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아펜젤러와 그 家門

★3-1. 한국 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H. G.)

영국신사77 2008. 7. 28. 22:52
 

한국 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H. G.)


 양화진 제1묘역(자-4)에는 한국 감리회 최초의 선교사이며,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 선교사 비문이 배재동창회에 의하여 건립되어 있다. 



       

 

 

    ◇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창설자 H. G. 아펜젤러(1858-1902) 1세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년 12월 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그는 1884년 미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해외선교부(총무)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년 2월 27일 아라빅호 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잠깐 머물다가 1885년 4월 5일 미츠비시 배편으로 부산을 경유 인천에 그의 부인과 함께 도착했다.

 이 때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첫 기도를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등 우리 나라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미국 공사(G. C. Foulk)의 권유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H. G. 아펜젤러 선교사의 주요 활동과 업적을 요약하면, 첫째, 배재학당의 창설(1886. 6. 8)을 예시할 수 있다. 배재(培材)학교는 고종 임금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둘째, 한국감리회 최초의 정동제일교회의 설립(1887.10.9)이다.

 

 셋째, 한국의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의 적극 지원이다. 그는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시행하였다. 그리고 벙커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넷째, 성서 번역사업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여, 당시 한문(漢文)위주의 사회에서 한글을 장려하고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 계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밖에도 마가 복음서를 번역하고, 언더우드, 혜론, 스크랜톤 등과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1890)하여 성서 번역에 공헌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 주일, '레이놀즈' 미 남장로회 선교사 주재 구역의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순직하였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도 실종(사망)했다.

 성서 번역에 공적이 큰 J. S. 게일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6-04 (107 호), 2005-04-19 (146 호)

 

 

 

                                          아펜셀러 선교사님 이야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지난 시간에는 우리 민족에게 최초로 오신 ,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통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셀러 선교사 가족의 삶과 사역을 통해 우리 민족을 사랑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펜셀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신학교연맹 모임에서 만나 ,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는 어느 날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접하고 , 자기의 삶을 조선민족을 위해 드리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다가 ,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도착하는 날 ,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 주여 !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 "


 

 아펜셀러는 그의 기도대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초창기 조선 선교의 장을 열면서, 교회사역과 학교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
그날도 , 아펜셀러 선교사는 집회를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고 있었습니다. 항해 도중 , 풍랑을 만나게 되는데 , 타고 있던 배가 파선하게 됩니다. 그 때 조선 소녀 하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아펜셀러 선교사는 즉시 물에 뛰어내려 그 소녀를 구해줍니다. 그가 소녀를 건지고 , 힘이 빠져 , 지친 상태로 , 겨우 배에 메달려 있을 때, 다시 큰 파도가 덮치면서 , 파도에 휩쓸리어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40세의 짧은 생 .... 마지막까지 조선 소녀 , 한 생명을 건지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조선을 위해 바치고 가셨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이고 , 그가 세운 학교는 긴 역사를 자랑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배제 중 고등학교입니다. 아펜셀러 선교사는 순교하였지만, 그가 하고 있었던 선교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아펜셀러의 딸 엘리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이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면서, 조선을 이해하고 자기가 조선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엘리스는 이 땅에 여성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화여대 학장을 지내면서, 지금 신촌의 이화여대 학교부지와 건물을 세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대 최초 한국 학장인 김활란 여사에게 학장직을 넘겨주기까지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페셀러의 아들 헨리 다지는 14세 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방황하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철이 들어 하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조선 사랑하는 가슴을 깨닫고,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아 , 아버지가 세운 배재 중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자신의 삶을 우리 민족을 위해 드리게 됩니다. 그는 6. 25 전쟁 때 ... 우리 민족을 위해 , 세계 많은 국가와 교회에게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실정을 전해 주면서, 춥고 배고픈 이 민족에게 수 많은 구호물품을 마련해 주기도 하었습니다.

 헨리 다지 아펜셀러 선교사는 아버지가 못 다한 그 사역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가 병들어 미국으로 치료차 가면서 " 내가 죽으면 절대로 미국에 묻지 말고 조선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간절히 조선에 묻히기를 원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좋은 일하러 가신 우리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느냐"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지낸 사춘기 시절을 있었기에,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또한 조선에 머물며 선교사역을 하면서, 죤 헤론의 죽음으로 얻게된 땅,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 선교사님들이 묻힐 때 마다  오게 되면서,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 아펜셀러 선교사를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선교사님은 무덤이라도 있는데, 자기 아버지는 목포 앞바다에서 실종되어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덤도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를 꼭 한국땅에 묻어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유언 중에 이런 유언이 있습니다.

  "나를 한국 땅에 묻어 주고 ,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하였는지 , 조선 사람으로 알게 해 달라 " 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아펜셀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의 맞은 편에는, 1950년 이대 강단에서 설교하다 순교한, 그 의 누님, 엘리스가 묻혀있습니다.

 아펜셀러 선교사님 가족의 숭고한 희생의 삶은 , 우리 민족에게 큰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이런 선교사님들의 희생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by http://wmc.or.kr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메노파 교도의 가정에서 1858년에 태어나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셀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상륙한 지점에 세운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안의 아펜셀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동상-1

 

                                                           아펜셀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동상-2

 

 

  아펜젤러는 성서를 번역하였으며(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감리교 인쇄 출판소를 확장하여 각종 선교잡지를 발행하기도 했고,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한편 1895년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정동교회에서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지회가 결성되었는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중요한 인물들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서울, 평야, 인천, 수원, 공주, 대구, 전주 등지로 여행하며 전도활동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의 아펜젤러의 사역은 그의 사역기간 5년동안 체중이 180파운드에서 131파운드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정열적인 것이었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 아펜젤러와 그의 조수겸 비서 조한규, 서울에 있던 장로교 학생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학생 등과 함께 목포로 항해하는 오사카 선박회사의 쿠마가와 마루호에 승선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항해하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키소가와로 이름 붙여진 다른 선박과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아펜젤러의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또한 이화학당의 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아펜젤러 기념비가 정동교회에 세워졌고,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아직 어둠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의 빛으로 밝히기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사르던 선교사 아펜젤러는 결국 이 나라의 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의 죽음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오늘 이 땅에는 1200만이라는 열매가 맺혀졌다. 이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로부터 얻은 빚을 갚을 때이다.

 

  그 빚을 갚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아펜젤러,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편에 앉히시고 그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셨을 것이 분명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하) 

 

>> 목차고리 : 기독교대한감리회

>> 연결고리 : 미국선교사, 내한 선교사한국 교회사, 감리교

>> 바깥고리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 목사 박찬희 http://lord.keh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