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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수련의 제도 도입,전주 예수병원의 폴S.크레인(具바울)

영국신사77 2008. 7. 31. 00:19

               한국 최초 수련의 제도 도입한 크레인(1919-2005) 가문

                                                                                           신호철 장로(양화진선교회장)

  폴 S. 크레인(Paul Shields Crane, 한국명: 구바울)은 전주 예수병원장으로 22년간 활동하고 한국 의학계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암 치료와 기생충 근절에 공헌한 의료선교사이다.

  그의 아들 윌리엄 랜캐스퍼(William Lancasfer Crane)는 1963년 1월 27일 출생하고 1966년 7월 19일 사망하여 전주선교사묘지에 묻혀있다.

  크레인 선교사 가문(家門)의 대표적 인물은 ‘구바울’의 아버지 존 C. 크레인(John Curtis Crane, 한국명: 具禮仁)목사이다. 그는 미국 남장로회 소속으로 1913년에 내한하여 순천과 평양에서 신학교 교수 등으로 1956년까지 43년간 활동했다. 존의 부인 플로렌스(Florence Hedleston Crane)는 미술 예능 교사로 "한국의 꽃과 민간전승”책을 저술하여 한국학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존의 누님 자네트(Janet Crane, 한국명: 具慈禮) 선교사는 전주기전학교 음악교사로 20년간 봉직했다. 존의 남동생 폴(Paul Sackett Crane)목사는 1916년 내한하여 목포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19년 교통사고로 순직하였다.

 존 C. 크레인 목사의 딸(Elizabeth Letitia, 1917.11.27-1918. 3.25)과 아들(John Curtis Crane Jr., 1921. 3.25-1921.10. 4)은 순천에서 출생하여 두 살과 한 살의 어린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들의 묘는 순천에서 1979년 4월 광주(호남)선교사 묘지로 이장되었다.

            기생충 박멸의 선구자, 전주 예수병원 현대화 주역 폴 S. 크레인(한국명: 具바울)
 폴 S. 크레인(Paul Shields Crane, 한국명: 具바울)은 그 부모님이 안식년 휴가로 미국에 머물 때 1919년 5월 2일 출생했다. 어린 시절을 순천과 평양에서 보내다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애틀랜타(Atlanta)에서 1942년 6월 2일 소피 몽고매리(Sophie Montgomery)와 결혼했다. 1944년 8월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중위)으로 임명되어, 네브라스카 오마하(Omaha)에 있을 때 남장로회(세계선교부) 풀톤(Darvy Fulton)의 주선으로 선교사가 되었다. 한국 선교사 준비를 위하여 리치몬드 유니언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부인 소피는 버지니아 의과대학에서 단기 임상병리 과정(혈액학, 기생충학, 세균학)을 이수했다.

 1947년 8월 세계선교대회에서 정식으로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한국 출발에 앞서 세계선교부가 배정해준 미화 8천$로 미 육군 잉여자산(2차 세계대전 종료로 발생)을 불하 받아, 30배 이상인 25만$ 상당 규모의 의료장비와 소모물품을 구입하고 선적(船積)했다. 그리고 1947년 10월 30일[28세] 군용선 "메이요(Mayo)"편으로 내한했다. 선적된 병원 용품들은 1948년 1월 초 인천에 도착하여, 1948년 4월 1일 전주 예수병원을 8년만에 재·개원했다. 이때 자신은 병원장으로, 부인은 임상 검사실에서 일했다.

 8년간 비워둔 당시의 상황을 크레인은 “전주에 있는 옛 병원 건물은 문도 창문도 없고 전기배관이나 수도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빈 병원 건물을 볏 집 보관 장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때 목수, 전기기술자, 배관공들을 직접 감독하여 시설들을 가동 시켰다”고 기록했다. 입원실은 1948년 5월 1일 45병상(病床)으로 시작하였는데, 입원 환자는 평균 60명이 넘었다. 첫 11개월 동안 7천명의 새 환자를 진료하고, 338건의 대 수술을 했다. 병원은 6.25 전쟁 때 또다시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의료사역은 큰 발전을 보였고, 160병상으로 확장되었다. 암 환자를 위한 방사선 심부 치료기가 설치되고, 병실과 진찰실을 계속적으로 넓혀나갔다.

 한편 크레인은 한국어에도 능숙하여 1961년 11월 박정희 장군이 국빈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역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 등 4회의 정상회담을 통역했다. 이때 존슨은 한국이 월남(베트남)에 1개 대대의 파병을 요청했고, 박대통령은 2개 사단 파병을 제안 하여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한국 의학계의 탁월한 지도자로 1948년 29세 때 한국 최초로 수련의(修鍊醫) 제도를 도입하고, 세브란스 의학교 이사(1956)를 역임하였으며, 1964년[45세] 겨울 7살 여아의 몸속에서 1,063마리 회충이 나온 수술로 충격을 받아, 전국적인 기생충 박멸 운동에 앞장을 섰다.

 

 1963년 국민훈장을 받았으며, 1967년 “Korean Patterns”책을 출판했다.

 

 1969년 미국으로 돌아가 밴더빌트(Vanderbilt)대학교수로 봉직하다가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랙마운틴(Black Mountain)에 정착하고 2005년 6월 13일 86세로 별세했다. 다섯 자녀가 있다. 고증에 도움을 준 김천식 역사사료실장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