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1.國內 성지순례歷史교회文化탐방

제주 성내교회 (제주시 삼도2동)

영국신사77 2008. 7. 23. 01:53

기장 성내교회 주보

 

현 교회모습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 초기 중심교회이자 제주 최초의 교회이다.

ㅁ1908년 이기풍목사가 세명의 신자들과 함께 향교골에서 기도회 시작

(제주 최초의 교회시작)

ㅁ일도리 중인문 안에 초가 여섯간을 매입하여 교회당을 사용.

ㅁ구 출신청을 매입하여 성내교회당으로 사용.

ㅁ교회 설립계를 제출(제주성내교회)

ㅁ구 출신청 앞에 목조 52평의 예배당 기공.

ㅁ영흥 야학교 69년제 보통과 설립.

ㅁ관인 중앙유치원 개원(제주 최초의 유치원)

ㅁ교회 구내에 노회경영 성경학교 교사의 기숙사를 신축

ㅁ교회 부흥으로 제주동부교회를 설립하고 성내교회는 제주서부교회로 개칭. 

1953년 성내교회(기장)과 성안교회(예장통합)이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 성내교회 예배실

 

1921-73 교회 모습

 

1956년 춘계대부흥회 기념사진    (출처- http://md.churchok.com

 

 1974 건축 기공식

 

 제주 최초 교회당

 

 이기풍 목사 가족 사진

 

이기풍목사 공적비

 

 이기풍 목사 공적비

 

 추모의 글 

 

 봉헌비

 

1953년 분영 시 현 성내교회인 제주 서부교회 시절의 당회서문 (예장 통합 성안교회는 제주 동부교회로 불러졌다)

 

 

교회 안 팽나무 설명

 

2003년 2월 10일 성내, 성안교회 희년 연합예배

1908년 제주도 최초의 선교사이자 제주 첫 개신교회인 성내교회를 세운 고 이기풍 목사의 막내딸 이사례 권사(80·영락교회)가 참석한 것. 이권사는 예배 마지막 순서에 이기풍 목사가 사용했던 강대상 뒤에 서서 “아버지가 이 강대상을 잡고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며 감격해 했다. 1953년 장로교 분열 당시 성내교회와 성안교회로 나눠진 이래 별다른 교류가 없던 기장과 예장통합 소속 두 교회가 기장 희년을 맞아 한자리에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을 기쁜 모습으로 바라본 이권사는 “양 교단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권사는 이어 “아버지가 순교한 이후 어머니께서는 자주 ‘아버지는 화해의 은사를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셨다”며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계셔서 오늘 이 현장에 함께 계셨다면 매우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권사는 성도 가정이나 교회, 노회에서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아버지께서 가시면 모든 분쟁이 해결되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권사는 살아 생전 이기풍 목사가 자녀들에게 강조한 3가지 덕목으로 관용 백인(百忍) 겸손을 들었다. “아버지는 상대방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야 하는 관용의 마음과 참는 것이 신자의 덕목이라며 백번이라도 인내하라며 백인(百忍)을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낮추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겸손을 강조했습니다” 이권사는 또한 고 이기풍 목사가 즐겨 외던 성경구절인 “내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를 기억했다. 또한 “상대방이 너를 핍박하더라도 십자가 예수를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라. 네가 남을 미워하면 예수님도 널 미워할 것이며 네가 남을 사랑하면 예수님도 널 사랑한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라”는 내용의 어머니 고 윤함애 여사의 유언을 수첩에서 꺼내 읽어 예배 참석자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깨우쳐줬다. 이기풍 목사가 57세 때 낳은 막내딸인 이권사는 이목사의 4남2녀 중 유일한 생존해 있다.  

