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國內 선교사들&부흥회

이수정;정치적 행보로 두차례 암살 위기

영국신사77 2008. 7. 30. 00:15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대탐구 한국의 성경③]

                  이수정,정치적 행보로 두차례 암살 위기

                                               2008.07.23 17:30:52


 이수정(사진)은 1885년 3월5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 기독교의 장을 열었던 초기 선교사인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튼, 메클레이와 함께 한국 선교를 놓고 토론한 역사적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성경번역에서 손을 놓게 된 것은 정치적 이유와 관련이 깊다. 루미스는 책에서 그에 대해 "무분별한 애국심과 정치적 이념으로 한국개화당에 가입하면서, 연구하는 일에나 성경번역하는 일에는 등한히 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루미스의 'Corea', 1885).

 1885년 2월 이후 이수정은 정치·외교 문제에 깊이 관여하면서 친선교사적인 망명 개화파와 정적이 됐으며, 1886년 초 김옥균 일파가 보낸 자객에 의해 두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같은 해 5월 조선정부는 일본 유학생을 소환하는 데 이로써 4년간의 일본생활은 마무리된다.

 그의 말년을 두고 크게 3가지 설이 제기된다. 첫번째는 처형설이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해온 개화당은 유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됐고 조선정부는 유화책을 펼치며 소환령을 내리게 된다. 1886년 귀국한 유학생 유형준 김한기 등은 처형됐으나 이수정은 처형자 명단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때 일본에서는 이수정도 유학생들과 함께 처형됐다는 소식이 확산되면서 도쿄에선 추모회까지 열렸다.

 두번째는 배교설이다. 이수정이 귀국을 앞두고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했다는 것으로 초기 빛나는 선교활동에 비해 종말이 대조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귀국 전 이수정이 루미스를 만나 자신의 과오를 회개했다는 사실(루미스의 편지, 1886)이 확인돼 타당치 않다는 의견이 높다.

 마지막은 병사설이다. 이수정은 귀국 즉시 처형되지 않고 오히려 고종으로부터 환대받았다는 것이다. 고종의 총애는 왕실과의 특별한 관계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민영익 등 고위직 인사와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1887년 루미스는 언더우드로부터 이수정이 처형당하지 않기 위해 서울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루미스의 편지, 1887).

 어쨌든 그의 은거가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1889년 루미스가 두번째로 한국을 방문했지만 그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일본에서 당한 암살 미수와 그에 따른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가지 설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와 한글성경 번역의 개척자 역할을 감당했던 이수정의 활약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를 믿었던 그가 '와서 조선인을 도우라'고 했던 외침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으며, 세계 선교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말해주고 있다.

                                                                                         백상현 기자

 

 

2008.07.23 17:32:09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대탐구 한국의 성경③]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언해’


 한국 기독교 초기역사에서 우리말 성경의 쌍두마차는 존 로스의 '예수셩교젼셔'(1886)와 이수정(1842?∼1887)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언해'(1885)이다. 두 성경 모두 해외에서 번역된 성경으로 조선복음화에 강력한 '병기'가 됐다.

 

 특히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언해'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갖고 들어온 성경으로, 당시 식자층 전도에 유용했던 성경으로도 유명하다.

 이수정은 조선 성리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면서 천주교와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던 개화파 지식인이다. 전직은 종5품 승문원 교검이나 홍문관 교리로 추정되나 확실치는 않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구출한 공로로 종4품을 하사받았으며, 고종의 배려로 일본유학에 오를 수 있었다. 이수정은 40세에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이 되어 1882년 9월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그는 일본의 근대적 농법을 배워 피폐한 조선 농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 농학자 쓰다센을 찾아간다.

 

 쓰다센을 만난 이수정은 기독교 진리에 대해 눈뜨게 되었고, 원래 목적했던 농학공부보다 기독교 연구에 심취하게 된다. 그리고 도일 7개월 만에 도쿄 노월정교회(현 시바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녹스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세례받은 첫 개신교 신자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이수정은 성경공부와 성경번역에 몰두하게 된다. 특히 미국 선교잡지에 실린 이수정의 이야기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다.

 미 장로교의 대표적 선교잡지 'Foreign Missionary'(1883년 9월호)에 실린 글에서 녹스 선교사는 "이 신사는 한국에 선교회가 개설되어야 한다고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수정은 1883년 12월13일 여러 미국교회 앞으로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합니다."

 

 미국 교회입장에선 이수정이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말했던 마게도냐 사람(행 16:9)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수정의 선교사 파송제의는 미국교회에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한국선교의 근거를 마련했다.

 이수정의 개종소식은 재일 선교사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이 이야기는 미국성서협회(ABS) 일본지부 총무였던 루미스의 귀에 들어간다. 루미스는 곧 이수정을 찾아가 한국선교의 지름길인 성경번역을 제안했다. 유학생 전도를 하고 있던 이수정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는 성경을 한국의 개화를 위해서 '철도나 전신, 기선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식자층을 '타깃'으로 번역=이수정은 한문 문리성경을 기본으로 일본어 성경을 참고해 마태복음부터 사도행전까지 토를 단 현토한한(懸吐漢韓) 성경인 '신약성서 마가전'(1884)을 만들었다. 이 책은 당시 조선의 식자층이 즐겨 쓰던 방식에 따라 '∼하니' '∼하고' '∼이라' '∼이며'와 같이 한문 뒤에 토를 달았다. 훗날 번역된 한글성경의 어미가 이수정의 성경과 거의 비슷해 토가 달린 성경의 시초로 역사적 의미를 더한다.

 이 성경은 1885년 선교사 입국 이후 조선에 소량 유입되다가, ABS가 조선에 성서반포 사업을 공식적으로 개시한 1887년부터 제물포와 서울을 중심으로 배포됐다. 1892년에는 5000권이 배포되었는데, 한문에 익숙한 식자층의 수요가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5년 2월에 간행된 '신약 마가젼 복음셔언해'는 만주에서 번역된 로스역 성경과 달리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했는데 중요한 일부 단어만 한문을 사용했다. 한문 옆에 한글을 달았으며, 뒤에는 토를 달았다. 예수를 '예수쓰'로, 침례를 '밥테슈마', 그리스도는 '크리슈도스'로 나타내 헬라어 음가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하나님은 '신(神)'으로 표기했다.

 이 성경은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에게 1000부 배포되었으며, 같은 해 4월5일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피선교국의 번역된 성경을 갖고 들어간 경우는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데 이때 모범사례로 꼽히는 책이 바로 이수정의 성경이다.

 이수정은 4년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감리교 요리문답서'와 '천도소원', '낭자회개' 등의 소책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영남지역 중심으로 배포=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의 여파로 강력한 교금(敎禁)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기독교서적은 반포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입국시 가져온 상당량의 성경을 은밀히 배포한 것으로 추측된다.

1884년 부산에 설치된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성경보급소와 권서들을 통해 1885년부터 2년간 부산일대와 영남지역에 상당량의 성경이 배포되었으며, 이 중 대부분이 이수정의 마가복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로스의 성경이 서울 이북지역에서 읽힌 것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로스의 '예수셩교젼셔'와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언해'가 한국교회의 기초적인 반석이 됐다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역사신학)는 "비록 신약의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당시 한문에 익숙한 조선인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이수정의 기여는 상당히 크다"고 평가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