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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 모압/디반/랍바/모압 석비

영국신사77 2008. 8. 8. 09:29
                                  요르단 : 모압/디반/랍바/모압 석비
 
                               ■ 모압 산지

  모압 산지는 북쪽의 아르논 골짜기에서 남쪽의 세렛 골짜기 사이에 펼쳐진 고원 평야 지대를 일컫는 말로써, 룻기의 배경이 되는 모압의 들녘을 말한다. 해발 고도가 1,000m가 넘는 이 지역은 비옥한 토양과 풍성한 물공급으로 비교적 풍요로움을 느낄수 있는 평야 지대이다.  

                              ■ 모압 평지

 여리고의 맞은편, 요단강 동편 지역을 일컬어 성경은 종종 모압 평지라 부른다. 이 지역의 중요한 성읍들은 언덕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방어하기에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경에는 언덕의 저지에서 평원으로 성읍들이 옮겨졌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이 평지에 성읍들이 성장하였고 이전의 이름들이 점차적으로 변화되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진을 쳤던 곳이다.
                                                                           관련 성경 : 민 33:48-49, 신 34:8

                               ■ 디반(Dhiban) : 디본(Dhibon), 디본 갓

 암만에서 약 65㎞ 떨어져 있는 디반은 본래 모압 족속의 기업이었으나, 모세의 정복 당시에는 아모리족의 시혼왕이 이곳의 주인이었고, 모세의 정복 이후에는 갓 지파에게 분배되었던 곳이다. 이 지역을 두고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 종종 전쟁이 있었다. (삿3:12, 삼하8:2, 왕하3:4-6)

 왕국 시대에는 모압의 왕 메사의 고대 수도가 있었던  성경의 '디본' 으로,  한때 모압 왕국의 중심도시로서 번성하였다. 특별히 모압의 메사왕 때에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기원전 580년경 바벨론 제국이 이곳을 점령하기까지 거의 250여년 동안 모압은 디본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다. 느헤미야 때에는 유대의 자손들이 산 곳 (느 11:25)으로 성경에  언급되는 이곳은 현재 작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의 발굴 작업은 1950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발굴 결과  이 지역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에 문명이 형성되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후에도 나바테, 로마, 비잔틴, 아랍 시대에도 도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나바테 시대의 회당이 발굴되었고, 1868년에는  여호람과  여호사밧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던 동시대에 디본에서  모압을 다스리던 '메사(Mesha)왕 (왕하 3:4)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은 현재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관련 성경 : 민 21:30, 민 32:3, 민 32:34, 민 33:45-46, 수 13:9, 수 13:17, 느 11:25, 사 15:2, 렘 48:18, 렘 48:22, 왕하 3:4, 왕하 3:5, 왕하3:6, 왕하 3:7  

                               ■ 아르 랍바(Ar Rabbath) : 랍바 (Rabbah)

 간단히 '아르' 라고도 불리는 이곳에는 자그마한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 작은 도시는 성경의 '랍바' 이다.  '아르' 는 모압의 모든 '성읍' 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모압 북쪽 국경 지대에 위치한 성읍을 가리킨다. (민 21:28, 신 2:18)
 앗시리아의 앗수르바니팔이 모압을 공격했을 때 모압의 656 성읍들이 파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시대 때는 아레오폴리스(Areopolis)로 알려졌으며, 알렉산더 얀네우스에게 점령당한 뒤, 후에 힐카누스 2세에게 빼앗겼다.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이 주교좌가 되기도 하였으나, 2세기 이후에 이곳의 중요성은 점차 사라지고 오늘날의 작은 마을로 자리잡았다. 아랍화 된 이후 14세기경의 기록에는 이곳을 순례 길의 주요 교통로로 적고 있다. 로마시대와 비잔틴시대의 기둥들과 신전등 건물 유적이 남아 있다.  
관련 성경 : 민 21:15, 민 21:28, 신 2:9, 신 2:24, 신 2:29, 신 3:11, 수 13:25, 삼하 11:1, 삼하 12:26-29, 삼하 17:27, 렘 49:2-3, 겔 21:20, 겔 25:5, 암 1:14  

