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엘 무디(D. L. Moody)는, 183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州)의 노스필드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디가 4 살 되던 해에 아내와 7남매, 그리고 빚을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자연히 무디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생계를 돕기 위해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무디는 어머니의 청교도적인 교육에 힘입어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을 수 있는 열정과,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 듣는 이에게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할 수 있는 언변, 그리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의 적극성 등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17세 때,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와 메사추세츠의 클린톤에서 신문 배달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실수로 인해 해고당했다. 그 후, 무디는 보스턴에 있는 삼촌의 구두 가게에서 4가지 조건 아래 구두 수선 일을 하였다. 그 조건들 중에 교회의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것도 있었지만, 무디의 꿈은 빨리 돈을 벌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었기에, 신앙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55년 4월 21일, 무디가 보스턴에 있는 교회에 나간 지 1년이 지난 때였다. 그의 주일학교 교사였던 에드워드 킴볼이 그를 찾아왔다. 무디의 영혼을 걱정하던 그는, 몇 번이나 미루다가 그날 마음을 정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무디,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체험이 있는가?"
"글쎄요. …저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고, 지금도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은 '자네가 개인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네. 나는 자네의 영혼을 두고 기도를 많이 했네. 오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킴볼 선생과의 대화는, 형식적인 신앙 생활에 젖어 있던 무디의 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 날 무디는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 받은 날 아침, 밖으로 나가 만물을 보았습니다. 태양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도 내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구원을 받자마자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머니, 기뻐해 주세요. 1837년 2월 5일은 제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생일이지요? 18년이 지난 오늘 4월 21일은 성령으로 제 영혼이 거듭난 생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쓰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거듭난 후에도 그에게는 10만달러를 벌겠다는 변하기 힘든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멸망하는 영혼을 보았을 때, 그는 어린시절부터 끊임없이 갖고 있던 꿈을 아낌없이 버린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꿈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랑은 불같은 정열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가 하루동안 한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잠자리에서도 일어나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거듭난 지 1년 후 무디는 시카고로 가서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한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했다. 그는 처음에 아이들을 모으는 일에 마음을 써서, 16명에 불과하던 주일학교가 몇 년만에 1,000여 명이 모일만큼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무디는,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860년부터는 사업을 정리하고 복음 전도에 전무했는데, 술집을 개량하여 만든 그의 설교 장소에는 주로 빈민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마 후 모여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교회(일리노이 스트리트)가 지어졌고, 무디는 자연스럽게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세움을 입었다.
그 후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의 노예 폐지론을 지지하며 전쟁터로 달려간 무디는 군인 교회에서 1,500여 차례 집회를 가졌고, 매번 집회를 연병장에서 가져야 될 정도로 그의 집회에는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어떤 교리에도 매이지 않았고,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죄를 모두 사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치중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관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서, 그가 가는 곳마다 비방하는 무리들이 뒤따랐지만, 그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큰 감명을 받고 복음 편에 섰다.
1867년 무디는 영국을 최초로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무디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기 위해,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와 찰스 스펄전, 그리고 헨리 발리 목사를 만나게 해주신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무디의 정열적인 전도 방법과 교회사업에 대해 듣고는,
"30세가 된 무디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디를 통해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라고 대답한다. 무디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속에 자신이 쓰임을 받게 된 것임을 알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또 찰스 스펄젼의 설교를 듣고는 무디는 충격을 받게 된다. 스펄젼의 설교의 힘과 해박한 지식 앞에 그는 자신의 보잘것 없음과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 외치게 된다. "주여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이런 낮아짐 속에서 그는 헨리 발리목사가 인도하는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무디는 여기서 그의 평생의 지침을 얻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무디는 이 말에 놀라게 된다.
갑자기 그는 그 자신이 크고 유명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 조그만 무디와 하실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디는 헨리 발리목사의 말을 듣고 자신이 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며, 그 말은 그의 생전에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한다."
영국을 다녀온 후 무디는 청소년 설교자 헨리 무어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헨리 무어하우스는 무디의 교회에서 6일 동안 요한복음 3장 16절 한 구절로 설교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헨리 무어하우스는 매일 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설교하게 되었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 그는 강단에 서서,
"여러분 저는 온종일 설교할 새로운 본문을 찾아 보았습니다만
요한복음 3장 16절보다 더 좋은 말씀을 찾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또다시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역설하였다.
설교의 마지막에는 그는 "저는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둔한 이 혀로는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내가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능자의 앞에 있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하나님의 세상 사랑하심을 들을 수 있다면. 그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일 것입니다."
무디는 이 청소년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두 가지의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먼저는 말씀의 무한한 깊이를 알게 되어, 그 후 성경을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모든 설교의 중심을 성경에 두게 되었다. 학교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과정 5년 뿐인 그였지만, 그는 부지런했고 매일 새벽 4시면 성경을 공부하는 성경학자가 되었다.
