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근환 박사
여는 말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문서상으로나마 한국에 온 첫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비교적 가까이 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직접적인 것은 주로 그의 일기와 보고서들이었다. 그리고 여타의 자료들을 통하여서, 비록 제한적이지만, 그는 나에게 짙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는 한국을 사랑한 한국인의 좋은 친구이다".
필자는 노종해 옮김 H. G. 아펜젤러의 일기(1886-1902) 「자유와 빛을 주소서」와 이만열 편 「아펜젤러 - 한국에 온 첫 선교사」를 주로 참고하고 여타의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노종해가 옮긴 「자유와 빛을 주소서」는 1988년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되었으며 그 내용은 주로 아펜젤러의 일기의 완역과 추모의 글들로 되어있다.
이만열이 옮긴 「아펜젤러」는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1985년에 출판된 3부로 된 책이다. 첫 부분은,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 1843-1928)가 쓴 아펜젤러의 전기(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를 번역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자료편으로서 아펜젤러가 쓴 일기. 편지. 보고서. 메모. 설교 등의 기록과 그가 쓰지 않은 글들도 포함되어 있고, 셋째 부분은 아펜젤러의 선교활동에 대한 편자의 글로 되어있어, 이 책은 아펜젤러 연구에 있어서는 좋은 종합적인 자료가 된다고 본다.
2. 생 애 헨리 D 아펜젤러(1858-1902)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바니아주 수더톤(Souder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일 루터교회 교인이었다.
아펜젤러는 1882년[24세]에 랭카스터에 있는 개혁교회의 프랭클린 마샬 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졸업하고, 그해 가을에 드루신학교(Drew Theolgocial Seminary)에 입학하여 3년의 정규과정을 마쳤다.
그는 1884년 11월에 엘라 J 닷지(Ella J. Dodge)와 결혼하고 감리교 한국선교부(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첫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고, 1885년 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재물포에 상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생동안 파란만장한 우리민족 개화기의 역사 속에서 조선 8개 도 가운데 6개 도에 걸친 장장 1,800마일의 여행을 두루 다니며, 자기 희생적인 섬김을 다하다가, 마침내는 1902년 6월 11일 밤 성서번역위원회 회합의 일로 목포를 향하여 항해던 중 갑작스러운 선박 충돌사고로 말미암아 희생을 당하여 그의 삶을 마쳤다.
참으로 그는 존스가 회고록에서 술회한 것처럼, 그의 생애를 다하여 끝까지 노력한 것은 "한국인을 염려하고 돕는 것"이었을 만큼, 죽는 순간까지 한국인을 사랑하였던 한국의 좋은 친구였다. 자세한 것은 그의 연보(年譜)를 참조하시라.
3. 선교활동과 사업 아펜젤러(Henry G. Apenzeller)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함께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한 안수받은 최초의 선교사로서, 한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개척자로의 그의 선교활동과 사업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눈부신 개척적인 것으로서, 그의 공헌은 한국 교회사적으로는 물론 현대사적인 면에서도 높이 평가되기에 족하다고 본다. 하여 몇 가지 대표적인 그의 일을 추려본다.
1) 목 회 아펜젤러가 한국에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로 오게 되어 설정하였던 선교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국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한국 도착 보고 - 1885년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우리는 부활절(1885년 4월 5일)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소서 !"
그러므로 그가 비록 교육활동에 먼저 착수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전파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유용한 인재'는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주의 피로써 구원받지 않고는 '양육될' 수 없다"고 培材學堂("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의 교명을 고종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사실과 함께, 배재학당의 교육에 대하여 1887년 연례보고서에서 언급하였다.
아펜젤러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는 이에 관련된 아펜젤러의 입장을,
"한국에서 나의 사랑하는 교회의 초석을 놓는 데에 내 평생을 기꺼이 바치겠다. ---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란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복음을 통해서라야만 이 땅의 민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1898년도 연회록의 아펜젤러의 배재학교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학생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학생들은 기독교인이다. --- 이것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만족할 수도 없고 만족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있으며, 우리가 가르치는 자들이 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근거해서 일하고 있는 기본 원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아펜젤러는 일찍이 1885년 겨울부터 외국인(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성경공부를 시작으로 하여, 한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차츰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여, 마침내 1897년 12월 26일 정동 제일 감리교회를 국내외의 헌금으로, 그 당시 "서울에서 천주교 성당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이와 같은 외형상의 교회가 아니라 "성령에 응답하는 영혼들이 모인 교회가 이루어져서 의복이 필요하게 되었을, 교회 건물이 계획되었다." "그는 위로의 설교자였다. 따라서 고통과 死別의 순간이 왔을 때 사람들은 항상 그를 찾았다."
