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자료실]/쉐펠라

★★★※평지(쉐펠라)에서 만난 사람들(1)~(3)<성지칼럼>

영국신사77 2009. 6. 4. 18:04

                  평지에서 만난 사람들(1)~(3) <성지칼럼>

                  아얄론 골짜기 - 평지에서 만난 사람들(1)
                                                                           2006-02-22 10:43:07
 

                                                          

 기독교 성지하면 가장 먼저 이스라엘을 떠올리게 된다. 성지순례자라면 그 중에서도 누구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싶어 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성지 가운데 최고의 성지로 뽑는데 그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지순례자들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고 그들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평지'이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평지에 대한 나의 애착과 미련 때문일 것이다.

 

 90년대 중반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 성지연구소(현 예루살렘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평   지    

       

 그 곳에서 나는 성경과 지리, 역사와 고고학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지도와 성경을 들고 이스라엘의 산과 광야 그리고 골짜기 이곳저곳 성경사건이 일어났던 현장들을 찾아다녔다. 때로는 들판에서 비닐 한 장을 깔고 침낭 속에서 밤을 보내야하는 수고로움은 있었지만, 교실 안에서 얻을 수 없는 흥미, 애착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즈음 해서 한국 교회에서는 성지순례 붐이 일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한국 성지순례 객들로 넘쳐났다. 어느 곳에 가든지 여행사에서 단체 선물로 준비해 준 빨강색이나 파란색 등산용 조끼와 모자 또는 가방을 멘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때 생활비와 학비를 현지에서 벌어야만 했던 나는, 참으로 우연치 않게 성지순례 객들을 안내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평지에 대한 애착과 미련은 이 시절에 얻은 병이 분명한 것 같다. 그 많은 단체들 가운데 평지를 답사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단체는 만나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 아마도 평지를 성지로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간 때문에 그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짧은 시간에 기념교회를 방문하기도 벅차 빨리 빨리를 연발해야만 하는 판에, 기념교회 하나 없는 평지에 시간을 할애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보여주고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한 사람만이 느낀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지도를 가지고 찾아다니며 느꼈던 감동을 누구나가 똑같이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애당초 없지만, 그러나 기념교회들 보다는 그 곳이 비록 황량한 골짜기와 들판일지라도 확실한 성서사건의 현장에 그들을 우뚝 세워놓고 싶었다. 동쪽의 먼 나라에서 고생을 하며 이곳까지 왔는데!  그때 얻은 병이 지금 나로 하여금 성지답사의 첫 장을 예루살렘이 아닌 평지로 가도록 만들고 있다.

 

                  

                                                                아얄론 골짜기

 

 성경에 쓰인 땅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했던 사람이라면, 평지에 이르는 순간 최소한 두 번은 놀라게 된다.

 

 예루살렘은 700-800 미터에 이르는 산악지역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그 곳에서 산봉우리 사이로 굽이친 비탈길을 따라 서쪽 지중해 해변에 세워진 현대도시 텔 아비브로 가다보면 마지막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나게 된다. 이 가파른 내리막 골짜기 길을 통과하자마자 나지막한 산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지점이 산악지역 끝이요 평지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비로소 여기가 우리가 첫 번째로 놀래야만 하는 장소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권에서 평지는 평야와 같은 평평한 지형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성경을 읽으며 평지라는 단어를 대할 때 산들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대상27:28, 대하1:15) 그러나 평지에 들어서는 순간 산들이 낮아졌을 뿐, 아직도 산들이 멀쩡하게 눈앞에 보인다.

 

 한글 성경에 평지로 번역된 지역을 성경은 '쉐펠라' 라고 불렀다. 쉐펠라는 '겸손' 또는 '낮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그래서 '쉐펠라'가 어느 장소나 지역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될 때, 이는 낮은 지역(Lower Land) 또는 장소(Place)를 의미하게 된다.

