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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10-쐐기문자의 비밀을 찾아서

영국신사77 2008. 8. 19. 23:59
성지를 찾아서 10-쐐기문자의 비밀을 찾아서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396720

 

 

<사진설명-아래>

진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하는 이야기,대홍수를 피해 방주를 만드는 이야기,이스라엘의 왕들이 관련된 전쟁 이야기 등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은 쐐기문자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의 문자로 기록된 토판문서의 해독을 통해 그 역사성이 차례로 확인됐다.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는 그리스어로 `강 사이의 지역'이라는 뜻으로 대부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인 오늘날의 이라크에 속하는 지역이다.

목공소에서 사용하는 나무못인 쐐기와 모양이 닮았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쐐기문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으로 만든 서판에 뾰족한 갈대 펜으로 글씨를 새기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자다.처음의 형태는 있는 그대로 사물모양을 그린 상형문자로 누구든지 그림을 보고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는 뜻글자였다.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림이 여러 개의 획으로 이루어진 쐐기문자로 변하면서 언어의 성격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음절문자로 발전됐다.

음절문자란 한글이나 영어와 같은 소리글자와 중국의 한문과 같은 뜻글자가 한데 어우러진 언어라고 볼 수 있다.따라서 한 글자가 여러 소리로 읽힐 수도 있고,소리없이 단순히 뜻만 나타내는 글자도 있어서 고대 언어 중 가장 복잡한 형태의 것으로 분류된다.

그리스어와 이집트어로 기록된 로제타석비 해독에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던 이집트의 상형문자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해독에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렸다.유럽인들에게 매우 생소했던 쐐기문자는 1621년 페르시아의 고도 페르세폴리스를 방문했던 이탈리아의 탐험가 델라 발레가 최초로 스케치하면서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특히 페르세폴리스 근처에는 바위 절벽에 새겨진 여러 비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세 종류의 언어로 기록돼 있었다.덴마크 출신의 여행가 니버는 1760년대 이 지역을 돌아보면서 세 종류의 언어로 된 `페르세폴리스 비문'들을 체계적으로 베끼고 탁본도 만들었다.그는 그중 첫번째 언어가 모두 42 종류의 글자들로만 기록된 일종의 알파벳과 같은 것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독일 괴팅겐의 한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던 그로테펜트는 니버의 연구결과에 관심을 갖고 그의 비문들을 해독하면서 똑같은 결론을 얻었다.수백 줄로 이루어진 장문임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글자의 종류는 42개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고,문장중에서 페르시아의 유명한 왕들인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 등을 확인했다.1802년 그로테펜트는 베를린의 왕립학술원에서 자신의 연구내용을 발표했지만,단지 그가 교사라는 이유로 그의 연구업적은 무시되고 말았다.

영국 장교로서 페르시아에 파견된 롤린슨(H.C.Rawlinson)은 1835년 베히스툰이라는 곳에 위치한 한 절벽의 비문에 관심을 가졌다.이 비문은 5백m 높이로 솟아 있는 거대한 절벽중에 밑에서부터 1백여m 올라간 지점에 높이 7m,폭 18m의 규모로 새겨져 있었다.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20~519년에 만든 이 부조에는 두 명의 신하가 뒤에서 보좌하는 가운데 왕 자신이 한 명의 엎드린 포로를 발로 밟고 손과 목이 밧줄로 묶인 아홉명의 포로들 앞에서 위용을 드러내는 장면이 조각돼 있다.그 밑으로는 쐐기문자로 모두 1천2백 줄이 넘는 기록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워낙 험한 낭떠러지여서 올라가기 힘든 곳이었지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에 접근,기록들을 베꼈다.그는 1846년에 첫번째 언어로 기록된 비문의 내용을 발표했고,이어 두번째 비문도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었다.하지만 가장 높은 곳에 새겨진 세번째 비문은 밧줄에 매달려 목숨을 걸고 탁본을 떴던 한 쿠르드 소년의 도움으로 1850년에 가서야 최종적으로 그 내용을 밝힐 수 있었다.

첫번째 언어는 고페르시아어로 모두 42 종류의 글자들을 이용하여 4백 줄이나 되는 문장을 기록한 단순화된 음절문자로 밝혀졌다.두번째 언어는 엘람어로 1백여 종류의 글자들이 사용돼 처음 비문보다는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세번째 언어는 바빌로니아 아카드어로 모두 5백여 종류의 글자들로 구성된 가장 발전된 음절문자 체계를 보여줬다.

쐐기문자의 공식적인 해독은 1857년에 가서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영국의 왕립아시아학회는 `라쌈 실린더'라고 불리는 진흙으로 만든 팔각기둥의 쐐기문자 기록사본을 유럽의 저명한 네 명의 학자들에게 보낸 후 각기 독자적으로 해독할 것을 부탁했다.영국의 탈봇트와 롤린슨,아일랜드의 힝크스,프랑스의 오페르 등은 몇달 후 자신들의 해석 결과를 제출했고 이를 비교한 주최측에서는 모든 해석작업이 정확하게 일치했음을 발표했다.2천년 이상 베일에 가려져 있던 쐐기문자의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들의 수장고에 보관된 수십만 점의 쐐기문자 기록들과 계속해서 출토되는 토판문서들의 내용은 이제 더 이상 미지의 수수께끼가 아니다.이들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성서 속의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조명되는 기회가 점차 늘어날 것이다.

/김성교수(협성대·성서고고학)


[사진 설명]

1. 그로테펜트(G.F.Grotefend:1775~1853년)

독일 튀빙엔 출신의 라틴어 교사로서 1802년 고페르시아어 부분 중에서 페르시아의 유명한 황제들이었던 다리우스와 크세르세스 등을 확인,쐐기문자 해독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2. 롤린슨(H.C.Rawlinson:1810~1895년)

영국 출신의 장교로서 25세 되던 해에 쿠르디스탄 지역에 파견된 후 베히스툰 비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15년간(1835-1850년)의 끈질긴 현장 탐사와 탁본 작업을 통해서 고페르시아어와 엘람어,바빌로니아 아카드어를 해독했다.따라서 그는 `쐐기문자의 아버지'로 불린다.


3. 베히스툰(Behistun) 비문

바그다드에서 테헤란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베히스툰에는 높이가 5백m나 되는 거대한 절벽에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부조로 조각돼 있고,그 밑에는 1천 줄이 넘는 쐐기문자 기록이 새겨져 있다.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승전기념비로 같은 내용이 고페르시아어와 엘람어,바빌로니아 아카드어 등의 세 언어로 기록됐다.


4. 라쌈(Rassam) 실린더

1853년 라쌈이 고대 앗시리아제국의 수도였던 앗수르 발굴에서 수집한 팔각기둥에는 티글랏트 필레세르 1세(기원전 1114~1077년)의 업적이 아카드어로 기록돼 있다(대영 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