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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Roma)

영국신사77 2008. 8. 8. 12:49
                                           로    마 (Roma)
 
 약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는 테베레 강의 하류에 위치하는 이탈리아의 수도로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우며, 로마시대에는 일찍이 고대 세계의 중심지였고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통해서 긴 시간동안 유럽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로마'는 한마디의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소유한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는 옛 유적을 그대로 보전한 채 현대문명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소매치기와 좀도둑으로 악명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매년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 성베드로 대성당 (San Pietro Basilica)은 바티칸 참조

                            ■ 성 바오로 성당 (San Paolo Fuori le Mura)

  성바오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둘째로 큰 성당이다. 성 베드로와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운 사도 성 바오로의 몸과 정신은 이 성당의 높은 제대 아래 잠들고 있다.
 성 바오로의 무덤 위에는 교황들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중앙제대가 있으며, 그 위로는 고딕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르놀프 캄피오의 천개가 아름답게 장치되어 있다.
 이 성당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말씀을 새긴 10개의 나무판이 있다. 많은 선지자와 예수의 일생, 그리스도 말씀을 새긴 545개의 나무판은 비잔티움 예술의 최고로 알려져 있다.

 이 대성당을 관리하는 베네딕도 수도원 이층에는 고대 콘스탄티노 대성당에서 찾아낸 비석과 글씨들, 그리고 42명의 교황을 원형 프레스코로 만든 것이 있다. 성 베드로에서부터 42명에 이르는 교황 프레스코는 대성당이 불타기 전에는 내부에 장식돼 있던 것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가 처형당한 직후 그의 시신은 당시 열성적인 신자였고 사도를 따르던 루치나 부인 가문의 소유지에 묻혔다고 한다. 그 후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함께 비밀리에 관리해 오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끝낸 후 두 사도의 무덤 위에 기념 대성당을 지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기념 성당은 당시 교황이었던 성 실베스테르 1세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제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념 대성당을 세우고 축성하던 날인 324년 11월 18일, 이곳 사도 바오로의 무덤 위에도 콘스탄티누스 기념 대성당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역시 기념 성당을 세워 같은 날 동시에 교황의 축성을 받았다고 한다.

 성 바오로 성당은 1823년 대 화재로 말미암아 대성당 건물은 물론이고, 내부에 그려져 있던 벽화를 비롯하여 모자이크 등 역사적인 보물은 거의 다 손실되었거나 파괴되었다. 비오 7세의 후임 교황인 레오 12세는 즉위하자 곧 바오로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전 세계 교회에 특별 요청을 하였다.
 정면은 거대한 기둥으로 장식되었으며, 필립포 아그리콜라의 모자이크를 장식하였다. 정문 입구 양옆에는 기둥을 파서 만든 벽감이 있으며, 그레고리오 차팔라가 제작한 베드로와 바오로 상이 각기 안치되어 있다.
 1931년에는 안토니오 마라이니가 조각한 청동문이 세워졌으며, 그 문에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생애에 대한 내용이 부조되어 있다. 성문은 그 오른쪽에 있다. 성 바오로 사도의 무덤위에 있는 교황제대 위의 천개 장식은 13세기의 작품이며, 화재 때에도 손상되지 않은 승리의 아치는 5세기 고트 왕후 갈라 플라이디아가 기증한 것이다. 유리 대신 사용한 대리석은 에집트의 부왕 모하멧 알리가 기증한 것이고, 맨 끝에 있는 제대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기증한 것이며, 뒷면의 모자이크도 화재를 면한 13세기의 작품이다.
 천장은 회벽토와 화려한 대리석 장식으로 꾸며졌으며, 모든 기둥위에는 베드로에서 바오로 6세에 이르는 교황의 초상이 있다. 원래 대성당의 설계도대로 복원하였고, 1854년에 교황 비오 9세가 축성하였다.
 원래의 대성당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전과 똑같이 건축된 것으로 길이는 132미터, 폭 30미터로서, 로마에서는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규모가 크며, 전 세계 10대 대성당 중의 하나 이다.

         ■ 라떼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 (Basilica San Giovanni in Laterano)

  로마의 4대 성당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929년 라테란 궁에서 바티칸이 한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된 유명한 라테란 조약이 서명된 곳이며 현재 이 건물은 로마 대주교의 주교좌로 사용되고 있다.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 되는 성당. 로마의 4대 성당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성당보다 격이 높고, 치외법권이 인정되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성당은 콘스탄티노 황제가 희사한 땅으로 밀찌아레 교황(311-314)이 세운 것이라 한다. 성당을 짓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콘스탄티노 황제의 둘째 부인이며 마쎈지오의 누이동생인 파우스타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마쎈지오의 막강한 힘으로 세워진 이 성당은 중앙부가 이중의 기둥으로 만들어져 구세주 그리스도, 세례자 요한, 선각자이며 제 4복음서를 쓴 사도 요한에게 봉헌되었다.