만일 능력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능력을 주시면 행사케 하시는 주체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등한히 하고서는 결코 그 능력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무디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가 설교할 때는 그 시간이 오전이건 오후건 할 것 없이 청중이 몰리게 된다. 이것은 다름아닌 이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성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헨리 무어하우스로부터 무디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배우게 된다. 그 동안 무디는 하나님께선 죄인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리라는 설교를 통해. 무서운 지옥 대신에 천국을 가야한다고 설교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어하우스는 사랑의 하나님을 말해줌으로써 죄인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공포에 쫓기어 천당을 가는 노예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어 돌아오는 아들들을
원하셨던 것이다. 무디는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의 경험과 헨리 무어하우스로부터의 교훈은 그후로 무디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교훈이 되었다.
1871년 시카고의 파웰홀에서 설교를 하고 폐회기도를 했을 때,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잿더미가 된 거리에서 무디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집도, 그의 교회도, 그의 주일학교도... 하지만 재가 된 그 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잃은 것보다 구한 것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된다.
영국에서 그가 얻은 것은 화재로 잃은 것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셨던 것이다. 잿더미 된 도시의 피난민 구제소에서 그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1873년 무디는 영국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복음전도의 문은 궁핍과 고난을 함께 수반하는 어려운 것이었다. 무디 개인의 자비(自費)로 시작된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방해를 받게 된다.
종교가들의 비방과 복음전도방식(무디는 설교에 앞서 생키로 찬송가를 부르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켰다)에 대한 불만, 게다가 개인적인 생활에 대한 모함(근거없는 소문에 의한) 등 그의 전도를 방해하는 힘이 너무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무디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도록 맡겼기에 3년간의 영국 전도여행은 영국이라는 섬 전체를 진동시키게 되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수천의 타락했던 그리스도인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으며, 영국 전체를 교파적인 불일치에서 떠나 복음주의 정신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그는 영국을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쓰임 받은 것이다.
"묵도하심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무디가 영국에서 돌아온 뒤 미국의 온 대륙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시초가 된 뉴욕집회의 첫마디 말이다. 이로부터 미국대륙(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세인트루이스, 신시내티, 시카고, 보스턴과 그 외의 중소도시)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긴 한 사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다.
1876년부터 시작되어 1881년까지의 미국의 전도집회에서 무디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짧게는 몇 주에서부터 길게는 몇 달에 걸쳐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후에도 무디는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복음이 필요한 곳,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될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하게 된다.
무디는 그의 생애를 통해 2억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외에도 교회와 성경학교, 성경연구원, 서적협회 등 많은 기관들을 발족시켰다.
그는 세상에서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는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자기자신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계속해서 쓰실 수 있던 이유는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겸손을 꾸미는 자가 아니었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겼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욱 놀랍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다가 스스로 높아짐으로 그 길에서 어긋나는지 모른다. 무디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 바로 직전까지 사용하신 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디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디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컬컬한 목소리와 많은 문법적 오류 등 설교에도 결함이 많았지만, 그가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위의 말처럼,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도구로 쓰셔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심령들을 건지셨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가 남긴 여러 말씀들을 통해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무디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작정한 후부터, 그는 사람의 영혼에 강하게 역사하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모든 일을 어떤 망설임도 없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자기에게 해로운 것일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돈에 대해 너무도 깨끗했다. 그가 하나님께 바쳐진 이후, 그에게 돈은 다시는 시험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는 돈을 버는 방법을 알았고 능력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사용하게 되는 것이었다.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L.무디라고 서명하고 목사 안수받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단지 평범하게 무디씨 혹은 부흥사로 불러주기를 원했다.
무디는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라는 것을 믿었다. 그는 실제적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론상의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의 신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말이다.
"여러분은 어느 날 무디가 죽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말을 하나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나는 지금보다 더욱 더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899년 12월 22일 세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세상에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하여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D. L. Moody의 경우는 죽음의 상념과 죽음의 경험 그 자체를 동시에 나타내는 예의 하나이다.
무디는 1899년 죽음이 임박했다. 12월 22일 금요일 아침, 그의 아들 윌은 복도 건너편 아버지의 방에서 무디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고.
그 때 윌은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무디는 말하기를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윌, 정말 아름답다. 정말 황홀하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무디는 의식을 잃어 갔다.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고 정말 행복하다고 하면서 의식이 끊어 졌다. 주치의가 구명 노력을 하자 다시 살아나 자기가 이 세상 바깥에 갔다왔노라고 말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애들도 만났다고 했다. 누구를 보았느냐고 묻자 무디는 아이린과 드와이트를 만났다고 말했다. 무디는 이렇게 말한 후 영원한 내세로 갈 신호를 받고, "무엇으로도 나를 더 이상 잡아둘 수 없다. 마차가 방안에 와 있다"고 말하며 밝은 천국으로의 기대에 안겨서 숨져 갔다.
Mrs. D는 회복 후 그녀가 죽어 있는 동안에 본 일을 기술했다. 찬란한 밝은 빛에 휩싸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녀의 죽은 남편 등 친지들을 만났다. 그녀는 하늘 나라에 머물고 있고 싶었는데, 예수께서 그녀가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음을 알리도록 보냈노라고 말했다. 그 후 그녀는 의사(롤링즈)를 전화로 불러 자기는 하늘 나라에 가서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니 이번에는 내가 다시 살아나도록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천사는 번쩍이는 건물과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 동화 같은 도시의 길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도처에 아름다운 빛이 가득 했다. 그 빛은 불타는 듯 현란했으나 눈을 가려야 할 만큼 강한 것은 아니었다. 황홀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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