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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세(朴淵世) 목사

영국신사77 2008. 7. 20. 22:32




                       박연세(朴淵世)

 

                                                                        sohyuk2 2003.10.21 06:53


 

“천황 폐하가 높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높습니까?”

 1944년 1월 대구복심(覆審)법원에서 열린 형사재판. 재판장 좌승보무(佐勝保戊)가 박연세(朴淵世·達三이라고도 부름) 피고인에게 물은 말이다.

 이에 대해 박 피고인은 조금도 두려움없이 대답했다.

 “저는 육체적으로 천황을 존경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합니다. 언젠가는 천황도 예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박 피고인의 답변이 떨어지자 깜짝 놀란 재판장과 관여검사는 교도관들에게 박 피고인의 입을 저지토록 했다. 이 날 방청석에는 박 피고인의 제자 서남동(徐南同)목사가 지켜보고 있었다.

 박연세 목사. 그는 평양에서 목회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애국심과 교회를 위해 신앙으로 정조를 지킨 목회철학은 후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전북 최초의 3·1운동이었던 군산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일본의 천황제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이다. 또한 일본 기독교단 조직에 반대,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속에 대구형무소 독방에서 민족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얼어 죽어야 했다.

그래서 「호남선교 100년과 그 사역자들」을 펴낸 김수진 목사는 그를 ‘민족구원에 앞장선 목사’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박연세 목사는 1883년 김제군 용지면 신사리에서 대대로 농토를 일구어
온 박자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농사를 도우며 인근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그의 아버지는 군산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전킨(W.M.Junkin·전위렴) 일행을 우연히 마을 앞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군산에 주재하며 김제지역에 까지 복음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전킨 선교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과 함께 외국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국법으로 일가 친척할 것 없이 씨족을 멸하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박연세에게 편지 한장을 써주면서 전킨 선교사가 살고 있는 군산
구암(궁멀)으로 보냈다. 전킨은 1902년 부터 사랑채에서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고 있었다. 이것이 군산지방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명(永明)학교의 출발이었다. 그의 부인도 안방에서 멜볼딘 여학교를 열기 시작했다. 이들 부부는 군산 최초의 남녀학교 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전킨 부인은 그 후 전주로 옮겨와 기전여학교를 세웠다.

 영명학교는 고등과 4년과 특별과 2년제로 편성돼 초등교육부터 전문대학 과정까지 가르쳤다. 이 학교는 1909년 학급증설과 아울러 현대식 3층 건물의
새 교사를 신축하였다.

 박연세는 영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전킨 선교사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이미 고향에서 한문교육을 받은 경력이 있어, 고등과에 진학해 4년 과정을 이수하였다. 곧 이어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에 있는 신명학당에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 학교는 1909년 김해 김씨 문중에서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3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해 설립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젊은이들에게 이상과 꿈을 심어주는 한편 김신애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김신애의 처외조부 김준은 유강리 출신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킨 바 있었다.


 박연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15리가 넘는 이리 고현고회에 나가 성경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실력이 알려지자 모교인 영명학교에서 그를 초빙하였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군산으로
이사한후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 넣었다. 동시에 많은 젊은이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이웃에 있는 구암교회에 출석, 봉사하였으며 장로 장립을 받고 교회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26일 그의 제자 김병수가 찾아왔다. 세브란스 의전에 다니는 김병수는 박연세에게 신명학당과 영명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아끼는 제자였다. 김병수는 3·1운동과 관련된 서울의 움직임을 알리고 28일 다시 내려와 비밀리에 독립선언문 95매를 전해주었다.

 이 독립선언문은 세브란스병원 제약실에 근무하던 이갑성씨(민족대표 33인중 한분)가 민족의식이 투철한 김병수에게 군산지역 연락책임을 맡기고, 김병수는 그의 스승이었던 박연세를 찾아가 전달한 것이다.


 박연세는 민족적인 거사를 추진키 위해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 김수영 송정헌 등과 함께 만세운동 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학생인 조옥초를 급히 상경시켜 민족운동자들과 접촉하게 하고, 김영후와 송기옥 학생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거사에 사용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도록 했다. 학생들은 기숙사 골방에 숨어 밤새도록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3천5백매를 만들었다.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 등을 발각되지 않도록 멧재 속에 파묻고 거사일인 3월 6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거사 전날,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아 군산지방 책임자였던 박연세를 비롯 이두열 등 교사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바로 이때다 하고 비상종을 울렸다. 그리고 숨겨 두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 나왔다. 일본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공포탄을 쏘며 위협하였지만 학생들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줄 몰랐다. 구암예수병원 직원들과 멜볼딘 여학교 학생까지 이 소식을 듣고 합세, 군산시내 중심가인 경찰서로 행진할 때는 온통 태극기 물결로 뒤덮였다.

 일본경찰은 할수없이 이리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대를 불러 겨우 진압할수 있었다. 이날 시위로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 교사를 비롯 학생등 1백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시위는 그날로 그치지 않고 3월 20일 1천여명의 횃불시위로 이어졌으며, 4월4일 1만여명이 모인 이리 역전 시위로 번져갔다. 결국 박연세는 보안법등 위반혐의로 대구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아야 했다. 수감생활중 그는 민족과 신앙생활에 대해 깊은 묵상에 잠기곤 하였다.

