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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다[Masada] 요새 (1)

영국신사77 2008. 8. 31. 00:29

                                  마사다 유적 [Masada]

 

   이스라엘의 사해() 해안에 있는 배 모양의 구릉()을 이용한 천연성새(天然城塞). 사해문서()’가 발견된 쿰란 남쪽 51km 지점에 있다.

 

  하스몬가()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후에 로마군 주둔지로 사용되었으나, 66∼73년 제1차 유다전쟁의 최종기에, E.벤 야이르가 거느린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이 이 요새를 거점으로 로마군에 저항하면서 민족적 항쟁을 계속하였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도 저항을 계속하다가 로마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전원 집단자살하였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 ·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롯왕의 부성() ·행정청사() ·욕장 ·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도 발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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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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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창고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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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성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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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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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룸바리움 타워(비둘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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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백과사전

 

 

 

 

                              마사다 [Masada]

 
 
  (히)orvot Meada ('마사다 유적'이라는 뜻)

  이스라엘 남동부에 있는 고대의 산상 요새.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유대인들이 로마군에게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곳이다.

 

 

  사해(死海) 남동해안 부근에 있는 거대한 메사(mesa:꼭대기는 평평하고 주위는 벼랑인 지형) 맨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배처럼 생긴 이 산은 높이가 사해 해면으로부터 434m이고, 정상의 면적은 7만㎡ 가량 된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제1성전(솔로몬 성전, BC 900경) 때부터라고 하지만, 이곳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 헤롯왕(BC 37~4 재위)의 궁전과 요새들, 그리고 AD 72~73년에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한 사건 때문이다.

 

  맨 처음 이곳을 요새로 만든 사람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알렉산더 얀나이우스(BC 103~76 재위)이지만, 그후 마사다를 건설한 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헤롯이었다. 그가 남긴 건축물들 가운데는 화려한 궁전 2채(1채는 3층건물), 두터운 성곽, 약 75만ℓ나 되는 물을 저장하는 물 탱크들에 연결된 수로(水路)들이 있다.

 

  이곳은 BC 4년 헤롯이 죽은 뒤 로마군이 차지했으나, AD 66년 로마의 지배를 완강히 반대하던 유대교 분파 '열심당'(Zealots:혁명당이라고도 함)이 기습공격으로 점거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도 무너진(AD 70) 뒤, 팔레스타인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대인 자치집단인 마사다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하여, 로마군 제10군단(일명 Fretensis)에게 포위당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1,000명도 채 못되는 수비대는 1만 5,000명이 넘는 로마군을 맞아 거의 2년을 버텼으나, 로마군은 요새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만들어, 마침내 수비대의 나무방벽들을 불태우고 요새를 함락했다.

 

  '열심당원'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요새에 들어간 로마 군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수비대원들이 이미 자살해버린 사실을 발견하고(AD 73. 4. 15), 수로에 숨어 살아남은 부녀자와 어린이 7명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이다.

 

  마사다는 2세기에 유대인들이 잠시 탈환한 일이 있고, 5~6세기에는 비잔틴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그뒤 십자군들이 잠시 차지한 시기를 제외하면, 20세기까지 방치되어 아랍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앗사바'(저주받은 곳)라고 했다.

 

  1955~56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지 전체를 조사했고, 1963~65년에는 이가엘 야딘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정상 전지역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였다. 이 작업으로 말미암아 그때까지 마사다 역사에 관한 유일한 세부자료였던 로마-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들이 아주 정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왕궁, 창고, 방어 시설물, 로마군 막사, 공격 시설물 등 그가 묘사해놓은 내용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곳에서 발굴한 회당과 의식용(儀式用) 목욕통은 팔레스타인에서 이제까지 발견된 가장 초기의 건조물이다. 많은 관심을 끈 발굴물들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 사람 이름이 새겨진 질그릇 조각들로, 마지막 남은 수비대원들이 먼저 죽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 마련한 제비뽑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에 마사다는 유대민족의 용기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스라엘 청년단체들은 이 가파른 산을 오르는 연례행사를 갖는다.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에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되어, 이스라엘 국내 항공사 아르키아가 마사다에서 가까운 사해평원의 작은 공항까지 정기운항을 한다.

