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엘러스(Bunker, Annie Ellers, 房巨夫人)는 미국 미시건주 버오크에서 1860년 8월 31일 장로교회 목사의 딸로 출생하였다.
1881년 일리노이 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페르시아 선교사로 갈 계획으로 보스턴 의과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으로 와 달라는 알렌(H. N. Allen, 安連)의 요청과 한국정부의 초청에 의하여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그는 다음 해(1887년, 27세 때) 미국에서 함께 내한한 육영공원 교사 D. A.벙커와 결혼했다. 한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봉직하면서 제중원 의사, 명성황후 시의(侍醫), 정신여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6년 은퇴하여 귀국했다. 그 후 다시 내한하였다가, 1938년 10월 8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다-12)에 안장되었다.
◇ 제중원 의사와 통정대부 벼슬로 명성황후 시의에 임명
애니 엘러스 선교사는 가냘픈 여성으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제중원 의사로 열심히 봉직하여, 왕실과 고관들의 환영을 받았다. 여성 환자 치료와 간호에 주력하고, 고종황제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던 알렌 의사와 협력하며, 황후의 옥체를 진료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業精至善 施療衆民)로 그는 정3품 벼슬에 해당하는 당상계 통정대부(堂上階 通政大夫)의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명성황후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그의 글인 ‘閔妃와 西醫’라는 제목에서는 “나는 1888년 3월부터 여관(女官)의 직임을 띠고 나의 본직인 의사로서 황후의 옥체를 시위(侍衛)하게 된 것을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라 하였다.
그는 왕비에게는 손을 대고 진맥(診脈)도 못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진찰했다. 이 같은 과정은 1895년 한국학연구지 에 ‘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 제목의 글에 자세히 발표되었다.
전택부는 “알렌은 고종황제를 진찰한 적은 있으나, 황후의 가슴에다 청진기를 댈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대궐에서 기별이 오기를, 황후께서 탈이 났으니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알렌은 그 증세를 물은 다음 짐작해서 약을 지어 보냈다.
며칠 뒤 또 기별이 나오기를 조금도 차도가 없으니 다른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또 병세를 들은 뒤에 짐작해서 다른 처방으로 약을 지어 보냈다. 또 며칠 뒤에 내시가 나와 약효가 전혀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느냐?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알렌은 용기를 내어 황후를 직접 진찰하기 전에는 약효를 낼 수 없으니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엘러스가 궁중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진찰했다”는 것이다.
당시 왕비를 진찰하려면 손목에 실을 감아 병풍 뒤로 연결하여 진맥(診脈)하던 시절에, 엘러스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으로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청진기를 들이댔다. 1886년 9월 14일은 황후가 현대 의술에 의한 최초의 진단을 시도한 날이라 할 수 있다.
◇ 교육자로 정신 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
언더우드(Underwood, H. G, 元杜尤)가 설립한 경신(儆新)학교와 엘러스가 세운 정신(貞信)여학교는 한국 장로교단 최초의 남매 학교이다. 경신사(고춘섭 편저)에 따르면 “1887년 언더우드학당에 고아 몇 명이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목욕을 시킨 다음 새 바지저고리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빗어 땋아 주었다. 그런데 목욕을 시키는 과정에서, 한 아이가 여자임을 발견하고 언더우드는 기겁을 했다. 곧바로 제중원 여의사 엘러스가 거주하는 옆집으로 보내 정동여학당의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정신백년사(박광현 편저)’에는, “1887년 6월 엘러스 선교사는 정동 소재의 제중원 사택에서 한명의 고아(5살, 정례)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얼마 안가서 그해 겨울에는 3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정동여학당의 시초이고 이 자리가 바로 현재의 정동 1번지이다.”라 했다.
그는 정신여학교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교장으로 1888년 9월까지 봉직했다. 그 후 남편 벙커가 배재학당으로 옮기게 되어,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한국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창설에 협력하여 5천엔의 창립기금을 헌금하기도 했다.
1926년, 40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하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중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안고 재차 내한했다.
1937년 다시 내한하여 소래에 머물다가 1938년 10월 8일 서울 정동 그레이 하우스에서 별세하여, 10월 1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경성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유골은 남편이 묻혀있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라는 정신 학교의 교육 이념이 새겨져 있다.
<양화진 선교회> 필자 : 신호철 양화진선교회장(서교동교회 시무장로),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5-01-10 (134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