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國內 선교사들&부흥회

★부흥의 때 철저히 희생한 선교사들-전킨의 별세

영국신사77 2008. 7. 25. 14:08

 

 

                         [부흥의 열매]

                                부흥의 때 철저히 희생한 선교사들-전킨의 별세

 

 

 

 

        남장로교 개척선교사들 시계방향 12시부터

레이놀즈, 테이트양, 테이트, 데이비스양, 전킨 

             레이놀즈 여사, 가운체 전킨 여사

 

 쉴 틈도 없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역의 현장에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불어나는 사역과 힘겹게 투쟁하는 바람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누렇게 익은 선교지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희생도 컸다.

 

 건강 악화로 잠시 사역 현장을 떠난 북장로교 언더우드 부부, 배럿 부인 (Mrs. Barrett), 맥팔랜드 부인(Mrs. MacFarland)은 단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1906년 1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남장로교 선교회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탁월한 언어 실력을 갖추어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도, 부흥운동으로 선교 사역이 놀랍게 확장되면서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헌신적으로 전도 사역에 몰두하다, 1908년 1월 2일 아내와 자녀들을 남기고 급성 폐렴으로 일주일 만에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갔다.


 당시 난방 시설도 없는 추운 겨울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강추위와 힘겹게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북쪽의 겨울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로, 2월에 들어서도 기온이 영하 14도를 기록할 때가 많다. 이와 같은 강추위 속에서 사역을 강행군하다 급성 폐렴에 걸린 것이다.

 전킨이 폐렴에 걸린 것은 1907년 크리스마스 이튿날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심하게 앓았으며, 3명의 의사와 훈련된 한 간호사가 병의 진행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헛수고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전킨은 차분히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제시하고, 둘러 있는 한국인들에게 몇 마디를 남기고는 사랑하는 이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는 옆에 앉은 사람에게 “제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죽는 것은 값진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숨을 몰아 쉬며 “나는-지금-갑니다- 그리고 나는-매우-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죽음이란 승리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영혼은 1908년 1월 2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리스도와 조용히 연합된 그의 육신”은 군산 선교부 묘지에 앞서간 란킨(Rankin) 박사의 무덤 가까이, 세 명의 어린 남자아이들의 무덤 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회색 화강암의 비문에는 한글로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전킨 목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했노라.”


 그와 함께 한국에 첫 발을 디딘 후 16년 동안을 그와 동고동락했던 사랑하는 동료 선교사 레이놀즈가 “드문 인격의 소유자”, “따뜻한 마음의 사람”,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그러면서도 “실천과 성취의 사람”이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전킨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분명히 하늘나라에서는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전킨은 개선장군처럼 승리의 입성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킨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 냉혹하리만큼 침착한 한 줄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의 신실하고 사랑하는 동료 전킨 씨가 일주일 간의 투병 끝에 1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런 동료의 죽음 앞에 할 말을 잃어서가 아니라, 너무도 슬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라면 언제 전염병에 노출되어 죽을지 모른다는 순교적 각오가 이미 뿌리내려 있었기 때문에,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그처럼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킨은 복음 전파에 생명을 아끼지 않다가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 끝없이 확장되는 선교지, 특별히 사경회와 부흥운동의 계절이었던 12월과 1, 2월에 몸을 아끼지 않고 사역에 몰두하다 ,그만 건강을 잃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고, 급기야는 다시 회복할 기회마저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성경 번역과 전도 사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지내고 있던 레이놀즈가 전킨이 남긴 선교지를 맡아야 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2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