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양화진묘원· 선교사

★10. 최초로 애국가 만들고 옥중 전도 시작한 벙커 선교사

영국신사77 2008. 7. 18. 00:28
           최초로 애국가 만들고 옥중 전도 시작한 벙커 선교사
 

         ◇ 최초의 근대학교 육영공원 교사와 배재학교 교장으로 봉직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는 1853년 8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3년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이 한ㆍ미조약(1882)이 체결된 후여서 구 한국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미국 측에 교사를 초청했다.

 미국 공사 푸드의 주선으로 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 신학교에서 벙커, 길모어(Gilmore), 헐버트(Hulbert) 등 3인이 선발되어 1886년 5월 두 여성(엘러스, 길모어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 했다.

 D. A. 벙커는 육영공원에서 고관 자제들과 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7년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와 결혼했다. 육영공원이 폐쇄 될 때(1894)까지 8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그 후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국 감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활동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1902) 후 배재학교의 학당장이 되어 1911년까지 교육 발전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후임자 신흥우에게 교장 자리를 인계했다. 그는 종래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을 개선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1892년 3월에는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通政大夫 戶曹參議”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國歌)를 스코틀랜드 민요 ‘로렐라이’에 맞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부르게 하는 등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 한국 최초의 옥중 전도와 민족 지도자의 개종


그는 한국 최초의 옥중(矯導所) 전도를 통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 지도자들을 개종시켰다. 1902-1904년 독립협회 지도자 이상재 남궁억 등과 이승만 신흥우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이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감옥을 출입하면서 그들의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수감자들을 매주 만나 위로하고 신앙 상담과 예배를 드렸다.

선진 외국에서 시행되는 죄수들의 처우 개선, 야만적 고문제도의 폐지, 음식이나 의복을 차입할 수 있는 자유, 독서의 자유 등 인권 보호를 건의했다.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관련 서적과 과학, 철학, 역사 등 서적을 감옥에 넣어 주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이상재 등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옥중 전도와 연계하여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된 사례도 있었다. 당시 투옥되었던 신흥우의 아버지(申冕休)는 “옥중(獄中)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예전에도 없는 일이다. 죄를 범하고 오랫동안 갇혀 있을 때에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책이나 읽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내 아들 흥우가 옥에 갇혀 마땅히 징역을 치를 것이지만 힘에 겨운 일을 시키지 아니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책을 읽게 하고 글도 쓰게 했다”는 ‘獄中開學顚末’이 전해지고 있다.


                      ◇ 교회 연합운동에 앞장서고, 왕실을 보호함

그는 1890년 6월 한국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1896년 이후에는 동대문교회에서 목회 활동도 했다. 1905년 9월 11일에는 교파를 초월한 기구로 “한국복음주의선교단체 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한국 교회 연합을 지향하는 역사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초대 서기 겸 회계 및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자신의 선교사역을 계속하면서 성서 보급을 위하여 미국성서공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한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고종 황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벙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호위하면서 왕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 후 1926년 7월 4일 73세의 노령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여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1930년 한국에 잠시 방문하였으며, 1932년 11월 28일 80세로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별세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 유언하여 그 부인은 남편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 1933년 4월 8일 정동제일 감리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제1묘역(다-11)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어구가 기록되어 있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5-01-03 (133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