제주 지역 기독교 선교역사

제주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1908년. 1907년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로회(이하 독로회)가 조직되고, 7명의 한국인목사가 처음 탄생된지 1년만이었다. 독로회는 그해 겨울 평양출신 이기풍목사를 제주선교사로 파송하는데, 그가 도착한 것은 1908년 봄이었다. 당시 제주는 일명 ‘이재수의 난’으로 서양종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않은 때였다. 그는 제주성을 중심으로 금성 한림 모슬포 법환 조천 등지에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초창기 교인들은 대부분 개인 집을 기도처로 삼고 예배를 올렸는데, 그후 예배당은 초가나 창고를 개조한 목조 함석지붕에 돌집 형태였다. 금성교회는 이기풍 목사가 오기전 해인 1907년 독립운동으로 순교한 조봉호 전도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드린 양석봉, 이도종씨 외 6명의 성도를 중심으로 첫 예배를 드리므로 시작하였다. 모슬포 교회는  1910년 태동하였고 1913년 대정읍 하모리 988번지 초가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다, 1923년 하모리 1075번지 60여 평의 목조기와 예배당건물(현 모슬포 제일교회)을 지었고, 1959년 5월 현 교회당 옆 하모리 1218번지 애기무덤이 있는 대정면 소유의 공유지에 세번째 교회당을 건립했다. 교회의 분리로 불가피하게 대지 250평 건평 80평 규모의 새 성전을 지었다. 새 교회 목재는 구 교회건물의 일본 자재를 사용했다. 목재가 귀해 인근 모슬포 훈련소 소나무를 베어다 썼고, 발동기로 나무를 재제했다. 교회 건물은 일본 목수의 힘을 빌었다. 당시 근방엔 15평 정도의 건물이 고작이었고, 기둥이 없는 큰 건물을 지어본 경험있는 목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회건물은 현무암 벽체의 석조 슬레이트 지붕 형태로, 교회 앞면에 박공벽(측벽 부분에서 지붕의 형식에 따라 벽체가 삼각형으로 보이는 형태의 벽)에 포치를 두어 출입하고, 측벽부엔 버팀기둥을 두었다. 버팀 기둥은 바람에 견디기 위해 덧붙인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이 완공될 즈음, 그 해 9월 추석 전날 제주에 덮친 사라호 태풍으로 교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교회 지붕틀이 주저앉았고, 종각이 파손되어버렸다. 태풍피해를 본 교회는 4개월 뒤인 12월에야 준공됐다.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교회 지봉수 원로장로(79)는 김씨 땅이 많아 ‘짐개동산’으로 불렸던 이 교회부지엔 당초 대정중학교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당시 이 교회 조남수 목사는 교회분리로 인한 아픔이 있었지만, 학교가 들어설 경우 대정의 중심지로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교회부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또 주민들이 반대하지 않은데다 공유지였던 점도 한 이유이었다. 주민들은 서쪽방향이 터지면 가난하다고 믿었는데, 바로 마을 서쪽이 교회 부지여서 반발이 없었던 것이다. 바람 세기로 유명한 한경면 고산리 2192번지 구 고산교회당. 제주도내 몇 곳 남지않은 현무암 벽체의 교회건물이다. 이곳은 1916년 인근 용수리 김기평의 전도를 받아 서관옥 추씨산옥 등이 예수를 믿는데서 교회가 태동했다. 첫 기도처는 고산초등교 뒷편 개인집이었다. 교회당이 건립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 뒤인 1935년이었다. 추씨 할머니가 당시 290원 상당의 부지와 초가 3간을 기증함으로써 이뤄졌다. 고산리 2192번지 구 고산교회당은 이렇게 건립됐다. 추씨 할머니의 기증과 교인들이 힘을 보태 36평 목조 함석지붕의 첫 예배당과 사택 초가 15평이 세워진 것이다. 첫 예배당엔 현무암 기단위에 벽돌로 쌓은 종탑도 건립됐다. 교회 종은 줄을 메달아 쳤는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종탑은 건재하다. 두번째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64년 10월이다. 고국현(78) 은퇴장로는 제주성내교회의 모태인 서부교회를 모델로 목수일을 하는 강정교회의 한 장로의 도움으로 지어졌다고 말했다. 교회 건물은 현무암에 모래를 섞어 바른 벽돌건물(41평)이다. 교회 전면은 반듯지만, 벽체는 오각형 육각형 돌을 깨서 박고 시멘트를 쳐 넣었다. 이때 쓴 모래는 고산 수월봉 절벽 10m아래 ‘한장알’에서 교인들이 달구지에 실어온 검은 모래였다. 현무암 벽체는 안쏠림 기법을 썼는데, 바람에 건물이 견디도록 한 것이다. 함석지붕이 부식돼 슬레이트로 지붕을 교체했지만, 40여 년간 고산 교인들의 성소로 쓰였다. 현재 구 교회당 남쪽의 새 교회당은 2002년 부지를 매입하고, 구 교회부지를 개인에게 팔아서 2004년 9월 완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