 

                                                                                                   출처:엠파스 백과사전

 

 

 

  * 오래전의 슬픈 역사가 있는 곳이라지만, 마사다에서 바라보는 사해와 주위는 참 아름답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는 또한 한폭의 그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부터의 많은 투어들이 새벽부터 시작해 마사다에 올라 해돋이를 봅니다. 그리고 사해에서 수영을 하고 국립공원인 에인게디를 둘러 보고, 또 혼자선 가기 힘든 여러 곳을 데려다 주죠. 저는 이 투어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1일 투어로 예루살렘의 모든 숙소에서 접수를 받습니다.

  마사다엔 케이블카도 설치되어 있는 데, 왕복 56세켈, 편도 41세켈입니다. 입장료 20세켈 포함. (1달러 = 약 4세켈) 물론 해돋이 보러 갈 땐 케이블 카 운행시간이 아니니, 걸어서 올라 가야 합니다. 1시간 정도 걸린 걸로 기억이 되는데요. 새벽 등반하는 기분이 참 좋다는 걸 아실 겁니다.

 

 

 

 

                           이스라엘 비극의 요새 마사다

 

                                                                                                                                  ascallas (2002-10-20 00:05)

 

사해 근처의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지워지지 않는 자유와 존엄의 상징입니다. 마사다의 높이는 해발 40미터밖에 안 되지만, 그 아래 펼쳐진 사해가 해수면보다 400미터 낮기 때문에 현장에서 보이는 요새의 높이는 440미터 정도. 아주 가파르고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요새라더군요. 그리고 헤롯왕이 마사다는 여름별장으로 개축하기도 해서 로마풍의 화려한 궁전이 지어져 있답니다.

  마사다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뒤 유대인들은 마사다에 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였습니다. 마사다를 포위한 것은 로마의 10군단, 그들은 성벽 주변에 8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노예를 동원하여 인공능선을 만들어 치밀하게 공성전을 폈습니다.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채 식량도 물도 다 떨어져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3년을 용케 버텼지만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최후의 날 하루 전날, 도와줄 이도 없고 탈출할 방법도 없게 된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마지막 연설을 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읍시다!"

  몇몇 마음 약한 사람들은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없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소. 다마스쿠스에서는 18,000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이집트에서는 6만 명이 살해되었소.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습니다.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성을 불질러 로마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마시오. 그러나 식량창고 한두 군데는 남깁시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 됩니다. 자, 다들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구하시오."

  이렇게 결의한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차례로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는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습니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성에다 불을 지른 후 자결하였습니다.

  다음날, 성에 진격한 로마군은 타다 남은 재 속에 놓여 있는 960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도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여인, 그러니까 일곱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써 마사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독일의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에 의해 마사다가 발굴되었을 당시 요새 내부에는 그때까지도 목이 잘린 시체와 여자의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각군 사관학교 생도들은 임관 전에 반드시 마사다를 찾아와서, 그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킨다고 합니다.

 

 

 

 

                                                                                        fight200 (2002-10-19 21:46 작성)

이스라엘의 사해(死海) 해안에 있는 배 모양의 구릉(丘陵)을 이용한 천연성새(天然城塞).

소재지 : 이스라엘의 사해(死海) 해안
시대 : BC 35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사해문서(死海文書)’가 발견된 쿰란 남쪽 51km 지점에 있다.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로데 대왕이 개축하였다. 후에 로마군 주둔지로 사용되었으나, 66∼73년 제1차 유다전쟁의 최종기에 E.벤 야이르가 거느린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이 이 요새를 거점으로 로마군에 저항하면서 민족적 항쟁을 계속하였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도 저항을 계속하다가 로마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전원 집단자살하였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 ·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로데왕의 부성(浮城) ·행정청사(行政廳舍) ·욕장 ·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성서고고학] 마사다에 대한 연구"