 

  성경에서 쉐펠라로 불려진 지역은 대략 동서 15km, 남북으로 60km에 이르며 100~500m에 이르는 산들과 골짜기들로 구성된 아주 특정지역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지역을 한번도 평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600~1000m 산악지역에 주로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지역은 쉐펠라 즉 낮은 지역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 땅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번역했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오해를 미연에 막을 수 있었으리라. 

 

           

                                        이스라엘 횡단면도

 

 평지에서 서쪽 지중해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양 옆의 산들은 점점 낮아지며,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평야와 같이 넓은 계곡을 지나게 된다.

 

 이쯤이 우리가 두 번째로 놀래야만 하는 곳이다. 평야와 같이 드넓은 이곳을 성경은 골짜기라고 부른다. 나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을 당한 것이다. 나는 처음 이곳을 보고 골짜기라면 산악지역에 수없이 많은데, 왜 이렇게 넓어 마치 평야와 같은 곳을 골짜기라고 불렀을까 의아해 했다. 그러나 골이 깊든 아니면 평야와 같이 넓든, 산과 산 사이를 골짜기라고 부르는 성경 속의 사람들을 내가 이해해야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가장 넓은 골짜기인 아얄론 골짜기

 이렇게 하여 첫 번째로 만나는 곳이 아얄론 골짜기이다. 평지에 있는 다섯 개의 골짜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가장 넓은 골짜기인 것이다. 아얄론 골짜기 중에서도 나는 벧호른 비탈길에서 아얄론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한적한 곳이나, 반대로 벧호론 능선이 올려다 보이는 야얄론 골짜기의 한적한 곳을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곳을 종종 찾았던 이유는 역사적 사건들을 마음속에 재현해 볼 수 있으며, 그 때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평지의 골짜기들은 자연스럽게 지중해 해안에서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는 도로 역할을 해왔다. 그 중에서도 아얄론 골짜기는 벧호른 능선 길로 연결되어, 예루살렘의 북쪽 기브온과 사무엘 선지자의 고향 라마와 연결되는데, 고대로부터 이 골짜기와 비탈길은 산지로 올라가는 고속도로의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아얄론 골짜기는 평지에 있는 골짜기 가운데 가장 넓은 골짜기 동시에, 이 골짜기와 연결되는 벧호론 비탈길은 산악지역에 펼쳐진 해발 650m의 고원지대와 연결되는 가장 짧은 길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성을 지혜의 왕 솔로몬은 간과하지 않고 이 골짜기와 비탈길에 요새성 구축을 잊지 않았다.(왕상9:17, 대하8:5)

 

 그 결과 이 골짜기와 비탈길은 역사의 고비마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을 위해서 산지로 올라가는 군인들도, 전쟁에서 패하여 도주하는 군인들도 이 골짜기와 비탈길을 이용했다. 이집트 파라오의 군인, 아시리아 군인, 바빌론 군인, 페르시아 군인, 알렉산더 군인도, 로마의 군인도 이 길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에게 쫓기는 불레셋 군인들도 이 비탈길과 골짜기로 도주했다.(삼상7:5-12; 13:15-18; 14:31, 대상14:8-17)

 

 그러나 내가 이 골짜기와 비탈길 한적한 곳에서 만난 사람은 이집트의 파라오, 알렉산더, 로마의 장군이 아니라 바로 여호수아였다.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위해서 그 땅의 가나안 거민들과 격렬한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전쟁 사건이 여호수아 9-10장에 기록되었다. 야간 행군까지 강행하면서 길갈에서 900m 고지의 가파른 산길을 단숨에 올라와야만 했던 여호수아, 그리고 기브온 거민과 여호수아의 화친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 왕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기브온을 공격해야만 했던 이 전쟁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보다 더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묻어있는 전쟁이었다. 이 전략과 전술의 배경이 되는 지리적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겠다.

 

 여호수아 10장에 요약된 이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둔 너무나 싱겁게 끝나버린 전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벧호론 비탈길 저 꼭대기 기브온 고원에서 벌어진 그날의 전쟁은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치열한 전쟁이었다. 여호수아나 아모리 사람들에게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었으며,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대 사명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끝을 보아야만 했던 전쟁이었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던 박빙의 전쟁은 드디어 하나님의 개입으로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된다.

