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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8-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

영국신사77 2008. 8. 19. 23:57

                  성지를 찾아서 8-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396351

 

 

<사진설명-아래>

  기원전 701년 봄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은 맹렬한 기세로 유다를 공격했다.이미 라기스를 함락,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었다.이런 다급한 상황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역대하 32장2~3절),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 유다의 공병대가 바위굴을 파기 시작했다.적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밖의 수원지인 기혼샘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곳에서부터 지하 터널을 파서 성 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대규모 터널공사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뚫는 것으로 시작했다.두 사람이 한꺼번에 작업하기도 힘든 폭 60㎝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횃불의 그을음과 사방으로 튀는 돌가루를 뒤집어 쓴 채 청동제 도끼로 바위를 쪼는 굴착작업은 예루살렘을 향해 치닫고 있는 앗시리아 군대의 진격속도와 겨루는 또다른 전쟁이었다.

  1838년 미국의 성서 지리학자 로빈슨은, 기혼샘에서부터 좁은 터널을 따라 실로암까지 탐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2천5백년의 세월동안 퇴적된 바닥의 진흙층 때문에, 그는 거의 기다시피하여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그로부터 약 30년 후 영국의 워렌도 `히스기야 터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사하는 데 성공했다.더욱이 그는 기혼샘 근처에서 수직으로 11m나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발견하고는, 다윗의 부하인 요압이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갔다는 `수구'(사무엘하 5장8절)로 해석하기도 했다.하지만 히스기야 터널의 마지막 비밀은 1880년에 비로소 밝혀졌다.

  그해 여름 어느날, 예루살렘 실로암 마을의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그 중 한 아이가 물이 흘러 나오는 지하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6m 정도 들어갔을 때, 그 아이는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벽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고,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콘더(C.R.Conder)와 세이스(A.H.Sayce),독일의 구테(H.Guthe) 등 고고학자들은 모두 경쟁적으로 이 비문 해독에 매달렸다.탁본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메사 석비'와 비교해 볼 때, 언제든지 현장에서 비문을 확인할 수 있었고,고대 히브리어 비문이 예루살렘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여섯 줄로 2백자가 기록된 실로암 비문은, 마치 오늘날의 신문기사처럼 지하 터널 개통 당시의 분위기를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3 규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백25m)을 흘러나왔다."
 
  히스기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난공사였다.길이 5백25m인 지하 터널의 기울기는 0.06%,즉 양쪽의 고저 차이가 고작 32㎝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기혼샘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직선거리로 3백15m이다.그런데 왜 적이 쳐들어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당시 유다인들은 구불구불하게 5백25m나 되는 긴 터널을 팠을까.지금까지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그중에 가장 타당한 설명이, 바로 터널의 지상 부분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1978년부터 다윗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도할 때, 지질학자인 단 길(Dan Gill)은 정밀 조사 끝에 이 터널지역이, 원래 4만년 전부터 형성된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음을 밝혀냈다.즉, 히스기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팠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간 것이다.그래서 당연히 양쪽이 도중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쿠데타 소문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고,이사야의 예언(이사야 37장7절)대로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어떤 학자들은 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만 성을 포위하던 당시 전술에 비추어볼 때, 히스기야 터널 때문에 예루살렘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성서고고학사에 있어서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의 발견은, 성서학 고고학 비문학 앗시리아학 지질학 수리학 토목공학 등의 전문적인 지식들이 총동원된 학제간 연구의 좋은 본보기로 기록된다.

  한편 실로암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이 지난 1890년,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그리스인이, 어느날 밤 아무도 몰래 혼자 연장을 갖고 히스기야 터널로 들어가 이 비문을 떼어냈다.이 과정에서 비문의 작은 조각들이 바닥의 물 속으로 사라졌다.이 도굴꾼은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점에 비문 조각들을 팔아 넘겼고,소문을 접한 오스만 터키 당국은 이 유물을 압수했다.스위스 출신으로 당시 예루살렘에서 탐사와 발굴활동을 하던 콘라드 시크(Conrad Schick)는 곧바로 이 비문의 모형을 완성했지만,비문 자체는 이스탄불의 제국박물관으로 운송됐다.지난 1996년 다윗에 의한 `예루살렘 정도 3천주년'을 맞아 실로암 비문의 이스라엘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기 시작했다.기원전 701년 기록된 구약 시대의 고대 히브리어 기록 중 가장 긴 문장인 실로암 비문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김성 교수(협성대 성서고고학)


[사진 설명]

1. 히스기야 터널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지인 기혼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5백25m에 달하는 지하 터널은 앗시리아의 포위에 대비한 최대 방위사업이었다.터널의 기울기가 0.06%로 양쪽의 고도 차이가 32㎝밖에 되지 않는 정밀한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2. 기혼샘

에덴에서부터 흐르는 네 강 중의 하나가 기혼인데 아마도 예루살렘의 우주적 중심성과 관계 있는 것 같다.`솟구쳐 나온다'라는 뜻을 가진 기혼샘에는 오늘날에도 차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중세에 건설된 계단 밑으로 흐르는 샘물은 이곳에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거쳐 실로암 못으로 흐른다.

3. 실로암 비문
여섯줄로 모두 2백글자 중에서 1백77자만 보존된 이 비문은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중간에서 만나 지하터널의 역사적 개통을 자축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돼 있다.`3 규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백25m)을 흘러나왔다'(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