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아펜젤러와 그 家門

★3-3. 한국 최초 선교사 자녀, 이화의 상징 A.R.아펜젤러

영국신사77 2008. 7. 24. 20:14

 

                     한국 최초 선교사 자녀, 이화의 상징 A.R.아펜젤러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1885-1950)는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와 엘라 다지(Ella Dodge) 부부 사이에서 1885년 11월 9일 서울에서 첫 딸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평양을 횡단하여 한국 최초로 태어난 서양인 선교사의 자녀이다. 제임스 홀의 아들 셔우드 홀은 자기가 한국에서 최초로 태어난 서양인이라 하지만 그는 8년후인 1893년 출생(서울)하였다.

 A. R. 아펜젤러는 1886년 4월 유아세례를 받고 한국에서 유치원 과정을 마친 다음, 어린 나이로 미국으로가 교육을 받았다. 1902년 그의 아버지가 성경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 항해 중 순직할 때 그는 17세의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1905년 2월 랜카스터(Lancaster)시의 쉬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메사추세츠 주 웨슬리대학을 졸업했다. 모교인 랜카스터 사립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 교사로 봉직하였다.


                               평생을 여성 교육에 헌신한 이화(梨花)의 상징

 A. R.
아펜젤러(Appenzeller, Alice Rebecca)는 1915년 30세 때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처음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1920년 이화학당 당장서리로 임명되었고, 1921년 10월에는 학당 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에는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 4월 40세 때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켜 초대교장에 취임했고, 이때부터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가 분리되었다.

 이화여전 교장 시절에 신촌에 5만여 평의 땅을 마련하고, 1933년 새 교사를 지어 이화동산을 건립하였다. 전택부의 <근대식 교육의 개척자>에 의하면, 그는 1928년 12월 교사(校舍) 신축비 목표액 45만 불의 모금을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2년간 모금에 성공하고 1931년에 돌아왔다. 이때 동창회가 베푼 환영회에서 “나는 2년 전 미국을 향해 떠날 때에는 어찌나 짐이 무겁고 감당키 어려웠는지, 어떤 큰 힘이 나를 누르는 것 같아서 내가 타고 가는 배가 파선을 했으면 시원하겠다고 까지 생각했습니다....”라고 그때의 심정을 고백했다고 한다.

 1932년에는
기독교 조선감리교회 목사로 임직되었다. 그는 새 교사를 짓고 더욱 흥이 나서 학교 발전에 노력했다. 몇 해 동안 벅찬 일을 치러 낸 뒤, 1935년 안식년을 이용하여 미국으로 가 1937년 6월에는 보스턴대학에서 명예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25년간 이화에 봉사하고 세계 굴지의 대학으로 발전하는 터전을 마련한 후, 신임하던 제자 김활란에게 1939년 4월 교장자리를 인계하였다. 이화학당에서 평생을 처녀로 일하면서, 3·1운동 때에는 신앙과 조국애로 나라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인재 육성에 필생의 노력을 다했다.

 1940년 미·일 관계가 악화되어 강제 귀국하여 스카릿대학에서 4년간 강의했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에는 하와이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하다가, 1946년 12월 61세 때 다시 내한하였다.

 그리스도 정신을 토대로 교육 목표 달성과 교회를 위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이화여자대학교의 상징으로 명예총장에 추대되었다.


                            평소의
소원대로 한국 땅 ‘양화진’에 안장되다

 A. R. 아펜젤러는 1950년 2월 20일 아침 11시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는 주제로 채플을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했지만, 6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각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은 그가 남긴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하여 장례식을 1950년 2월 25일 오후 1시 ‘사회장’으로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드렸다.

이 땅에서 나고, 이 땅에서 자라고, 이 땅에서 백발이 되어, 최후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의 젊은 여성들을 위하여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는
평소에 ‘자기는 죽어 한국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원 하였다. 몇 해 후면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가게 되는데, 자기의 참 고향인 한국 땅에 뼈가 묻히지 못할 것을 슬퍼하여 늘 가슴을 졸였다. 이처럼 그는 한국을 사랑하였다.

 

 예상보다 그의 떠남이 좀 빠른듯하나, 그의 유해는 그가 사랑하는 한국인의 손으로 한국 땅에 묻히게 되었으니 그의 소원은 이루어 진듯하다’ 고 기록되었다.(감리회보, 1950. 2. 25)

 양화진
제1묘역(바-6)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라고 쓰여 있다.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by:송광우(http://cafe.daum.net/sumgi2/ELE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