 

 나의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나는 여호수아의 그 기도를 떠올린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수10:12)

바로 내 앞에 펼쳐진 저 골짜기의 하늘이 그날 저 달이 멈춰선 곳이다.

 

 2004년 1월과 2월 나는 목회자로 구성된 답사팀과 함께 이 골짜기를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갔다. 도로의 한쪽 곁 산기슭에 펼쳐진 넓적한 바위에 일행 모두가 올라섰다. 아얄론 골짜기와 벧호론 비탈길을 바라보며 두서없이 지형과 전략적 중요성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을 열심히 설명했다. 별로 조리 있게 하는 말도 아니었는데 모두가 내 말이 이해가 되는 듯 동조의 눈빛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들고 현장검증 절차에 들어갔다. 나의 현장검증이라야 땅을 파고 유물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현장을 비교하는 일이다.

 

            

                                                 텔   팀 나

                                               

 일행 중 한분에게 여호수아 10장을 읽도록 부탁했다. 순간마다 나는 손을 들어 "저기가 바로 벧호론 비탈길입니다. 저 비탈길 꼭대기가 태양이 멈추었던 기브온 입니다. 이 하늘이 달이 멈췄던 아얄론 골짜기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곳이 바로 우박이 내렸던 곳입니다. 이 길을 가로질러 가면 아세가로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경사건의 현장에 서있는 것입니다"

 

 아! 이보다 더 확실한 검증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서로 짝을 지어 손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저 멀리 벧호론 비탈길로 도망쳐 내려오는 가나안 군인들의 아우성소리, 그들의 퇴각로를 따라 아세가까지 내렸던 우박소리, 그 뒤를 추격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이 나의 귓가에 맴돈다. 그들 모두가 이 한적한 아얄론 골짜기에 서있는 나의 앞을 지나간다.

 

  여호수아여! 태양과 달을 멈추었던 그 담대한 기도를 우리도 배우게 하소서. 

 

 

 

 

                     엠마오 - 평지에서 만난 사람들(2)

                                                     2006-02-22 11:28:32

              

 

          

                                               엠마오 십자군교회

 

 평지(Lower Land)의 아얄론 골짜기를 갈 때면 나는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가는 길이든 오는 길이든 나의 아얄론 골짜기 답사는 이곳을 반드시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나름대로 이곳에 들르는 이유가 있고 또 기대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아얄론 골짜기 나지막한 산기슭에 위치해있는 엠마오 기념교회이다.


                           엠마오(초대교회의 부흥)

 엠마오 마을에 대한 언급은 신약성경(누가복음 24:13)에 한번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요세프스의 기록에도(유대고사 XIV,11,2; XVII,10,7-9), 위경으로 알려진 마카비 1서(3:40; 57; 4:3)에서도, 랍비들의 문서에도 엠마오 마을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니 누가 봐도 누가복음의 엠마오는 실존했던 마을이었음이 분명하다.

 

 내가 찾는 아얄론 골짜기의 엠마오 기념교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도로와 인접해서 엠마오 기념교회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그 주변에 주차장이 없기 때문에, 길가에 차를 세우고 교회의 입구로 올라가야만 한다. 가다가 보면 주변 그 어느 곳에서도 엠마오라는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나가던 나그네가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어설픈 팻말이 하나있는데, 거기에도 엠마오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고 다만 니코폴리스(Nicopolis)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엠마오

 

                                                      엠마오 발굴지

 

