기 13-16장의 현장인 셈이다. 다시 벧세메스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벧세메스에서 그 산까지 대로가 멀리 보이는데, 이 대로를 따라 들을 넘으면 블레셋 도시였던 에그론 성이 있다. 그러니 이곳은 사무엘 상 4-6장의 현장인 셈이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성서지리를 공부할 때 이 골짜기를 걸었던 경험이 있다. 우리의 목적지는 삼손의 고향 소라에서 들릴라가 살았던 소렉 골짜기를 지나 딤나까지 걸어간 후, 딤나에서 골짜기 반대편에 있는 에그론을 거치고, 에그론에서 산을 넘어 대로를 따라 벧세메스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그러니 사사기 13-16장과 사무엘 상 4-6장 사건의 현장답사였다. 성서지리학 클래스가 주로 미국 학생들이었기에 그들과 함께 배낭과 물통을 메고 성경과 지도를 들고 4월의 소렉 골짜기를 걷는데, 그 놈들이 어찌나 빨리 걷던지 나의 짧은 다리로 그들을 따라가느라 진땀깨나 흘려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가 4월, 드넓은 소렉 골짜기는 온통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황금물결로 장관이었다.
일행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나는 황금 보리밭을 달려온 봄바람에 땀을 식히며 나만의 틈새 여행을 떠나곤 했다. 소렉 골짜기의 황금들판을 바라보며, 이곳이 힘세기로 유명했던 삼손이 가슴 설레며 블레셋 여인들을 만나러 갔던 그 길이겠구나! 그 우직한 삼손과 그 요염한 드릴라의 데이트 장소가 보리밭이었다니!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삼손은 가슴 설레며 걸었던 이 길이 죽음의 길이요 파멸의 길이었음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우리도 어쩌면 날마다, 순간마다, 삼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텔 벧세메스에서 바라 본 소렉
딤나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준비한 자료집을 들고 텔 이곳저곳을 다니며 교수의 강의를 듣고, 블레셋 사람들 성이었던 에그론으로 향했다. 에그론을 거쳐 벧세메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수확을 막 끝낸 오렌지 과수원을 만났다. 그런데 파란 오렌지 잎 사이로 이곳저곳에 아직도 탐스러운 오렌지들이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저것이야말로 여행길에 지친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만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한 학생의 질문에 교수가 답하기를 저 나무에 남아있는 탐스러운 오렌지는 하나님께서 3,500년 전 특별히 우리가 이곳을 지날 것을 아시고 모세에게 명하여 율법으로 정해놓은 것이니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모두가 그 말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금 생각해도 교수의 그 대답은 말의 기교를 넘어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체험하도록 가르치는 놀라운 능력이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오렌지로 갈증을 풀고 집에 돌아가 먹을 생각으로 오렌지를 배낭에 주워 담기까지 했다.
마지막 언덕의 모퉁이를 지나 벧세메스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렀을 때 이미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온종일 걸어 다닌 몸에 오렌지까지 한 짐 등에 짊어지고 걸었으니 몸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오렌지가 이제는 짐이 되어버린 셈이다. 은혜를 족한 줄로 여겼어야 했건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지나는 또 다른 나그네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음을 생각했어야 했건만, 나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음을 알았다.
대로를 따라 저 멀리 벧세메스 언덕이 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벧세메스까지는 걸어가야만 했다. 나는 이 길을 지나갔던 두 마리의 암소를 생각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사무엘상6:10-14)."
대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을 때 소렉 골짜기를 따라 죽 뻗어난 철로가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삼손의 고향과 벧세메스 사이를 지나, 블레셋 여인들의 고향을 통과하고, 해변의 도시 텔아비브를 거쳐 지중해 해변을 바라보며 하이파까지 내달리는 철로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다음엔 오늘처럼 이렇게 힘들게 걷지 말고 기차에 몸을 싣고 이 골짜기를 달려봐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아몬드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어느 봄날 그때 소렉 골짜기 대로를 걸으며 나에게 했던 약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750m 산꼭대기에 위치한 예루살렘에서 기차를 타고 산악지역의 가파른 골짜기의 절경에 흠뻑 빠져있는 순간, 기차는 벌써 평지의 소렉 골짜기를 달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삼손의 고향이 보이고, 왼쪽으로 벧세메스가 보였다. 드넓은 골짜기에 온통 싱그러운 보리들이 넘실거린다. 기차는 금방 삼손의 고향을 빠져나갔다.
기차가 아름다운 지중해 해변을 달릴 때도 나의 생각은 소렉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나와 우리 모두는 지금도 내가 소렉 골짜기에서 보았던 인생의 딜레마와 씨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출처:Way-Glo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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