학교나 교회에서 개인적으로나 혹은 대중적으로 호소한 끝에 처음에는 한 명씩, 다음에는 두 명씩, 그리고 그 다음에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고, 거기에는 학교와 병원의 도움이 컸다. 그는 부감리사(집사 목사)로, 감리사(장로 목사)로, Union Church 목사로 인천지방 상주 책임자로, 선교부의 회계로 목회와 선교부 일에 힘써 일하였다.
2) 교 육 이만열이 "아펜젤러의 선교활동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그의 선교 교육활동이었다. 이 점은 복음선교사로서의 아펜젤러가 우리 민족사에 끼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라고 아펜젤러의 교육활동을 평가하였음과 같이, 아펜젤러의 한국에서의 교육활동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활동을 시행함에 있어서 교육사업을 우선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일찍이 1885년 8월부터 한국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시작했고, 1897년 2월 21일에는 고종황제로부터 "培材學堂"(Hall for Rearing Useful Men) 이라는 교명을 외무대신을 통하여 하사받았고, 1887년에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르네상스식 벽돌 건물로 교사를 짓기 시작하여, 1888년에 완공하고 교장으로 이후 줄곧 봉사하였다. 아펜젤러가 우선적으로 착수한 교육사업의 중요성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 첫째는 복음전파의 한 방편이었고, 그 둘째는 그 당시 개화기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나라의 새로운 지도자 양성이라는 점이다. 물론 포교활동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당시의 정황에서 교육사업은 복음 전파의 예비적 내지 간접적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와는 다른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성은 개화운동과 관련된 시의적절한 처사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종황제가 친히 외무대신을 통하여 "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함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왜 선교활동 금지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그 때에, 황제가 친히 외무대신을 시켜 "培材學堂"이란 이름으로 교명을 하사하였겠는가? 아펜젤러는 1887년 연례보고서에서 "외부대신이 우리 학교를 국왕에게 설명한 후에 국왕께서 학교 이름을 하사하신 것 - Pai Tjai Hak Dang-"유능한 인재를 양육하는 학교"라는 뜻 - "이라고 하였다.(p.311) 그리하여 그는 배재학당의 당훈을 "慾爲大者 當爲人役" 곧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아야 한다"로 정하고 구 시대의 봉건적 지도상이 아닌 새 시대의 지도자상을 지향하는 교육을 실시하여 마침내는 새로운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개화사상의 두 핵심은 反封建, 反侵略(外勢) 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화적 인권운동과 반제국주의적, 반식민주의적 자주독립운동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류에 적합한 교육적인 안목을 가지고있었다.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의 반봉건적인 교육사업을 한국의 부패한 科擧制度와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科擧는 국가가 갑자기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반면 그들의 전형적인 개인적 행동을 보면 언제나 가정에서는 小君主였으며, 관아에서는 뇌물을 받고 정의를 우습게 팔아치우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근면한 자들의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부유한 자들의 곡간을 갉아먹는 존재이기도 했다. 또한 그러한 박학한 무식장이는 공직에 있을 때, 자신의 욕정을 위하여 천민 여인들을, 자신의 미신을 위하여 점장이들을 후원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전 체제의 기둥이면서도 귀신 숭배와 불의의 화신이었으며, 때문에 국가의 안전과 번영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정부의 관리들은 자신의 개인적 위엄에 대한 착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외국인들이 보기에 코메디 오페라를 무색케 할 정도의 희극을 연출하기 아펜젤러가 주축이 되어 미국인 개척자들이 구체화시켰던 교육은 이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 민족 앞에 아펜젤러는 목소리와 펜으로 잔치를 베풀고, 생명의 떡을 쪼개 주어야했던 것이다. 케케묵은 중국의 학식에 짓눌려 있던 젊은이들 대신에, 유능한 양성소에서 근대적 삶을 영위할 자질을 갖춘 수백 명의 교사들이 아펜젤러에 의해 배재학당(培材學堂, The Hall for the Rearing of Useful Men)에서 배출되었다.
