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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선교대국]미국 선교사들, 조선을 가장 선호

영국신사77 2008. 7. 24. 17:17

                     [한국은 선교대국]미국 선교사들, 조선을 가장 선호

                                                                                                                                           2006-05-09 11:41

한국, 기독교 전파 120년 만에 선교사 파송 대국으로 괄목할 성장

 복음을 전해받은 지 불과 120년 만에 한국은 ‘선교대국’으로 부상했다. 해외 선교를 견인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일은 없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민족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일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이 열국에 문호를 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후반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10년 사이에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과의 조약이 계속해서 체결되었다. 이제 더 이상 조선은 윌리엄 그리피스가 명명한 ‘은둔의 나라’가 아니었다. 

  1872년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Moody) 목사가 미국의 조그만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열흘 동안 400명이 구원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무디 부흥’을 비롯한 미국, 캐나다, 영국 전역을 휩쓴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세계 오대양 육대주로 흩어졌다. 그 중에 아시아는 최대의 선교 대상지였고, 그 가운데서도 조선은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선교지였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찰스A 클락은 놀라운 사실을 전해준다. 그가 맥코믹 신학교 재학시절 44명의 졸업반 학생 중 18명이 해외선교를 지망했고, 그들 모두가 조선을 지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컨스 두 사람만이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선교사로 입국하려면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선교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서는 조선땅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2년 후인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北)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러스 알렌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듬해 1885년 4월 5일 보슬비가 내리는 부활절 아침 한국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에 발을 디딤으로써 본격적인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이어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선교사들이 차례로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했다.

 1889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소속의 헨리 데이비스, 1892년 미국 남(南)장로교 소속의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이 들어왔다.
 
 1896년 남감리교의 선교사 리드를 비롯하여 외국 선교사들이 속속 한국에 입국했다.
 
 1884년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이 입국한 후 24년 뒤인 1908년, 구세군 선교사가 입국했다.

 이로써 한국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했다. 선교가 시작된 지 불과 20년 만에 이렇게 다양한 교파가 거의 동시에 입국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이 중에서 4개의 장로교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입국한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국 선교를 주도했다.


 당시 해외 선교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팽창과 맞물려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식민지 확장의 일환으로 남미 선교를 착수한 것이나,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앞세우고 인도와 중국 선교를 착수한 사례가 보여주듯, 당시 대부분의 해외 선교는 제국주의 창구 역할을 감당했었다.

 그러나 조선 선교는 이에 비해 비교적 순수하게 시작되었다.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앞서 브라운이 지적한 것처럼 신학적으로 건전했고, 매우 탁월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젊은이들은 오로지 복음에 불타 조선에 입국한 것이다.

 초기 개척선교사들은 거의 20대였다. 이들은 한국선교를 시작하면서 한국교인에게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불어넣었다. 성경공부에 기초한 자립·자치·자전은 이들이 선교 초부터 주창한 선교정책이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만든 것이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해 역량을 축적한 한국 기독교인은 한반도 전역으로 흩어졌다.

 민족복음화와 해외선교운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는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선교를 착수했다. 독노회의 정식 명칭은 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이다.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조직되었는데, 당시 교세가 노회 정도의 규모였기 때문에 ‘독립된 노회’라는 의미에서 독노회(獨老會)라 불리게 되었다.

 그 해 처음으로 안수받은 7명의 목사 가운데 한 명인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에 보냈다. 이어 1908년 일본 도쿄 선교, 190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선교, 그리고 1912년 장로교 총회가 조직된 후에는 중국 산둥성 선교를 착수했다.

 상당수의 유학생과 노동자가 거주하고 있는 일본, 30만의 고려인이 흩어져 살고 있는 시베리아, 본래 상당수의 한인이 있는 데다 일제의 식민찬탈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10만명이 이주한 간도는 선교대상 1순위였다.
 
 초창기 선교사업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력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일본지역의 경우 두 교파가 힘을 모아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초기 선교는 주로 이들 나라에 거주하는 동포를 대상으로 한 선교였다. 나라 잃고 세계에 흩어져 낯선 환경과 싸우며 민족적 울분을 감내하는 동포들은 선교사들을 통해 영적인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갖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동포들이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 모여들었다. 낯선 이국에서 신앙의 공동체는 자연히 삶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외선교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제주도에 간 이기풍 선교사는 주민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일도 있었고, 1909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최관흘 선교사는 러시아 희랍정교회의 박해로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는 극심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해 버렸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는 일제시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줄기차게 지속되었다.

 해방 후 전쟁과 폐허로 한동안 미진했던 해외선교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은 세계에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대국으로 부상,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미국이 영국을 앞지르고 해외선교를 선도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머지않아 한국교회가 미국을 앞지르고 해외선교를 리드하는 날이 올 것이다.

                                                                                                                  박용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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