 니코폴리스는 기념교회의 이름이 아니라 이 지역의 옛 이름이다. 이 지역이 니코폴리스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주후 3세기 로마의 황제로부터 얻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로마 사람들이 붙여준 니코폴리스라는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에 터를 잡고 살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곳을 "암와스(Imwas)" 라고 부른다. 아랍어 이름에 엠마오의 옛 이름 형태가 보존되어있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이곳은 엠마오, 니코폴리스, 암와스 또는 니코폴리스- 엠마오, 암바스-엠마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 엠마오는 언제 가보아도 한적하다. 수도승 한분만이 허름한 매표소 안에서 나와, 반가운 얼굴로 입장표를 내밀 뿐이다. 순례 객들이 이곳을 찾지 않는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엠마오 사건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또 다른 엠마오가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엠마오 마을로 추정되는 후보지가 내가 들리는 이곳을 제외하고도 아브-고쉬(Abu Ghosh), 엘-큐베이베(el-Qubeibeh), 칼로니예(Qaloniyeh), 세 군데나 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속의 엠마오 마을이 이스라엘 민족의 모진 역사와 그 땅의 풍파 속에서 이천 년이나 되는 그 긴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의미다.

 

 실제로 성경속의 대부분의 지명들은 이와 유사한 경험들을 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 목숨을 건 학자들의 노력 끝에  세상에 다시 태어난 곳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파괴하고 불태우며 그것들을 땅속에 묻었지만, 그들은 그 모진 아픔을 수천 년 동안 땅속에 고이 품고 그 긴 세월을 기다렸던 것이다. 

                               

                                                        엠마오 평면도

 

 나는 내가 찾는 엠마오가 지금까지도 의심을 받고 있는 이유와 순례 객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너무나 먼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도 의심을 받는다.

 

 기원후 4세기에 쓰인 바티간 사본(Codex Vaticanus)을 따른 누가복음 24장 13절에 의하면, 엠마오 마을은 예루살렘으로부터 60 스타디온(약 11km/ 이십 오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평지의 엠마오보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1km 떨어진 주변에서 엠마오를 찾으려했던 것이다. 실제로 내가 들르는 평지의 엠마오(임와스-니코폴리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3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엠마오 전경

 

                                                                   엠마오 기념교회

                                                                                                                            

 나는 궁금해졌다. 누가 자기의 집과 집터 모두를 교회를 세우려 양보했단 말인가? 로마인들의 박해와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서 이렇게 거대한 교회를 세웠던 엠마오 마을 사람들의 신앙은 얼마나 고귀하고 순결했으며 열정적이었을까? 나의 궁금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후 3세기에 이처럼 큰 교회가 이곳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마을에는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 크리스찬들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어디서부터 이 마을에 이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지폈을까? 나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한적한 이곳에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입가에는 벌써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그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그렇다. 그날 슬픔과 절망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돌아가던 그 두 제자가 분명하다. 단숨에 33km 예루살렘을 향해 뛰어갔던 그들의 뜨거움이, 이 마을에 일어났던 부흥의 불길을 지폈던 그 주인공일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다시 한번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며 엠마오 마을에서 불렀던 그 노래를 불러본다. 한소절도 채 끝내지 못하고 말았다. 내게도 이 땅에도!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하시고 그 부흥의 불길이 다시 한번 타오르게 하소서.

 

 

 

 

                   소렉 골짜기/텔 벧세메스 - 평지에서 만난 사람들(3)

 

                                                                              2006-02-22 11:29:18

 

 

 

               

 나의 성지답사 가운데 평지지역 답사는 일반적으로 몇 개의 골짜기를 들르는 것으로 진행된다.

평지(Lower Land)에 어떻게 골짜기가 있나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평지에 골짜기가 다섯 개나 있다.

 

 이 다섯 개의 골짜기는 주일 학교만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유명한 성경 사건의 현장들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아얄론 골짜기가 그 가운데 하나로 평지지역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 소렉 골짜기, 엘라 골짜기, 벧 구브린 골짜기, 라기스 골짜기가 평지를 동서로 내달리고 있다.