 형기를 마치고 군산에 돌아왔으나 교직에 설수가 없었다. 마침 전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3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25년 졸업과 함께 이리지역의 어머니 교회격인 고현교회와 황등 동련교회 위임목사로 초빙되었다. 1902년에 세워진 고현교회는 이리제일교회 신광교회 만석교회 송학교회의 모태가 된 교회다. 그는 목회일 뿐만 아니라 고현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경신학교, 동련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계동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등 바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1926년 9월 목포에 있는 양동교회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전남지역 최초의 교회인 목포 양동교회에서 청빙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양동교회를 규모가 큰 교회로 성장시키지 않았다. 인접지역의 모든 주민들을 교인화 하겠다는 철학을 가지고 무안 죽교교회, 연동교회, 중앙교회로 분립시켜 주었다. 더욱이 교회의 분립뿐 아니라 그 교회를 이끌 수 있는 지도자를 묶어서 보내 주었다.

 이같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는 전남지역 교계에서 절대적인 신임과 높은 지도력을 발휘할수 있었다. 1927년 전남노회 정기총회에서 부회장을 거치지 않고 곧 바로 노회장에 선임된 이래 1932년, 1937년, 1938년 등 4번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의 제30회 노회는 순탄치가 않았다. 가장 큰 현안인 신사참배 문제가 걸려 있었다. 이미 제주노회와 순천노회 그리고 평북노회 등이 신사참배 결의를 하고 전남노회장 박연세 목사를 옥죄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이라는 일제의 강요에 그도 어쩔수 없이 동참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황민화 정책이라는 것을 알고 분연히 도전을 하고 나섰다.

 

 1942년 7월 일본경찰은 그에게 몇차례 찾아와 지나(支那)사변 5주년을 맞아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천황을 숭배하는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설교를 통해, 천황을 찬양하라는 부탁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일본을 비난하고 말았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일본기독교단이 발족되면서 목포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를 통폐합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에 대해서도 연동교회 이남규 목사와 함께 반대하자, 두 목사를 비롯 교회 관계자등 30여명을 구속시키고 말았다. 불경죄와 보안법 위반등 각종 죄목을 뒤짚어 씌워 그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결국 1년 동안 미결수로 있다, 1943년 10월 목포지법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복심법원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그곳 대구형무소 차디찬 감방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일경의 농간으로 한달 후에야 목포로 가져올 수 있었다.

◈ 박연세

 목사의 교맥과 후손

 박연세 목사는 목회와 교육활동을 통해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특히 그가 후반기에 활동했던 전남지역에서 주로 복음의 싹을 키웠다. 그가 기른 대표적 인물로 이남규 목사와 서남동 목사를 꼽을 수 있다.

 이남규 목사(1901-1976)는 박목사의 뜻을 따르면서 그의 일에 적극 협력해 준 사람이다.
이목사는 목포 양동교회 당회장이었던 박목사가 분립해 준 목포 연동교회의 첫 목회자였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목사는 박목사가 신사참배 거부 등 일제와 싸울 때 가장 가까이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1942년, 일본 제국의회가 결의한 일본적 기독교회가 이 땅에도 밀려 왔다. 이에 따라 목포지역에서도 교회 통폐합과 일본 천황에 대한 신앙을 강요했다. 이때 이목사는 박목사와 함께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박연세 목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양동교회를 담임하면서 재건에 힘을
쏟았고 해방후 목포지방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1946년에는 입법의원, 1948년에는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전남지사를 지냈다. 또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과 1959년 한국교회협의회(N.C.C.) 회장도 역임했다.


 전남 신안출신인 서남동 목사(1918-1984)는 민중신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목포 영흥학교에서 박목사로 부터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배웠다. 이어 전주 신흥학교 고등과를 다니며 서문밖 교회에서 신앙을 쌓아 올렸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 대학 신학부를 마쳤으며, 5년 동안 방학 때마다 박목사를 찾았다. 박목사는 서목사의 훌륭한 설교를 위해 그 큰 양동교회 강당에 설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서목사는 대구 남문교회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목회를 하면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박목사를, 한달에 한번씩 실시하는 면회 때마다 찾아 뵈었다. 대구 감방에서 박목사가 사망하자 시신을 수습한 것도 그였다.

 

 서목사는 사망 전갈을 듣고 박목사 부인에게 전보를 쳤지만 소식이 없어 일단 대구형무소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 전보는 목포경찰서장과 우체국장이 짜고 고의로 한달후에 전달했다.

 

 그 후 서목사는 이남규 목사 그리고 박목사의 딸과 함께 시신을 목포로 운구, 장례를 치렀다. 박목사는 1991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고, 유해는 유성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서목사는 1952년 한국신학대학 교수, 1961년 이후 연세대 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유신시절 “유신정권은 타락한 정권”이라고 저항하다 해직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그의 민중신학은 신학분야는 물론 사회과학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책은 세계 여러나라에 소개되었다.

 한편 박목사의 유족으로는 유일한 혈육인 딸 박지영씨(76)가 있으며. 사위 김오봉 장로(79)는 광주 수피아 여고 교장을 역임했다.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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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력
▲1909년 군산 영명학교 졸업, 김제 신명학당 교사
▲1914년 군산 영명학교 교사, 군산 구암 교회 장로 

▲1919년 군산지역 3·1운동 주도로 투옥, 2년6개월 복역
▲1925년 평양신학교 졸업, 익산 고현 교회와 동련교회 담임목사
▲1926년 목포 양동교회 당회장
▲1927, 1932, 1937, 1938년 전남 노회장 역임
▲1942년 신사참배, 천황제 반대로 투옥, 1년 미결수와 1년형 선고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교
▲1991년 건국훈장 추서


                                                 출처 : [기타] http://www.gojb.net/culture/EsPersonView_k.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