배재학당의 목적은 한국 학생들에게 서구의 과학과 문학 교육과정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통역관이나 교환수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박학한 교양인 교육과 아울러 自助力과 품위를 갖춘 의연한 국가의 지도적인 동량(棟梁)을 양성하는데 두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기독교 교육을 계속해서 주도해 나가려면 정규 대학 학부 과정으로서의 "서울대학교"(the Seoul University)와, 또한 교수진이 갖추어진 정규과정의 신학교(a Theological Seminary) 설립의 필요성 등의 원대한 그의 교육에 대한 이상을 일찍이 1898년도에 건의한 바가 있다.
3) 기타: 성서번역, 문서사업, 사교적 활동 등.
4) 정 치 아펜젤러가 슬프게도 44세를 일기로 1902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되어, 그 이후 우리 나라의 급격한 비극적인 정치적 변화에 어떻게 처신하였을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한국에 오면서부터 한국의 정치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이 그에게서 남달리 돋보이는 점이다. 그는 1885년 10월 13일자 레이드(J. M. Reid)박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실과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본다.
현 시점에서 전 섭정의 막강한 영향력은 평화적인 진보 방향으로 주어질 것이 확실시됩니다. 모든 나라의 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사랑하셔서 번영과 행복을 허락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대원군의 동정이 면밀하게 주시되겠지만, 그가 자신의 조국을 곤경에 빠트릴 것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만일 곤경이 온다면, 그것은 언제나 평화를 보장해 줄 것으로는 예상되지 않는 외국의 "영향"에서 올 것입니다.
사실 아펜젤러의 모든 선교활동의 저변에는, 영적으로는 한국인의 영혼구원과,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독립"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깔려있었다. 그는 비교적 일본 사람과 친한 편이었다. 그리고 Japanes Mail의 한국특파원으로 지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이해관계에 관한 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서는 단호하게 한국인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한번은 Japanes Mail에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바 있다. 내용은 종로에서의 상권관계로 한국 상인들과 일본 상인들 사이에 마찰이 생겨 한국 상인들이 상대방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의운동이 벌어진 사건에 대한 논평인데, 한국 상인들을 옹호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 운동은 일본인 상인들이 사업을 위해 보다 중심지를 원하게 되자 이렇게 확고한 항의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한국 상인들이 이런 점에서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일본인의 신청이 거부될 것을 희망한다."
이와 같은 그의 한국의 독립과 관련된 그의 정치적 관심이 여러 면에서 표출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비정치화 문제, 독립협회와의 관계, 이승만과의 관계 등에서 살펴본다.
1) 비정치화 문제 주한 미국대사관에서는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 시민들에게 회람을 통하여, 주재하는 "그 나라의 정치 문제에 간섭하는 것 등은 엄중히 금"하였다. 그리고 주한 선교부의 분위기도 점차 비정치화의 분위기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이에 대하여 매우 소극적이 아니라 저항적인 편이었음을 본다. 그것은 주한 미국대사였던 알렌과의 불편한 관계가 여러 편지들에서 보여지고 있다.
1898년 11월 20일자 아펜젤러에게 보낸 알렌의 편지와, 이에 대한 아펜젤러의 답장의 편지를 보면, 만민공동회와 관련해서 배재학교가 "독립군"의 도피처 내지는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는 알렌의 주장에 대해, 아펜젤러의 답장이 미온적인 것임을 보아 그런 사실을 묵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다음은 알렌이 배재인들의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1898년 12월 8일자 편지의 말이다.
'우리 선교부의 기독교 신자들이 이 도시를 몹시도 괴롭히고 있는 정치운동에 현저하게 참가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며, 다른 선교부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는 반면 유독 당신(감리교)의 선교부 추종자들, 특히 당신의 배재학교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서 계속 정부의 불평을 듣는 것이 유감입니다. …만일 당신이 여러 가지 선동과 함께 동정하는 방법으로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렇게 대담할 수 없다는 그 관리의 말에 수긍이 갔습니다. … 나는 위에서 말한 관리가 당신을 방문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독립협회와 독립신문과의 관계 아펜젤러의 한국을 사랑하는 정치적인 관심은 그의 독립협회와 그리고 독립신문과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독립협회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우선 그가 1897년 8월 13일 독립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연사로 초대되었음과 함께 "한국에 대한 주한 외국인들의 의무"라는 제목 하에 행한 연설문에서 보게된다.