목차 목차없음
본문요약

  다시 찾은 성지 마사다는 19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의 요새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이유로 이곳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요새푸스의 "유대 전쟁사"를 제외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유대인들이 이 마사다 사건이후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 흩어져서 살게 되면서, 그들의 기억 속에서 이곳 마사다가 서서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가 요새푸스의 너무도 주관적인 서술이 학자들이나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사료들을 조사하던 필자 역시도 그러한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아무런 발굴도 이루어지지 않고 밝히려드는 사람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던 과거의 사람들에게, 이 마사다는 아마 요새푸스의 "상상 속의 요새"로 각인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요새푸스의 기록이 진실임이 밝혀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로빈슨과 스미스에 의해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이 망원경에 의해 발견된 뒤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이곳을 찾아 그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1963년 유대의 고고학자 야딘을 통해서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가면서, 마사다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신앙의 성지로 재 탄생하게 되었다.

키워드 성지|마사다|저항|이스라엘|유대교
참고자료 노재관"신약배경"(기독교 문서선교회 1999)H. 야거스마"신약 배경사"(솔로몬 출판사 1994)요세푸스"유대전쟁사"(도서출판 달산 1991)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 문서선교회 1984)정인관"성서대백과"(기독 지혜사 1988)성서백과 대사전(성서교제간행사 1980)기독교대백과사전(기독교문사 1982)노만페린 데니스 C 덜링"새로운 신약성서개론"(한국신학연구소 1997)에두아르트 로제"신약성서 배경사"(대한기독교출판사 1984)잭피니건"신약성서의 고고학"(민음사 1996)클론 L 로저스"요세푸스"(도서출판 엠마오 2000)강석오"성서의 풍토와 역사"(종로서적 1997)헬무트 쾨스터"신약성서 배경연구"(은성 1996)F.F.브루스"신약사"(예수 문서 선교회 1983)닐 실버먼"요새푸스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1996.

출처 : 엠파스 리포트(http://report.empas.com)

 

 

 

 

                    

마사다

 
 
 
 

123.124.125.126. 평야에서 마사다에 오르는 로프웨이 : 사진 우측은 폐허에서 바라본 사해 연안의 환상적인 풍경과

오래된 성 요새 일부.

 

  마사다 = 비극의 마을 마사다는, 시계로 향해서 돌출한 천연의 테라스와 같은 바위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는 전설적인 마사다 성요새가 있던 곳으로,매년 이곳에서 행해진 젊은 이스라엘 병사들의 연습에서는 [마사다는 2번다시 함락되지 않는다]라고 노래 불려진다.

 

  여기에서 A.D. 66년에 일어난 유대인의 반란은 신전파괴와 유대인의 난산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사다의 비극은, 여러나라로 난산한 유대인들에게 민족의 긍지인 심볼이 되었다.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함락후 살아남은 애국자들은 성요새에 모여서 농성하고, 플라비오 실바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최후까지 저항했다. 포위는 3년에 이르렀지만, 로마군이 산악지대 서쪽에 거대한 계단을 설치해 성요새에 들어와 불을 지르려 했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 성 밖에는 이 대공사가 이루어졌을때, 성내에서는 인류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비극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마군 보복을 두려워하여, 또 그들의 노에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겁낸 마사다인들은, 살아서 포로가 되는 것보다 자살할 것을 선택했다.

