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름다운 기부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1838 ~ 1913)
1884년 한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 앨런(Allen)은 목사가 아니라 의사였습니다. 그는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이 병원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병원을 주관하는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져서 원성이 컸습니다. 결국 선교사들은 재산권과 운영권을 자신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통보했고 오랜 협상 끝에 조선 조정는 선교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광혜원의 당시 책임자는 캐나다인 에비슨(Oliver Avison) 박사였습니다. 1893년 우리나라 온 그는 병원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병원의 수준을 높이려고 애썼는데 에비슨이 처음 도착했을 때 병원은 한국식 단층건물로 12.5평 크기였다고합니다. 그는 설계사에게 부탁하여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병원을 설계토록 했습니다. 비용은 1만달러 정도가 소용될 예정이었습니다.
1900년 봄 에비슨은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해외선교대회에 참석, 병원에 대해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청중이 너무 많아서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발코니 맨 뒤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저 사람이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스탠더드 석유회사(존 D. 록펠러가 창업)의 CFO (재무담당임원)이던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였습니다. 클리브랜드의 한 장로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던 그는 연설이 끝나자 세브란스는 에비슨을 찾아와서 계획에 대해 자세히 물었습니다. 에비슨은 이미 설계도까지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세브란스는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았습니다. 얼마가 필요하냐고 묻자 에비슨 1만달러만 있으면 할수 있을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세브란스는 1만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세브란스는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크다”는 말을 남겼고, 이 말은 세브란스 병원의 정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1902년 세브란스의 기부금과 기존 병원 판매 대금을 합쳐서 서울역 맞은편에 병원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1904년 11월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 최고의 병원 세브란스는 한 의료선교사의 비전과 헌신적인 기독인 사업가의 헌금으로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 이후에도 그 후손들을 통해 세브란스의 기부가 아직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클리블랜드의 세브란스 홀은 세계적 교향악단인 클리블랜드 교향악단의 본거지로 1928년 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들인 존 세브란스가 지어 기증한 것입니다. 세브란스가(家)의 자선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병원에는 지난 50년 동안 ‘미국 북장로교회(PCUSA)’ 명의로 매년 후원금이 입금됐었습니다. 병원 직원들은 그냥 “미국 교회가 좋은 일 하나 보다”라고 생각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원 120년을 맞아 병원측이 추적해보니 돈의 출처는 아들 세브란스가 만든 기금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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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 지음 / 꽃삽 / 286쪽 / 12,000원)
우리는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며 한동안 의문에 휩싸였다. 세브란스병원 후원금통장으로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매년 거액의 달러가 들어오고 있었다. 후원금의 출처를 찾으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안 되겠어. 계좌추적을 해서라도 꼭 알아내고야 말겠어.”
기획조정실 직원들과 나는 곧바로 자료 추적에 들어갔다. 은행 자료를 통해 1955년 7천 달러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보내온 후원 금액을 합산해 보니, 45년 동안 총 80만 달러가 입금되었다. 보내온 액수가 해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평균 1만 8천 달러씩 보내온 셈이었다. 계좌의 명의는 '미국 북장로교'로 되어 있었다.
“기조실장님, 광혜원 시작할 당시 알렌과 에비슨 등이 모두 북장로교 출신이니까, 그곳에서 계속 후원을 한 모양이네요.” 어느 직원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직원들은 미국 북장로교에 연락하여 후원자가 누구인지 조사를 의뢰했다. 얼마 후 조사 결과가 우리 세브란스 측에 전달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45년 동안 보내온 후원금의 출처가 바로 ‘J. L. 세브란스 펀드’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J. L. 세브란스!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했다. 1900년대 초에 4만 5천 달러를 기부하여 조선 땅에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짓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루이스 세브란스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 돈 가치로 계산하면 거의 1천억 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람이 펀드를 만들어 계속해서 후원금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죽을 때 선교기관에 부탁하여 펀드를 만들어 후원을 부탁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료를 보며,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잘 아는 루이스 세브란스가 아닌 존 세브란스는 또 누구란 말인가? 알아보니 존 세브란스는 바로 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들이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J. L. 세브란스 펀드’가 생겨났는지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세계적 부호 록펠러의 동업자로서 상당한 재력가였던 루이스 세브란스는, 임종 당시 자신의 아들에게 세브란스병원을 계속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들 존 세브란스는 자신이 죽기 직전인 1934년까지, 20년 동안 12만 4,500달러를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했다.
그리고 존 세브란스 또한 죽기 전에 자신이 남긴 유산으로 ‘J. L. 세브란스 펀드’를 만들어 세브란스병원에 계속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미국 북장로선교회는 아들 존 세브란스의 유지를 받들어 이를 실행에 옮겼다.
45년 동안 베일에 휩싸여 있던 기부금의 출처를 자세히 알고 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가난한 나라를 돕고자 했던 세브란스가의 대를 이은 이웃 사랑에, 나를 비롯한 전 직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의 순수한 기부정신은 오로지 기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다른 어떠한 의도도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욕심이나, 명문가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기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온전한 기부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원을 만들어 주고, 그 일이 계속 유지되고 관리되도록 끊임없이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진실로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의 기억은 흐릿해진다. 현실의 삶에 묻혀서 꼭 기억해야 할 일이 있어도 얼마 후 곧 잊어버리게 된다. 누가 말했던가, 잊을 수 있는 것도 축복이라고... 하지만 소중한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도 더없는 축복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부와 명예를 버리고 낯선 조선 땅에 와 헌신한 의사들과, 병원 건축을 위해 선뜻 거액을 기부했던 사업가 세브란스처럼, 먼저 씨앗을 뿌리는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브란스병원이라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수고가 일회성의 의료봉사나 기부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 흘러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정신 역시 함께 흘러 내려와 세브란스병원의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세브란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들처럼 세브란스를 위해 음지에서 헌신한 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2.7퍼센트의 소금 때문이라고 한다. 2.7퍼센트의 염분이 있기 때문에, 97퍼센트의 물이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소수가 전체 조직을 썩지 않게 한다.
헌신한 소수가 시작한 작은 일이 나중에 큰 역사를 이루어내는 걸 나는 많이 보아왔다. 헌신한 소수가 역사를 바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 『세브란스 드림 스토리』 중에서
출처:안양시립도서관이 시민에게 드리는 특별한 프리미엄 서비스 - 도서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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