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14 17: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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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 있다가 좋은 데로 시집가라"는 부모님의 엄한 명령에 난 거절 한마디 못하고 시집을 가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이 된다. 지금도 가슴에 멍이 들어 있다. 그때 나는 교육자이신 부모님 테두리를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또 그렇게 살았다.
1969년 미국 시민권자인 남편을 중매로 만났다. 부자 나라인 미국이 좋아서, 세번 만난 후 곧 결혼했다. 미국에만 가면 만사형통, 가난은 끝이고 인생이 활짝 열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국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언어는 물론 문화와 생활풍습을 익히기에 너무나 힘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에 대한 나의 기대치는 큰 실망감으로 몰려왔다. 결국 성격 차이로 다섯살난 딸 아이를 데리고 이혼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그때 내 나이 36살. 무서운 것 없이 자신만만하게 날뛸 때였다. 가진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딸만 데리고 배짱도 좋게 위자료 한푼 받지 않은 채 그냥 이혼을 결정해버리고 말았다.
그 어떤 누구의 말도 그 때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혼하면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친정과는 단절된 세월을 살아야 했다. 나는 오기로 깡으로 배짱으로 이를 악물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이국 땅에서 대우받으며 살려면 전문직에 종사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캘리포니아 뷰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두루 경력을 거치며 LG에 스카우트돼, 미국 전역을 총괄하는 드봉화장품 지사장이 됐다.
70여개의 지사를 세우며 승승장구했다. 딸 아이도 UCLA를 졸업했다. 어느 덧 저명 인사가 되고 보니, 결혼에 실패한 것이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부유하게 자라온 남편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질책도 해보았다. 인내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긴 후회와 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미국에다 국산 화장품을 심느라 각 지역을 날아다니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라이벌 회사가 9년만에 세운 매출을 3년만에 따라잡았다. 덕분에 난 LG에서 최고 대우를 받게 됐다.
내 딸 아이는 열심히 사는 엄마를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항상 우수한 성적으로 날 기쁘게 해주었다.
그 때 재혼하라는 청이 들어왔다. 상대는 나보다 4살 위였고 2남1녀를 둔, 처와 사별한 지 1년이 지난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수성가한 분이셨다.
그 사람은 한국에서 살았기에, 한국에 나와 살기를 권유했다. 그에겐 결혼을 앞둔 딸 아이와 대학생 아들 둘이 있었다. 버거워 보였지만, 한번 실패한 결혼의 보상심리로 생각해 결혼을 결심했다.
1994년 5월 나는 27년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역이민을 오게 됐다. 다행히 남편과는 대화가 잘 통했다. 취미생활도 같았다. 골프와 스키를 같이 즐겼고,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즐겁게 사는 동안, 남편은 그 동안의 나의 상처를 모두 씻어주고 채워주었다.
우리 부부는 싸우고 좁히고 서로 노력하고 의지하여 잉꼬부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즐겁게 살았다. 그러던 중 유난히 스키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2000년 1월7일 용평 스키장에서 신나게 점프를 하는 순간, 잘못 넘어져 허리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난 척추 7·8번이 다 부러져 그 이후 꼼짝없이 누워서 대소변을 남편이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허리가 낫더라도 서있거나 누워서 지내야 한다는 말을 의사가 했지만, 남편의 지극한 간호로 기적적으로 완쾌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남편을 따라 사랑의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더 두텁고 깊어지는 사랑 가운데서, 주님은 질투의 신이라고 그랬던가(출애굽기 20장 5절). 2003년 1월3일 남편은 산악자전거를 타면서 휴대전화를 받던 중, 산에서 굴러 떨어져 만신창이가 돼, 4개월간의 투병생활 끝에 합병증으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예상치 못한 남편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원망과 항의로 오열했다. 예수님이 너무 원망스럽고 냉정하신 것 같아, 반항아처럼 주일을 지키지 않으며 오기를 부렸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남편과 함께 다닌 사랑의교회에서 제자반 교육을 받으며,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공부 가운데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게 됐다. 지금까지의 삶이 주님의 폭포수와 같은 은혜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나 같은 죄인을 기다리시고 기다리신 예수님을 알게 됐다. 상상하지도 못하는 은혜와 감격의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됐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모두가 천사 같고 예뻐 보이고 그런 마음이 폭포수처럼 항상 흘러내린다.
나머지 여생을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 세계선교전문학교(ETC) 과정을 졸업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평화의료재단(MPF)에 부총재로 세우셔서, 아시아의 헐벗고 굶주린 오지의 병원 사역에 열정을 쏟고 있다.
지난해 겨울 10번째 지역 라오스 오지에 병원이 건립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중앙아시아, 남아프리카 등 계속 병원을 지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님께서 맺어 주신 영적 아들 딸들이 있다. 몽골·샌프란시스코·댈러스 등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8남6녀의 자식이 있기에 난 누구보다 더 부자다.
지금도 교회 공동체인 포에버 평생교육원을 배우고 섬기고 있다. 또 중보기도 모임인 '700 기도용사'에 참석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 중이다.
부족하고 미련한 나를 이렇게 쓰시려고 깨뜨리시나 생각하며, 항상 그 깊은 뜻을 묵상하고 되뇌고 있다.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주님은 절대 주권자이심을 믿기에 주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를 쓰시기 때문에 난 크리스천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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