 

 그 가운데 다음 목적지는 소렉 골짜기이다. 소렉 골짜기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평지의 골짜기

 

 

                         소렉 골짜기 삼손과 두 마리의 암소

  아얄론 골짜기에서 남쪽으로 15분쯤 산악지역과 평지지역의 경계선으로 난 도로를 따라 몇 개의

나지막한 고갯길을 달려가면, 조그마한 시골 동네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마을을 가로질러 조그만 시내가 하나 흐르는데, 이 시내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렉 강(나할 소렉) 즉 소렉 골짜기에 흐르는 강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 강이 흐르는 골짜기가 소렉 골짜기인 셈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강은 강이고 개울은 개울이며, 하천도 그 크기와 중요성에 따라 지방에서 관리하거나 나라에서 관리하는 하천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항시 흐르는 곳이라면, 그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강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물이 귀한 나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텔 벧세메스

 

 

 이 소렉 골짜기 산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통과하자마자 오르막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 오르막길 오른쪽 길옆에 언덕이 하나 보인다.

 

 이곳이 소렉 골짜기 산기슭에 위치한 텔 벧세메스(텔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의미한다. 중동지역에는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성을 쌓고 살았던 옛 도시의 흔적이 언덕으로 남아 있는데, 이와 같은 곳을 텔이라고 부른다)이다. 길 가에 차를 세워놓고 30m쯤 걸어가면 텔 벧세메스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 텔 벧세메스에 올라설 때마다 나는 매번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골짜기에 놀라며, 그 골짜기의 비옥함에 놀라고, 이 골짜기에서 펼쳐진 성경사건에 놀라며, 나만이 느낄 수 있었던 아련한 추억 때문에 또 한번 놀란다.

 

                        평지가 유명한 성경 사건들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평지에 있는 이러한 골짜기들이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성경 사건들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평지는 블레셋 사람들이 살았던 해안 평야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던 산악지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산악지역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안 평야지역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아야만 했고, 산악지역에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야지역에 사는 블레셋 사람들이 산악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제지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는 중간에 위치한 평지는 두 민족 사이에 가로놓인 최전선인 동시에 완충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벧세메스는 평지의 소렉 골짜기를 장악하고 이 골짜기로 올라오려는 블레셋 군을 제지하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전략적 도시였던 것이다.

 

                                소렉 골짜기에 위치한 텔 딤나

 

 나에게 텔 벧세메스와 소렉 골짜기는 아주 특별 추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벧세메스를 생각하면 나는 그 곳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역사적 사건이 떠오르기 보다는 아름다운 꽃밭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모든 풀들이 말라버린 한여름에 벧세메스에 가도 나에게 벧세메스는 그저 아름다운 꽃밭으로 보일 뿐이다.

 

 어느 봄날 아름다운 노을이 석양을 수놓을 때 벧세메스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느라 여기저기 파놓은 언덕이 아니었다. 석양빛과 어우러진 빨강색 백합화가 언덕을 온통 수놓았는데, 그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텔 벧세메스에 올라서 소렉 골짜기 오른쪽을 바라보면, 넓지막한 골짜기 건너편으로 산들이 놓여있다. 그 산기슭이 힘세기로 유명했던 사사 삼손의 고향 소라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소렉 골짜기와 텔 벧세메스 

 

 벧세메스에서 해안평야 쪽으로 소렉 골짜기를 따라가면 삼손의 여인이었던 들릴라가 살았던 곳이며, 거기에서 좀 더 걸어가면 삼손의 첫 번째 부인 블레셋 여인의 고향 딤나(블레셋 사람들의 성)가 이제는 텔(언덕)이 되어 골짜기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다. 그러니 이곳이 사사기 13-16장의 현장인 셈이다. 다시 벧세메스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벧세메스에서 그 산까지 대로가 멀리 보이는데, 이 대로를 따라 들을 넘으면 블레셋 도시였던 에그론 성이 있다. 그러니 이곳은 사무엘 상 4-6장의 현장인 셈이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성서지리를 공부할 때 이 골짜기를 걸었던 경험이 있다. 우리의 목적지는 삼손의 고향 소라에서 들릴라가 살았던 소렉 골짜기를 지나 딤나까지 걸어간 후, 딤나에서 골짜기 반대편에 있는 에그론을 거치고, 에그론에서 산을 넘어 대로를 따라 벧세메스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그러니 사사기 13-16장과 사무엘 상 4-6장 사건의 현장답사였다. 성서지리학 클래스가 주로 미국 학생들이었기에 그들과 함께 배낭과 물통을 메고 성경과 지도를 들고 4월의 소렉 골짜기를 걷는데, 그 놈들이 어찌나 빨리 걷던지 나의 짧은 다리로 그들을 따라가느라 진땀깨나 흘려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가 4월, 드넓은 소렉 골짜기는 온통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황금물결로 장관이었다.