 

  동시대의 역사가 플라비오 쥬셋페는 살아남은 한사람의 여인이 말한 마사다의 생생한 순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렇게 최후에 또한번 아내를 애무하고, 안아주고,눈물과 함께 아이들을 안아주고, 키스하면서 적의 손에 떨어졌을 때 고통을 상기해서 죽음으로 서로를 고무했지만, 결국 유일하게 사랑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마음은 일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그들의 재산을 서둘러 소각하고, 그중에서 10 사람 정도, 다른 전원을 죽이는 역할을 뽑았다. 그리고 모두 처자를 안으면서 바닥으로 쓰러졌고, 주저할  것  없이 목을 내놓았다. 이 비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10명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살해한 후, 서로 제비를 뽑아서 선택한 1사람에게 남은 9 명이 목을 내밀었다. 이 역할을 다한 최후의 한 사람은, 쓰러진 시체중에 누군가가 아직 그의 손을 필요로 하는 자가 있는가를 확인한후, 왕궁에 불을 놓아 남은 힘을 발휘해 처자쪽에서 칼을 손잡이까지 몸에 찔려 자살하고 끝낸 것이다."                                                      (플라비오 쥬셉페 유대 전기7권)

 

  이렇게 하여 유대 반란 최후의 바위는를 함락됐다. 그러나 로마군이 길을 닦아서 아직 타오르는 성내로 들어갔을 땐, 그들을 기다리고 있떤 것은 960명의 유해 뿐이었다.

  1963년-65년의 고고학 조사에서는 성요새의 2/3가 발굴되어, 우아한 모양을 한 건조물과 장식이 다시 발견되었다. 사실 마사다는 본래 헤롯 대왕이 B.C. 42년에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피해와서 성요새화한 것이었다. 왕은 이때에 야심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도되어 노예목민들에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된 궁전과, 농성으로 마련된 바위를 파서 만든 거대한 저수조를 볼 수가 있다.

 

 

 

 

 

127.128. 이 페이지 순으로 아치 멋진캅.헤로드왕의 관 일부 목욕장.
129.130.헤롯 대왕관의 테라스와 사해 근처의 폐허.

 

 

 

 

 

131.132.비극의 바위 마사다와 이것을 포위한 로마군의 숙영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133.134.로마군이 조성한 계단. 이 방법으로 비로서 마사다의 저항을 붕괴 시켰다.


 
 
 

이스라엘 마사다·사해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

 

                로마군에 항거한 유대인들의 비극이…

 

                  <84> 이스라엘 마사다·사해

                           ◇마사다 전경(왼쪽), 마사다 요새의 유적

 기원전 1세기경 이스라엘은 요동치고 있었다.

 로마제국 지배 하에서 예수가 탄생했고, 종교적으로는 전통적인 제의를 중시하고 구약성서 글자 하나하나에 집착하던 사두개파, 평신도 운동으로 율법학자들이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바리새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금욕적인 공동생활을 하던 에세네파가 있었으며, 로마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급진 과격파 열심당원(Zealot)들도 생겨났다.

 

 주로 유대교 하급 사제인 열심당원들은 폭력에 호소하는 열광적 애국자들이었는데, 로마뿐 아니라 로마에 타협적인 유대인 권력층·특권층도 공격을 했으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속에도 섞여 들었다고 한다.

 

  이런 격변기에 헤롯이 죽고 얼마 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이나,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 진정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던 유대교인들 모두, 유대 땅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의 폭군 황제 네로는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를 유대인들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탄압을 가했다. 늘 소요를 일으키고 메시아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로마로서는 항상 위험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서기 66년 이스라엘 땅에서 로마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로마군은 군대를 보내 진압하기 시작하여, 서기 70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켰다.

 

  유대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로마군이 오랫동안 성을 포위하자 기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가족의 시신을 보고도 눈물을 흘릴 여력이 없었고, 너나 할 것 없이 도둑과 강도로 돌변했으며, 심지어 자기 아이를 구워 먹는 사람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결국 개전 당시 60만명이었던 예루살렘 인구 중 3개월 동안 죽은 자가 약 11만6000명이었고, 포로가 약 9만7000명이었다.

 

  그러나 열심당원을 비롯한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은 마사다(Masada) 요새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다.

 

  마사다는 사해 옆에 우뚝 솟은 험한 요새다. 마사다는 해발 약 40m이지만, 근처 땅 자체가 해발 -400m 정도이므로, 땅에서 보면 440m나 치솟은 절벽 위에 자리잡은 하늘의 요새다.