                                                ■ 모압 석비

                                         ▶ 모압 석비의 발견 과정
 1868년 여름, 독일인 의료선교사 클라인(F A Klein)은 사해 동편지역을 여행하던 중 '디본'을 지나게 되었다. 디본에서 그는 고대 석비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아랍인의 안내를 받아 그 석비를 보게 되었다. 선교사 클라인은 성경 고고학 자료 중 매우 가치 있는 것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석비를 직접 보았던 최초의 서구인자, 깨어지지 않은 온전한 상태의 석비를 본 유일한 서구인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주재하고 있던 독일 영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 소식은 곧 독일로 전달되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중동 지역의 역사적 유물을 수집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까닭에, 독일이 석비 구입에 큰 관심을 보이자, 디본의 주민들은 엄청난 값을 요구했다. 오랜 흥정 끝에 값이 결정되어 막상 석비를 이동하려고 했을 때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디본 주변지역 아랍인들이 자기 마을로 석비가 지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은 것이다. 난관에 봉착한 독일측은 일단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바로 그때 예루살렘에는 프랑스 영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청년 클레르몽 갸노(Clermont - Ganneau)라는 프랑스인이 있었는데, 그는 고대어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디본에서 발견된 석비 소식을 듣고 아랍인 친구를 그곳에 보내어 석비의 탁본을 만들었다. 한편 독일 영사는 석비 운반이 어렵게 되자, 그 지역을 관할하던 오토만 터키 총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총독은 군대를 동원해 석비를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디본의 아랍인 주민들은 석비의 가치를 알지 못해 단순히 돈벌이 감으로만 생각했다. 그들은 돈벌이가 될 석비를 총독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기로 했다. 그들은 석비를 장작불 위에 올려놓고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달궈진 석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게 해서 소중한 고고학 자료가 되는 석비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석비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 측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인 클레르몽 갸노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구입해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57개의 조각들을 모으는데 성공, 이것들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겼다. 그가 모은 조각은 전체의 약 3분의2 분량이다. 나머지는 찾지 못해 영원히 미궁 속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이 석비가 파괴되기 직전 탁본을 뜬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프랑스는 57개의 조각을 맞춘 다음 탁본을 근거로 나머지 부분을 복원했다. 지금 이 석비는 루브르 박물관이 귀중하게 소장하고 있으며, 요르단의 몇몇 박물관에 그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모압 지역의 중심도시 디본에서 발견된 석비는 '모압 석비(Moabite Stone)' 라고 부른다. 또 석비의 내용이 모압의 왕 메사의 전승 업적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메사 왕 석비(Mesha Stele)' 라고도 부른다. 이 석비는 기원전 840년경에 만든 것으로, 높이 115cm, 폭이 68cm의 검은 현무암에 34줄로 고대 히브리 문자(Paleo-Hebrew) 1천자를 새겨 놓았다. 이 석비가 발견된 후, 오늘까지 1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역에서 발견된 구약시대의 문자기록으로서는 최장이어서 고대언어와 문자 연구에 더없이 소중한 자료다.

 석비의 주요 내용은 기원전 853-830년경 모압의 메사 왕이 당시 모압을 지배했던 북이스라엘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모압의 메사 왕과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에 관하여는 구약성경 열왕기 하권 3장에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메사 석비와 구약의 기록은 같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모두 일치하지는 않는다. 모압 석비는 구약의 기록을 보충-보완해 주는 자료로, 이스라엘 역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다.  

                     ▶ 메사 비문(모압 비문)
  나는 그모스의 아들, 모압의 왕, 디본 사람 메사이다. 내 아버지는 30년 이상 모압을 치리 하였으며, 나는 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나는 카르호에 그모스를 위한 산당을 마련하였다. 내가 이 성소를 세운 것은 그모스가 나를 모든 왕들에게서 구원해주고, 또 나로 하여금 그들을 이기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모스가 그의 땅에 대해 진노를 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모압을 오랬동안 지배하였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었으며, 그도 역시 "내가 모압을 지배하리라"장담하였다. 나의 임기 중에 그가 그처럼 호언했으나 나는 그와 그의 집안을 무찔렀으며, 이스라엘은 영원히 멸망하였다. 전에는 오므리가 마다바(메드바) 땅을 차지하여 그와 그의 아들의 임기 절반인 40년간을 그곳에 머물렀으나, 이제는 그모스가 그 곳에 머물게 되었다.

 나는 바알 므온을 건설하여 그 곳에 저수지를 두었으며, 카르야텐도 건설하였다. 가드 사람들이 아타롯 땅에 오래 거하였는데, 아타롯은 이스라엘 왕이 자신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나는 그 성읍과 싸워 이겼으며, 그 성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모스와 모압을 위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렸다.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우두머리 우리엘을 케리요스에 있는 그모스 앞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샤론과 마카롯의 주민들을 그 성읍에 이주시켰다. 그모스는 나에게 "이스라엘이 가진 느보를 쳐셔 빼앗으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나는 야간 공격을 개시하여 새벽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싸웠다. 드디어 그 성읍을 탈취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장정 7천 명과 부녀자까지 모두 아스달 - 그모스에게 예물로 바쳤다. 나는 그곳에서 야훼의 ...을 취하여 그모스 앞에 끌고 왔다. 이스라엘의 왕은 나와 싸우는 동안 야하스 성읍을 건설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모스가 그를 내 앞에서 쫓아내 버렸다. 나는 모압의 용사 200명을 거느리고 올라가 야하스를 쳐서 그 곳을 디본 지역에 예속시켰다.

 나는 또 까로호(Qarhoh)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 성읍 성벽을 쌓았다. 성문을 닫고 탑을 쌓았다. 그리고 그 곳에 궁전을 지었다. 성읍 안에는 저수지도 만들었다. 전에는 까로호 성읍 내에 물 저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주민들에게 말하였다. "각 사람은 자기 집에 물 저장소를 만들어라." 그리고는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시켜 까로호 성읍 내에 관개수로를 팠다. 나는 아로엘(Aroer)을 건설하고, 아르논 골짜기에 큰길을 내었다. 나는 황폐된 베제르…(Bezer…)를 다시 세웠다.

 나는 모압에 예속시킨 백여 개의 성읍들을 다스렸다. 나는 ...와 마다바, 벧디블라덴(Beth-diblathen), 벧바알므온(Beth-baal -meon) 등을 세웠고, 그 땅의 가축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곳에 보냈다. 하우로넨(Hauronen)에는 … 이 살고 있었는데, 그모스가 내게 이같이 말하였다. "가서 하우로넨과 싸우라." 나는 내려가 내 임기 중에는 그모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