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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Masada] 요새 (4)

영국신사77 2008. 8. 31. 00:42

마사다 요새 

 

 

 시나이 반도를 지나 옆으로 홍해를 끼고 이스라엘 국경을 향해 갈 때 모습 ..

                                              푸른 바다는  홍해이며,  건너편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인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검문소인   타바 검문소

                 

 

 마사다 요새를 연결하는 케이블 카[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

 

 

마사다 요새
 

  이집트  시나이 반도를 지나  타바 국경에 도착을 하였다. 까다로운 짐검사때문에 세시간 동안 국경검문소에서 지체를 하였으며,  이곳에서 여권에 스탬프를 찍지 말라고 하여 별도의 용지에 스탬프를 받았다.

이스라엘 출입국 사실이 있는 여권은  아랍 다른 나라에 입국이 안된다고 한다..(이집트와 요르단 제외)

 
 
  국경을 통과하여  네게브 사막을 지나 세시간 걸려 도착한곳이 사해 남단에 위치한 라마다 호텔이었다.   이집트와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마치 30여년  차이가 있는것 처럼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버스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첫번째 맞이한 것이  마사다 요새 이다.
 
  마사다요새는  헤롯왕이  산정상에 요새처럼 구축을 해놓은 또다른  궁이다. 여기에 로마군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이  거점을 삼고 강열하게 저항하였던 곳이며, 마지막을 한사람씩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집단 자결의 역사를 갖고 있는곳이다.
 
 
  사해문서(死海文書)’가 발견된 쿰란 남쪽 51km 지점에 있다.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후에 로마군 주둔지로 사용되었으나, 66∼73년 제1차 유다전쟁의 최종기에 E.벤 야이르가 거느린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이 이 요새를 거점으로 로마군에 저항하면서 민족적 항쟁을 계속하였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도 저항을 계속하다가 로마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전원 집단자살하였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롯왕의 부성(浮城)·행정청사(行政廳舍)·욕장·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2006년2월중에
                                                                                      -panghyosung
 
                                                  출처 블로그 > 고호님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panghyosung/80022945366

 

 

 

마사다[Masada] 요새

 

 

                                                                                         2005.01.15

 

 

 

 

 

 

 

 

 

 로마식 목욕탕이였던 곳을 보러 가는중~

 
 
   출처 블로그 > Life is a journey
                                       원본 http://blog.naver.com/mashalllll/120022267288  

 

 

           

 

 

                       마사다 - 항복보다 집단자살을 택한 유태인들


 

 

 ...마사다의 이야기는 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의심스러운 이야기로 간주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 유태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것이고, 또 요세푸스는 그 싸움터 가까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3년에 발굴사상 가장 어려운 발굴작업에 의해 마사다 요새의 증거가 발굴되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 권위자인 이가엘 야딘교수의 지휘 아래 전세계에서 모여든 5,000명의 자원자들이 발굴작업에 착수했다.

 

마사다는 사해 근처 유태평원에 있는, 정상이 평평한 바위산이다.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약 30년 전에 유태왕인 헤롯 대왕이 이곳에 성을 지어 요새화했다. 항상 반역을 두려워한 헤롯은 상 정상 주위에 높은 성벽과 탑을 쌓고 10개의 거대한 저수장을 팠다. 이 저수장 하나가 2900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

 

헤롯왕은 암반의 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서 궁전과 유흥장을 지었다. 그곳은 안전하고도 호사스러운 은신처였다. 헤롯이 죽고 오랜 세월이 지난뒤, 유태인 열성당원들이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4년뒤 반란은 거의 진압되었으나, 마사다 요새만이 버티고 있었다.

 

로마의 유태 집정관 실비우스 팔라비우스가 서기 72년 무서운 로마 제 10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를 향해 진군해 왔다. 그는 73년 초까지 그 성채를 봉쇄하는 벽을 건조하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무도 로마의 복수를 피할 수 없게 했다. 그런 다음 그는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접근이 가능한 유일한 곳은 서쪽 측면의 돌출부였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향해 30미터 높이의 거대한 경사로를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봄까지는 완성되었으며, 그곳과 정상 돌출부를 거대한 다리로 연결했다. 이제 마사다의 운명은 시간문제였다.

 

1900년이 지난 뒤에,  발굴자들은 열성당원들의 절망적인 최후의 날의 증거를 발견했다. 불타지 않은 식품 창고와 식량 배급표처럼 사용되었던 청동 주화 더미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발굴자들은 연기에 그을린 작은 방의 바닥 밑에서 조심스럽게 숨겨둔 14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했는데, 이 두루마리들이 모두 기원후 73년 이전의 것임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감정할 수 있었다. 그 두루마리들에는 신명기, 에스겔서, 시편 등 성서와 일부 외경의 발췌가 적혀 있었다. 한 가죽 조각에는 사해 두루마리의 글과 비슷한 글이 적혀 있었다.

 

  로마군의 예상 공격 방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인 장소에서는 지휘관의 갑옷이 발견되었다. 그 옆에는 11개의 토기 조각이 놓여 있었는데, 조각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 조각에는 벤 야이르의 이름이 있었다.

 

  10개의 제비 외에 영웅적인 지도자인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의 11번째 제비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가 최후까지 살아남았다가 자신의 칼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비범한 인물인 그는 자기가 추종자들에게 시킨 그 무서운 임무를 스스로 회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마사다는 이스라엘에 의해 성지로서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에 입대하는 신병들은 다음과 같은 서약을 한다.

 

  '마사다가 다시 함락되게 하지 않겠음'

 

                                                                      (세계 상식 백과)

 

                                                      출처 블로그 > 쉬어가는 페이지
                                                     원본 http://blog.naver.com/akki225/100006709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