'이 협회(독립협회)가 목적하는 지식의 보급, 애국심의 보존, 그리고 국가의 독립 등은 우리들의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개국일을 준수하는 것과 함께 현명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아름다운 문(독립문)은 이 협회의 외적 상징물입니다. … 우리는 이 협회가 기울이고 있는 한국의 복지와 독립을 고양하고자 하는 장한 조력이 대성공을 거둘 것을 바라며, 그들의 조력이 마침내는 면류관으로 장식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나는 독립협회의 훌륭한 사업에 축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독립협회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을 하였다. 독립협회가 개화기에 있어서의 소장 엘리트들이 우국정신 하에 모인 개화파의 모임이라면, 독립신문은 서재필의 미국으로부터의 귀국과 함께 창간되어 이들의 계몽적 기능을 주로 하여 우국정신을 공표하고 백성에게 가르치며 계몽시켜 민주 자주정신을 앙양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그런데 서재필이 정부의 압력에 의하여 독립신문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급기야는 출국까지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부의 부패와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여지없이 폭로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독립신문을, 서재필의 퇴거로 윤치호와 함께 편집책임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선교부와의 관계상 편집(주필) 책임을 윤치호에게 돌리게되었을 뿐이다.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신문을 중단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선교부에서는 내가 명목상의 편집자로 남아 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재의 관계로도 꼭 필요한 일은 할 수 있으며, 윤씨(윤치호)는 편집 책임을 능력 있게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펜젤러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그리고 독립신문 등에 긍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극 참여까지 하였음을 본다. 그는 서재필이 떠난 후에도 계속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그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이었다. "만일 한국이 한나라로 온전히 보전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배재와 독립협회, 그리고 출판이라는 세 발솥(tripod)에서 시작했던 여러 종류의 일들 덕분일 것입니다."라고 그는 윗 편지 말미에 쓰고 있다. 그가 얼마나 서재필만이 아니라 한국을 사랑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3) 이승만과의 관계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부터 아펜젤러의 제자로 사제관계였고, 서재필이 귀국하자 배재학당에서 가르치게 되면서부터 이승만은 또한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만민공동회에서 활약하다가 "만민공동회에 대한 총 검거령이 내려지고, 1899년 1월 체포되어 6년 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송건호, 18)
이렇게 이승만이 옥살이를 할 때에 아펜젤러는 찾아가 돌보아 주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1899녀 12월 28일자 일기에 이승만으로부터 받은 두 통의 편지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오늘 이승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약 11개월 전에 서울에서 스크랜톤 의사와 함께 걷고 있다가 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만민공동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권력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였는데, 사복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의 체포는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풀려나올 바로 그 무렵에 탈옥하라는 설득을 받았으나, 도망하는데 실패하여 다시 감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1899. 12. 28. 존경하는 선생님께 1900. 2. 6.받음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는 이승만을 백방으로 도와주고 가족까지 보살펴주려고 노력한 것은 아펜젤러의 제자에 대한 휴매니티의 발로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도 만민공동회의 일원이었던 이승만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의 자세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맺는 말 "한국을 사랑한 한국인의 좋은 친구"인 아펜젤러가, 비록 짧았지만 그의 한국에서의 첫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일들을 돌아보면서, 한국에 남긴 그의 삶의 의미를 몇 가지 가려본다. 1) 그는 영혼 구원과 현실 참여, 영과 육의 통전적 구원의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 선교를 일찍이 한국에서 구현한 선구적 선교사이다. 2) 소위 네비우스 원칙에 의거하여 채택된 한국장로교(한국개신교)의 선교정책이 결과적으로 원래의 네비우스 원칙의 궁극적 목표였던 독립 자주적인 교회수립에 실패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신학 교육정책과 비정치화 문제에 있다고 보는 나로서는, 아펜젤러의 일반 고등교육과 함께 수준 높은 신학교육 정책 및 역사 참여적인 정치적 관심이, 그의 뜻밖의 이른 죽음으로 한국 교회 및 현대사에서 꽃피우지 못하게 되었음이 못내 안타깝고 아쉬운 점이다. 3)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된 사람인 한국인을 사랑한 참으로 웨슬리의 성화론적 성결한 사람이다. 4) 그는 근면 성실하고, 어렵고 약한 자를 도우며, 불의에 항거하는, 그러면서도 누구와도 더불어 따스하게 대하고 사귀는 인상 좋은 서양 신사의 모습을 갖춘 충성되고 강직한 하나님의 종된 그의 인간상은, 바야흐로 해외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국교회가 파송할 바람직한 선교 사상으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번 기회에 나의 좋은 친구로 그를 만나게 되었음을 나 개인의 큰 기쁨으로 안다.
아펜젤러의 연보(年譜)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수더톤(Souderton)에서 출생
얼마동안 체재 후 일본으로 돌아감
참석해서 도와줌
일본인 철도노동자들과 충돌사건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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