중앙 교황 제대의 천개 양식은 15세기의 고딕 양식이다. 여기에는 성 바오로과 베드로의 머리 및 카타콤바에서 가져온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교황 마르띠노 5세의 무덤을 이 제대 앞에 둔 것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묶여 채찍질당하시던 기둥을 옮겨온 공적 때문이라고 한다. 제대 왼쪽에 성체를 모시는 경당이 있었는데, 그곳에 예수께서 최후만찬에서 사용한 식탁이 보존되어 있어, 성 목요일에 교황이 집전하는 만찬 미사는 이곳에서 봉헌된다. 대성당의 내부는 오랜 세기를 두고 보수해 왔는데, 지금의 내부는 보로미니가 1650년에 이룩한 것이다. 중앙 통로 양쪽의 기둥 사이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 사도들의 석상이 있고 성서의 사건들을 다룬 석주의 장식은 보로미니의 작품이다. 중앙의 교황 제대 뒤에는 로마 주교좌가 있고, 주교좌 위에 있는 모자이크는 13세기 투리티의 작품이다.

요한 대성당은 1304년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이 옮겨갈 때까지 1천년 동안 교황청으로 사용되었으므로 '교황의 성당' 이라고 불리며, 성당에 부속되어 있는 라테라노 궁전은 1843년 교황 비오 11 세에 의해 예술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의 라테라노 조약도 이 궁전에서 체결되었다.

                  ■ 성모 마리아 대성당 (성모 설지전, Santa Maria Maggiore)

콘스타니누스 황제 때인 352년 에스퀼리노 언덕 위에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 세워졌으며, 유럽 가톨릭 교회 사상 최초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으로 처음에는 ‘성모설지전’이라고 하였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라테라노 성 요한 대성당,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바로오 대성당과 함께 로마의 4대 대주교좌 성당 중의 하나이다. 성당은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로마의 성당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성당이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라고 한다. 이 성당의 중앙제대 오른쪽 바닥에는 로마의 위대한 예술가 베르니니의 검소한 대리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5세기에는 교황 식스또 3세가 성당을 확장, 개축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때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이 건축되었다. 건물은 중앙의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20개의 이오니아 식 열주(列柱)로 좌우 측랑(側廊)이 나뉘어진 전형적인 성당이다. 성당의 내부는 신랑의 양벽, 위, 승리의 아치 위, 넓은 후진, 정면의 안쪽이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 되었다. 이 중의 승리의 아치 위에 있는 것과 신랑 벽 위에 있는 것은 5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이들 모자이크는 성서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으로 이 성당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 성 계단 성당 (Scala Santa)

  성 계단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명령을 받고 돌아가시던 날 몇 번씩이나 모욕과 고통을 받으며 오르내리셨다는 전설이 담긴 스칼라 산타(거룩한 계단)라는 28층계로 된 대리석 계단을 보관하기 위해 4세기에 세워졌다.
  28개 계단은 예수가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수난을 받을 때 밟았던 계단들로서 성녀 헬레나가 로마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계단은 무릎을 끓고 오르는 것으로 예수의 수난에 깊은 존경을 바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이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다가 ,정상까지 도달하지 않고 중도에서 일어나 걸어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의 지도층에게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첫신호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스칼라 산타(거룩한 계단)'로 알려진 예수님 고난의 성당은 역사적, 예술적, 종교적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원래의 건물은 127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교황 니꼴 라오 3세는 코스마티가(家)의 장인들로 하여금 복구하게 하였다. 이때 건물의 원형이 상당히 변형되었으므로 원래의 모습을 접할 수는 없다. 이 작업을 맡은 도메니코 폰타나는 계단을 쌓을 대 찬송과 기도에 맞추어 쌓았는데, 작업 인부에 의해 층계가 다치지 않도록 하려고 위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무릎만 닿게 하였다고 한다.

         ■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성당 (Basilica di Santa Croce in Gerusalemme)

 헬레나 성녀가 겟세마니 동산의 흙을 옮겨다가 지은 성당으로, 그녀가 이스라엘 성지 순례시 발견한 예수님의 유품과 가시관, 나무조각, 처형당하실 때 쓰였던 못, 도마의 손가락 등이 보관되어 있다. 헬레나 성녀를 기념하기 위해 헬레나 성녀 대리석 석상도 있다.

                                           ■ 세 분수 수도원 성당

  현 작은 자매수녀회 수녀원 자리에서 바오로 사도가 순교했다. 이 성당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하기 전 갇혀있던 감옥이 있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할 때 머리가 세 번이나 튕겨졌다 하여 그곳을 보관하고, 여기에 세 분수 수도원 성당을 세웠다. 또한 이곳은 그리스도교도 1만 여명이 참수당한 곳이었는데, 베르나르도 성인은 그들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 한다. 이를 기념하는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쇠사슬에 묶인 성베드로성당

콜로세움 건너편 언덕에 있는 성당으로, 성베드로가 로마의 마메르틴 감옥소에서 감금됐을 때와 예루살렘에 감금 되었을 때 사용되었던 두 쇠사슬이 서로 닿자마자 달라붙어 하나가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쇠사슬 오늘날에도 이 성당의 중앙제대 밑에 보관되어 있다.제대 바로 앞에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이 있는데 십계명을 받은 모세가 머리에 뿔이 난 모습을 하고 있다.