 

  히브리어로 ‘바위의 성채’라는 뜻의 마사다는, 기원전 2세기경 하스몬 왕조 때에 처음 요새로 사용되다가, 헤롯왕이 기원전 37년에 재건했다.

◇사해 근처의 팔레스타인인들(왼쪽), 사해

  이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등산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험하다. 거대한 절벽에 구불구불 이어져 ‘뱀의 길’이라 불리는 조그만 길을 따라 1시간 동안 걸어 오르면 정상이 나온다.

 

  정상은 남북이 약 600m, 동서가 약 300m, 전체 둘레가 1300m 정도의 꽤 넓은 평원이다.

 

  헤롯은 이곳에 창고를 만들어 포도주·기름·대추야자 등을 저장해 놓았으며, 각종 프레스코화로 장식되고 목욕탕 시설이 갖춰진 멋진 궁궐을 지어 놓았다.

 

  또 중앙의 땅은 비둘기 배설물과 인분을 이용해 경작했고, 마사다의 서쪽 골짜기에는 흘러드는 빗물 저장소를 12개나 만들었다. 물이 다 모이면 약 4000만ℓ나 되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열심당원을 비롯한 유대인들 약 1000명 정도는 마사다 요새에 올라가 항전하다가, 서기 72년 로마군 약 1만명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험한 절벽길을 기어오를 수 없었던 로마군은, 7개월에 걸쳐 서쪽 계곡을 메운 후 서서히 압박해 들어간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저항군 사령관은 “이 세상에 노예가 되는 것만큼 참기 힘든 벌은 없다. 스스로 용감하게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며 집단 자결을 선언했다.

 

  병사들은 자신의 가족을 먼저 죽인 후, 제비로 뽑힌 열 명이 나머지 병사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열 명 중에서 또 제비로 뽑힌 한 명이 나머지 아홉 명을 죽인 후 마지막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두 960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후에 로마 군인들이 마사다 요새에 올라와 이 기막힌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 참상은 지하 동굴에 몸을 숨겨 살아난 두 여인과 다섯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역사에 대한 논쟁

  이 사실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전해진다. 그러나 그 진위에 대해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요세푸스는 처음에 유대편에서 전쟁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로마에 투항했다. ‘유대 전쟁사’ 저술 목적도 로마 측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설득하려는 데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극소수의 분파적 유대인과, 일부 부패한 로마인 박해자에게 전쟁의 책임을 지웠다.

 

  그렇다면 마사다 전투에서, 실제로는 로마군의 살육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요세푸스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끝까지 저항한 이들에 대해 부담감 내지는 죄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저항을 극적으로 미화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기록에 의해 마사다 투쟁은 전 이스라엘인들에게 각인되었고, 더 이상 마사다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학생,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이 마사다를 찾고 있다.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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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다 근처에는 사해가 있다.

 사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호수로 해발 -400m다. 염분 함유율이 35% 정도여서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사실은 호수지만, 고대 히브리어에 호수란 말이 없어서 바다라 불리고, 염분이 높아 몸을 뉘어도 그냥 둥둥 뜰 정도라고 했다.

 

 예전에 신문 해외토픽란에서 누워서 신문 보는 사람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사실일까?

 

 마사다 구경을 마친 후 사해로 가자마자 수영복을 입고 호수로 걸어 들어갔는데 갑자기 밑이 푹 꺼져서 당황했다.

 하지만 재빨리 몸을 누여 길게 뻗으니 신기하게도 몸이 둥둥 떴다. 고개를 약간 들어도 계속 뜨니, 베개라도 있으면 잠이라도 자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편안했다.

 

그러나 마음놓고 있다가 바람에 휩쓸려서 요르단 쪽으로 흘러가 국경 무단침입죄로 체포되는 이도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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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사해를 거쳐 마사다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약 1시간30분 소요.

 

  사해, 마사다, 쿰란, 제리코 등지를 돌아보는 투어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마사다 정상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출처 블로그 > 이지상의 여행
                               원본 http://blog.naver.com/roadjisang/30012156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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