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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교회 현주소 GIS 분석―① 한국의 바이블 벨트]

영국신사77 2009. 6. 4. 00:52

[5만 교회 현주소 GIS 분석―① 한국의 바이블 벨트] 기독교 첫 발 디딘 곳,서해안은 ‘복음의 땅’


 통계청 2005년 종교인구 현황을 토대로 한반도 지도 위에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지역을 표시해보면 하나의 뚜렷한 경향이 나타난다.

 기독교인 비율이 인구의 25%를 넘는 지역은 서해안을 따라 분포한다.

 맨 위에 인천 옹진군 백령도가 위치해 있고 강화군, 충남 서천, 전북 익산과 군산으로 이어지며, 전남 여수에 닿는다.

 서해안이 한국의 '바이블 벨트' 라는 게 확인된다.

 2005년 기준 전국 240여 시·군·구 가운데 인구대비 기독교인 비율이 25%를 넘는 곳은 모두 20곳이다.

 기독교인 비율이 가장 높은 곳전남 신안군. 인구의 34.98%가 기독교인이다.

 경북 울릉군(31.68%), 전북 익산시(31.27%), 군산시(31.05%), 김제시(30.17%) 등도 30%를 넘는 지역들이다.

 수도권 일대 도시 지역에서는 경기도 과천시(29.86%), 용인시 수지구(27.82%), 의왕시(26.59%), 고양시 일산서구(25.16%), 성남시 분당구(25.06%)등이 기독교인 비율 25%를 넘는 지역으로 집계됐다.

 바이블 벨트로 엮인 땅들은 100여년 전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백령도는 한국 기독교의 관문이었고, 강화군은 1860년대 성공회가 첫 발을 디딘 곳이다.

 충남 서천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성경이 전해진 땅이다.

 또 익산시, 목포시, 여주시, 이천시 등에서는 19세기가 저물기도 전에 교회당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초기 교회들은 진리에 목마른 이들에게 새 소망을 주었고, 헐벗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

 기독교는 또 배움에 목말라하는 이들을 위한 학교 설립 등을 통해 깊고 넓게 퍼져갔다.

 교회들은 일제 식민시대에는 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순교의 피도 흘렸다.

 산업화 시대엔 낯선 곳에서 외로워하는 이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서해안 바이블 벨트는 초기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 위에서 지금도 모범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다.

 백령도=한국 기독교의 관문… 주민 70%가 교인 백령도 주민들은 일요일에는 고기잡이와 농사일을 일절 하지 않는다.

 백령사랑교회 김주성 목사는 "백령도 주민에게 기독교는 생활의 뿌리"라며 "철저한 주일성수와 예배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고 말했다.

 인천 옹진군 인구는 12만여명. 이 중 29.08%가 기독교인이다.

 백령도는 복음화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12개 교회(2개는 군인교회)가 있고, 주민 4300여명 중 70%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중화동 교회

 김 목사는 "초기 기독교 복음화 과정에서 백령도는 사울의 탄압을 피해 다윗이 몸을 숨겼던 아굴람굴과 같은 땅이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의 부패로 고통받던 이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백령도 토박이인 향토사학자 김지현씨는 "외부의 큰 간섭없이 신앙생활을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것이 높은 기독교인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백령도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1816년이다.

 호러스 G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딘 해보다 70년이나 앞섰다.

 영국해군 H J 클리포드와 바실 홀이 업무수행차 백령도에 상륙하면서 복음이 전해졌다.

 1898년에 설립된 중화동 교회(사진)는 백령도 교회들의 모태가 된 곳이다.

 15년째 중화동교회를 지키고 있는 전응류 목사는 "클리포드와 홀이 상륙한 지 82년만에 중화동 교회가 설립됐다"며, "1900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예배당을 방문, 첫 세례식을 거행한 이 교회는 한국기독교사의 서막을 연 관문으로 기록돼야 한다"고 말했다.

 강화군=저항의 역사 간직… 代 이어 신앙생활 강화군의 기독교인 비율은 29.91%이다.

 강화군 선교는 1893년 성공회와 감리교가 함께 시작했다.

 강화 최초 교회는 1900년에 건립된 성공회 강화성당(사진). 이 성당은 한옥 구조물에 서양 기독교 건축형태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인천지방 문화재로도 지정돼 있다.

100년이 넘은 이 교회에서는 지금도 100여명의 교인들이 참석해 예배가 이뤄지고 있다.

강화군에는 성공회 성당을 포함해 188개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성당 김준배 신부는 "강화군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것은 4∼5대를 거쳐 신앙생활을 계속 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배를 드리는 곳에 자녀들이 동참해 자연스레 기독교인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강화군은 병인양요(1861년), 신미양요(1877년) 등 외침이 많았던 곳이라 외국 문명에 대한 저항감이 크다.

 이런 곳에 외래종교가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 기독교가 보여준 철저한 민족정신 때문이다.

 강화기독교역사연구회 이은용 회장은 "일제에 저항해온 기독교인들의 꼿꼿한 자세가 애국과 신앙을 동일시하게 했다"며, "여러 대를 거쳐 교회에 대한 애정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 서천군=성경이 제일 먼저 도착한 땅 서천군 서면 마량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경이 전해진 곳이다.

 이곳엔 '한국 최초 성경 전래비'와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104주년 추모비가 관광객을 맞는다.

 아펜젤러는 1904년 목포로 가던 중 서천 인근 어청도에서 배가 침몰할 때 여학생을 구한 뒤 기력이 다해 사망했다.

 서천군의 기독교인 비율은 27.65%에 달한다.

 십자가교회 정근중 목사는 "서천군은 비교적 성경연구가 활발한 편"이라고 전했다.

 서천군은 성경전래지로서의 전통 보존을 위해 마량리 주변 바다(3만3000여㎡)를 매립, 종교문화박물관과 조각공원, 상징탑 등을 만들고 있다.

 박물관에는 1816년 조선에 성경을 전파한 영국인들이 타고 온 배에 남아있던 서적 등 각종 물품이 전시된다.

  군산시=호남 선교의 모태… 연합 정신 돋보여 군산시는 '호남선교의 모태'라는 자부심이 큰 곳이다.

  군산에는 호남 최초 교회인 구암교회(사진 구 예배당)와 개복교회가 100여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 남장로회 윌리엄 M 전킨 선교사 등이 1892년 제물포로 입국한 뒤, 이듬해 1월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하고 호남지역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구암교회 최태웅 장로는 "전킨 선교사와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선교사 공의회에 포함된 장인택 조사 등 7인이 이 교회를
 
 
                   구암교회(사진 구 예배당)
 
설립했다"면서, "구암교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3·1 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고 전했다.

 인구 26만여명의 군산시에는 교회가 576개나 된다.

 군산시내 중심지인 나운동 일대에는 교회 간판이 즐비하다.

 개복교회 최광렬 목사는 "한국의 성자로 불릴 정도로 청렴한 생활을 한 이세종 선생과 같은 이들이 심어 놓은 기독교 영성과, 내 교회 네 교회를 가리지 않은 연합정신이 지역선교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령도·강화·서천·군산=윤중식·이도경 기자 (국민일보)
200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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