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예루살렘(종합)

‘예수의 숨결’을 찾아서 <中> 십자가의 길

영국신사77 2009. 3. 1. 09:26

예수의 숨결’을 찾아서 <中> 십자가의 길
                                            [중앙일보] 2008년10월02일

“나 아닌 너 위해 울어라” 예수의 메아리
예수 쓰러지고 숨진 곳에 교회 세워져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숨을 거두고, 다시 살아난 장소에 세워진 성묘교회.


의외였다. 그리 멀지 않았다. 예수의 어깨에 처음 십자가가 얹힌 곳, 거기서부터 골고다 언덕까진 800m에 불과했다. 건장한 젊은이라면 한 달음에라도 달려갈 거리였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짧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득했다.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 이 세 단어가 그 길에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과 슬픔으로 범벅된 인간의 삶. 그 삶에 위안의 선율, 치유의 노래를 실으며 지금도 울어대고 있었다. 바로 예수가 비틀대며 걸었던 그 길 위에서.

지난달 20일 그 길에 섰다. 이스라엘 현지인들은 그곳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불렀다. ‘슬픔의 길(혹은 ‘십자가의 길’이라 부름)’이란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그 골목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양옆으로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라 장을 보러 나온 무슬림 인파로 골목은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했다.

그 골목을 헤치고 ‘예수의 걸음’을 찾았다. 어디쯤일까. 어디서 예수는 사형 선고를 받고, 저 너머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멘채 걸었을까. 시장을 통과해 좁은 골목을 돌자 그 첫 장소가 나타났다. 바로 예수가 재판을 받았던 ‘빌라도 법정’이었다.

이곳에서 예수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유대인들은 몇 번이나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며 빌라도 총독에게 외쳤다. 예수에게 그곳은 ‘외로운 자리’였다. 주위에는 그를 따르던 제자도 거의 없었다. 멀리 서서 따라왔던 베드로는 세 번이나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그때 새벽을 알리며 닭이 울었다. 그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슬피 울었다’(마태복음 26장75절)고 한다. 그는 통곡하며, 피 같은 울음을 토했을 것이다.

빌라도 법정의 정문 앞 계단에 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나의 하루, 우리의 하루가 보였다. 비단 베드로뿐이었을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예수를 부인한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부인과 닭울음 소리, 그리고 통곡은 ‘또 하나의 길’이었다. 우리를 예수의 가르침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하는 ‘통곡의 통로’말이다.

십자가를 메고 가던 예수가 처음으로 쓰러진 장소에는 작은 폴란드 교회가 세워져 있다.
예수는 맞은편 빌라도 총독의 관저에서 십자가를 멨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십자가의 무게가 70㎏ 정도였다고 한다. 성인 남자의 몸무게와 맞먹는다.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제자들은 “깨어있어라”는 예수의 말을 듣고도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그때 체포된 후 예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모진 매질과 고문까지 당했다. 그리고 죽음이 눈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십자가를 멘 예수의 ‘한 발짝’이 얼마나 무겁고 힘겨웠을까.

결국 예수는 100m도 못 가서 쓰러지고 말았다. 총독 관저에서 내려오다 왼쪽으로 꺾이는 모퉁이. 거기서 예수는 십자가를 멘 채 처음으로 쓰러졌다. 바닥에는 지금도 큼직한 돌들이 깔려 있었다. 로마 시대에 만든 도로였다. 그 위로 예수의 십자가가 ‘쿵!’하고 떨어졌을 거다. 당시 얼마나 많은 구경꾼이 몰렸을까. 어떤 이는 예수를 조롱하고, 또 어떤 이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는 작은 폴란드 교회가 서 있었다. 건물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멘 채 쓰러진 모습이 조각돼 있었다. 외국인 순례객들은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그 앞에 섰다. 예수와 십자가, 십자가와 예수. 그 둘이 번갈아가며 가슴을 때렸다.