 

   일행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나는 황금 보리밭을 달려온 봄바람에 땀을 식히며 나만의 틈새 여행을 떠나곤 했다. 소렉 골짜기의 황금들판을 바라보며, 이곳이 힘세기로 유명했던 삼손이 가슴 설레며 블레셋 여인들을 만나러 갔던 그 길이겠구나! 그 우직한 삼손과 그 요염한 드릴라의 데이트 장소가 보리밭이었다니!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삼손은 가슴 설레며 걸었던 이 길이 죽음의 길이요 파멸의 길이었음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우리도 어쩌면 날마다, 순간마다, 삼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텔 벧세메스에서 바라 본 소렉

 

 딤나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준비한 자료집을 들고 텔 이곳저곳을 다니며 교수의 강의를 듣고, 블레셋 사람들 성이었던 에그론으로 향했다. 에그론을 거쳐 벧세메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수확을 막 끝낸 오렌지 과수원을 만났다. 그런데 파란 오렌지 잎 사이로 이곳저곳에 아직도 탐스러운 오렌지들이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저것이야말로 여행길에 지친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만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한 학생의 질문에 교수가 답하기를 저 나무에 남아있는 탐스러운 오렌지는 하나님께서 3,500년 전 특별히 우리가 이곳을  지날 것을 아시고 모세에게 명하여 율법으로 정해놓은 것이니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모두가 그 말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금 생각해도 교수의 그 대답은 말의 기교를 넘어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체험하도록 가르치는 놀라운 능력이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오렌지로 갈증을 풀고 집에 돌아가 먹을 생각으로 오렌지를 배낭에 주워 담기까지 했다.

  마지막 언덕의 모퉁이를 지나 벧세메스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렀을 때 이미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온종일 걸어 다닌 몸에 오렌지까지 한 짐 등에 짊어지고 걸었으니 몸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오렌지가 이제는 짐이 되어버린 셈이다. 은혜를 족한 줄로 여겼어야 했건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지나는 또 다른 나그네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음을 생각했어야 했건만, 나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음을 알았다.

 

   대로를 따라 저 멀리 벧세메스 언덕이 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벧세메스까지는 걸어가야만 했다. 나는 이 길을 지나갔던 두 마리의 암소를 생각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사무엘상6:10-14)."

  대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을 때 소렉 골짜기를 따라 죽 뻗어난 철로가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삼손의 고향과 벧세메스 사이를 지나, 블레셋 여인들의 고향을  통과하고, 해변의 도시 텔아비브를 거쳐 지중해 해변을 바라보며 하이파까지 내달리는 철로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다음엔 오늘처럼 이렇게 힘들게 걷지 말고 기차에 몸을 싣고 이 골짜기를 달려봐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아몬드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어느 봄날 그때 소렉 골짜기 대로를 걸으며 나에게 했던 약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750m 산꼭대기에 위치한 예루살렘에서 기차를 타고 산악지역의 가파른 골짜기의 절경에 흠뻑 빠져있는 순간, 기차는 벌써 평지의 소렉 골짜기를 달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삼손의 고향이 보이고, 왼쪽으로 벧세메스가 보였다. 드넓은 골짜기에 온통 싱그러운 보리들이 넘실거린다. 기차는 금방 삼손의 고향을 빠져나갔다.

  기차가 아름다운 지중해 해변을 달릴 때도 나의 생각은 소렉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나와 우리 모두는 지금도 내가 소렉 골짜기에서 보았던 인생의 딜레마와 씨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출처:Way-Glob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