                   ■ 아삐아 가도, 도미네 쿼바디스 성당(Domine Quo Vadis)

기원전 3세기에 이룩된 이 길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한 말을 낳게 한 길이다. 성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아삐아 가도를 따라 도망 가던 중 그리스도의 환상을 만나 놀래며 다급하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도미네 쿼바디스” 하였다. 베드로의 질문에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러 간다 (venio iterum Crucifigi)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에 베드로는 잘못을 깨닫고 로마로 발길을 돌려 순교를 당했다. 바로 이 자리에 세워진 쿼바디스 성당에는 그리스도의 발자국이 찍혀 있어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유발 시키고 있다.

                                     ■ 카타콤바 (Catacombe)

안식처"흙구덩이 란 뜻을 가지고 있는 카타콤베는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는 모든 지하 묘지를 카타콤베라고 부르게 되었다.
카타콤베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랑을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있다. 구 아피아 가도 부근에는 대소 25개의 카타콤베가 있고 지하통로의 길이를 합치면 500Km나 된다고 한다. 이 중 특히 중요한 곳은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로서 5층으로 되어 있고, 지하통로의 길이는 20Km이다. 이 곳에는 3세기의 교황님들의 유골이 모두 모셔져 있고, 음악의 수호성자 성 세실리아의 묘도 있다.

'휴식처' 라는 뜻의 그리스어 '케에메트리아' 에 해당하는 카타콤베는 처음에는 가족 공동묘지였으나, 고대 로마에서는 일반적인 지하묘지를 카타콤베라고 했다. 로마인들은 일반적으로 화장을 했지만 그리스도 교도들은 묘를 만들었다. 로마 초기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 교도들이 묘지에 숨어 집회와 의식을 행했으므로, 이후 그리스도 교도의 성당이나 묘지를 카타콤베라 일컫게 되었다. 카타콤베는 너비가 1m, 높이 2-3m의 통로 벽에 직사각형 또는 윗 부분이 반원형인 벽감을 파서, 유해를 넣고, 연와 또는 대리석판으로 덮은 다음 석회로 밀폐하였다. 그곳에는 사망자의 이름, 연령, 사망일 등이 새겨지며, 때로는 상징적인 그림과 축복의 말이 새겨진다. 이 곳의 2층 3층으로 파 내려간 지하통로는 복잡한 미로가 되어 혼자서 다니기가 무척 어려우나 순교자와 성인이 수없이 묻혀 있어, 그리스도 교도들의 순례지로 찾는 이들이 많다.

                                                   ■ 콜로세움 (Coloseo)

원래 원형경기장으로 알려졌다. 75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3층으로 건설한 로마의 상징적인 구조물이며, 티누스 황제가 4층으로 높였다. 80,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잔혹한 무사와 맹수의 전투 경기가 벌어졌었다. 중세시대에는 원형경기장이 요새로 사용하다가 대리석등을 뜯어 베네치아 궁 등의 석회장식에 이용하였다. 그리스도교 박해시대에는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로마 광장'이라는 뜻의 포로 로마노는 콜로세움과 함께 로마 관광의 중심지다. 이곳은 고대 로마의 정치, 사법, 상업, 종교의 중심지로 케사르,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가 국사를 의논하며 거닐었던 곳이다. 현재는 몇 개의 개선문 외에는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폐허가 되었지만, 규모는 무척 크다. 대략 3만 평방 미터의 면적을 몇 개의 신전, 성당, 개선문, 원로원 등이 차지하고 있고, 세베루스의 개선문과 티투스의 개선문 이 남아 있으며, 20세기에 복원된 원로원이 있다.

                                   ■ 진실의 입 (Bocca della Verita)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 남쪽의 중세 교회 -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을 관광명소로 만든 대리석 부조물. 이 교회 입구 왼편 포티코 벽에 있는 이 '진실의 입'은 BC 4세기에 바다의 신 트리톤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거짓말 한 자가 손을 이 입 속에 집어넣으면 입이 닫혀 손목이 잘려 버린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로마의 수많은 분수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분수. 트레비라는 이름은 트리비오 Trivio(삼거리)에서 유래한다. 분수가 있는 작은 광장에서 길이 세 방향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분수 뒤에 있는 건물은 '폴리 후작의 궁전' 인데, 건물 정면의 장식이 이 분수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고 있다.
 넵튠상 주위의 바위 사이에서 끊임 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이 되어 있는데, 이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