십자가를 멘 채 예수는 두 번이나 더 쓰러졌다. 그런 장소마다 작은 예배당이 세워져 있었다. 당시 비틀거리는 예수 뒤에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따라왔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예수는 제 몸조차 가누지 못했을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말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마라.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Women of Jerusalem! Don’t cry for me, but for yourselves and your children. 누가복음 23장28절)”

힘겨운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저 어디쯤이었을까. 여자들의 울음 위로 예수의 가르침이 흘렀던 곳이 말이다. 예수는 멈추지 않았다. 무릎이 꺾이고, 고개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메시지’를 멈추지 않았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 울어라.” 무슨 뜻일까.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감겨오는 ‘메시지’는 달랐다. 그건 단순한 ‘예언’이나 ‘경고’가 아니었다. 그보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 울어라.” 그건 예수가 건네는 ‘열쇠’였다.


예수는 이미 말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거함’이란 뭘까. 교회 예배당에 앉아있는 순간이 ‘거함’일까. 아니면 성경을 손에 잡는 순간이 ‘거함’일까. 거함의 순간은 하나다. 회개를 통해 ‘에고’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나’는 무너지고, ‘예수’만 남는 순간이다.


그럼 예수는 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고 했을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이렇게 기도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그것이 ‘울음’이다. 하나님(하느님)을 위해 운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을 위해 운 것이다. 그런 울음의 순간에 ‘내 뜻’이 무너지고, ‘에고’가 무너진다. 그렇게 에고가 무너져내릴 때 온전한 ‘거함’도 이뤄진다.

예수의 시신을 염했다고 전해지는 성묘교회 안 바윗돌에 순례객들이 두 손을 올린 채 기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십자가를 메고 한 발짝도 떼기 힘든 처참한 상황에서도 예수는 사람들에게 ‘열쇠’를 던졌던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수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숨결이 십자가의 길, 그 골목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순례객의 눈에선 눈물이 ‘핑’ 돌았다. 골목을 돌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애잔한 흔적은 이뿐만 아니었다. 십자가의 길, 곳곳에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서서 아들을 기다렸다는 장소에도 섰다. 머리에는 가시관, 채찍질로 피범벅이 된 몸, 어깨를 짓누르는 십자가 아래서 죽음을 향해 발을 떼는 자식을 지켜보던 마리아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계속 올랐다. 마침내 골고다 언덕이 나타났다. ‘골고다(Golgotha)’는 ‘해골 터’라는 뜻이다. 예수 당시에는 공동묘지였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이 거기서 집행됐다. 그곳에 ‘성묘교회(거룩한 무덤 교회)’가 서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숨을 거두고, 다시 살아난 장소 위에 지어진 교회다. 그래서 ‘기독교 최대의 성지’라고 불린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편에 예수를 눕혀서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장소가 있었다. 4∼5m쯤 옆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둔 곳이었다. 성경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게 ‘아침 9시’(마가복음 15장25절)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오후 3시’(마태복음 27장45절)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예수는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햇볕은 무척 따갑다. 그냥 서 있기도 힘겹다. 예수는 그 볕 아래서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는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하는 시편 22편의 구절을 읊기도 했고, 십자가 아래에 있던 어머니 마리아와 말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러다 예수는 마지막으로 외쳤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누가복음 23장46절)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예수가 숨을 거둔 자리에 섰다.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외침’을 되뇌었다. ‘나의 영과 나의 혼, 그걸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순례객들은 눈을 감았다. 그건 ‘외침’ 이전에 ‘기도’였다.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영혼까지 던지는 ‘예수의 기도’였다. 눈곱만큼의 ‘에고’도 끼어들 틈이 없는 ‘온전한 기도’였다.

계단을 내려왔다. 교회 아래층에는 예수의 시신을 염했다는 평평한 바윗돌과 시신을 두었다는 동굴 무덤이 있었다. 동굴 무덤을 보기 위한 순례객들의 줄은 아주 길었다.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예수가 묻힌 곳은 과연 어디일까. 예수가 묻힌 곳은 진정 어디일까.

그건 동굴 무덤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의 심장, 우리의 가슴이었다. 그곳에 예수가 묻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부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뭘까. 어떤 노래와 어떤 울음, 또 어떤 기도가 ‘예수’를 살아나게 할까. 그 ‘열쇠’가 십자가의 길, 처음부터 끝까지 깔려 있었다.


예루살렘 글·사진=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