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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 120년-이광순

영국신사77 2008. 6. 8. 12:46

한국선교 120년

 

                          이광순


  한반도에 개신교 선교사가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해는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84년 갑신년 9월이었다. 호레이스 알렌 의사가 바로 그 첫 선교사이다.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는 모두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에 있었다.

 

  알렌 의사는 중국 선교사로 이미 파송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교부가 미국에서 보내기로 한 선교사들보다 한발 앞서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알렌 의사에 이어서 개신교 목사로서는 이듬해인 1885년 4월에 미국 북장로교의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미국 북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 목사 부부 역시 언더우드 목사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했지만,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갑신정변의 여파로 사회 분위기가 불온한 와중에, 건강이 좋지 않은 아펜젤러 부인이 서울에 오는 것을 말리는 의견이 미국 공사관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1885년 5월에 스크랜턴 의사와 그 가족들, 헤론 의사, 나중에 7월에는 아펜젤러 가족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1884년과 1885년에 걸쳐서 한국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벌써 120년이나 되었다.

 

  한국 선교는 초기에 미국 선교사들을 비롯해서 호주, 캐나다, 영국 선교사들의 사명감과 열정 그리고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은 언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항상 불안하게 했다. 금교(禁敎) 조치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공개적인 전도가 허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교를 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참혹한 박해에 대한 기억과 공포는 천주교와는 다르다는 점을 설파해야 할 정도였다. 관습과 문화가 전혀 다르다는 것도 큰 걸림돌이었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뚜렷해서, 양반층에게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여성, 특히 지체가 높은 집안의 여성은 집안에만 있었고, 남녀가 유별해서 남자 선교사들이 여성을 만나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식은 맞지 않았고, 온돌과 좌식 생활에 생소했던 선교사들로는 일상 생활 자체가 고통이고 고역이었다. 위생 상태는 불결하기 짝이 없었고, 언제 풍토병과 전염병에 걸려서 목숨을 잃을 지 몰랐다.

 

  언어는 마귀가 선교사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만들어낸 듯할 정도로 어려웠다. 통역관의 통역은 믿을 수 없었고, 그렇지만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 땅에 복음을 전했다.

 

  이 글은 한국 선교 120년을 통사적으로 개관할 의도는 없다. 한국 선교 120년은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선교 사역에 빚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초기의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 그 중에서도 그들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역들을 조명함으로써, 그들이 한국 선교에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들을 부각시킬 것이다.

 

  사실 한국 선교 120년 역사에서 선교사들의 역할과 기여가 중대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한국 기독교인들의 선교 노력 역시 중요했다. 말하자면 한국 선교 120년의 업적이 전적으로 선교사들에게만 돌릴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크나큰 희생과 헌신이 있었지만, 한국 기독교인들의 자립성과 자주성 그리고 자발성이 한국 교회가 오늘과 같은 발전을 이룩한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한국 선교 120년은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선교사들의 기여분만 논의할 것이다. 대신 후속 논문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의 열정적인 전도와 헌신을 분석할 것이다. 예컨대, 날 연보와 전도를 세례의 전제 조건으로 삼은 것과 같은 한국 기독교인만의 특이한 전도 관행들을 논할 것이다.


                                                                 II


  초기 선교사들은 위험 상황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알렌 의사는 1884년 9월에 한국에 들어왔지만, 

동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까지 이렇다할 선교 사역을 펼치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렌 의사는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이 심한 자상을 입은 채 독일인 뮐렌도르프 집에 숨어 있을 때 치료를 했으며 이듬 해 봄에는 완쾌시켰다. 그 일로 인해 알렌 선교사는 서양 의술을 펴는 의사로서 조정에 알려졌으며, 왕과 왕후의 돈독한 신임을 얻었다. 알렌 선교사는 하나님의 섭리였는지는 모르지만, 정변으로 유발된 기회를 잡는데 성공했다. 만약 그가 민영익의 치료에 실패를 했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며 한국 선교의 문은 굳게 닫혔을 것이다. 첫 선교사부터 생명을 담보한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를 했다.

 

  이듬해인 1885년에도 위험 상황은 계속되었다. 서울에 갓 도착한 언더우드 목사는 뉴욕 선교부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곳 사정은 조용하긴 하지만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협상 결과가 어떠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불안해하고 혼돈스러워하고 있으며,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좋은 것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분위기가 워낙 불안해서 미국 기선 오시피 호의 장교들은 나가사키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냥 머무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위험 요소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 상황입니다.1)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더우드와 함께 나가사키에서 제물포에 도착했던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와 같이 불안정한 정치 사회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속속 내한했다.

 

  1885년 5월에 스크랜튼 의사 가족과 헤론 의사 부부가 왔으며, 여름에는 아펜젤러 목사 가족도 선교사 공동체에 합류했다. 120년 전의 한국이라는 선교지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 이래 한국의 정치 상황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계속되는 위기와 위험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내적으로 대원군과 왕후 간의 권력 다툼이 정정을 불안정하게 했을 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피폐를 가속시켰다. 외적으로는 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일본에 의해 왕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며, 왕이 궁궐을 탈출해서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위기와 위험 상황이 연이었다.

 

  결국에는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연달아  일어났다. 특히 전쟁은 한반도 전역을 황폐화시켰다. 청일전쟁과 그로 인한 전염병, 특히 콜레라의 창궐로 평양성 안팎에는 시체들이 태양 볕에 썩고 있을 정도로 참혹했다.2)

 

  한국이라는 선교지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의 열정과 사명감으로 버티었다. 선교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학혁명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또 청일전쟁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평양에서 마펫 목사는 선교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다:


   정치적인 혼란과 저희 사역의 관계에 대해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한국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때때로 혁명과 정치적 변화에 대한 소문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진정될 때까지 우리 선교부의 사역을 중단하고 기다린다면, 이 세대의 한국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거의 갖지 못한 채 죽어갈 것입니다. 누가 정권을 잡든지 상관없이, 저희는 이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와 있습니다.... 물론 러시아가 언젠가 한국을 점령하고 저희 모두를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기회가 열려있는 동안에 복음을 더 널리 전할뿐입니다.3)


  러시아가 한국을 점령해도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은 제국주의의 각축전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도만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에 보면 무책임한 것일 수 있다. 한국인이야 제국주의의 희생이 되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 선교신학에서는 선교 현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복음 전도에만 열중하는 것이 통전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선교사들에게는 한국에서 쫓겨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정치에 개입해서 추방을 당하거나 금교조치에 걸리는 것을 조심했다.


                                                                      III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사회 불안만이 아니었다.

 

  게일 선교사는 한국에서 마주치는 선교의 어려움을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4)

 

    첫째는 온돌방에 앉아야 하는 것, 즉 서양인들의 입식 생활과는 달리 한국인의 온돌방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대화를 하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뜨거운 온돌방에서 자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온돌방이 오븐처럼 달구어져서 거기서 자는 것은 빵처럼 구워진다고 표현했다.

 

   셋째는 음식인데, 쌀밥과 소금에 절인 배추와 무, 구운 생선과 고추장과 같은 것은 냄새도 지독할 뿐 아니라 서양 음식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것이었다.

 

   넷째는 사람들인데, 방안에 가득 모인 사람들은 역겨운 숨을 내쉬면서 쓸데없는 질문들을 해대고 무례하게 팔씨름을 하자거나 모자를 써보는 등으로 정신을 어지럽혔다.

 

   다섯째는 벌레와 해충 그리고 병균들이다.

 

   여섯째는 질병과 죽음이다. 천연두나 콜레라, 발진티푸스 등의 질병의 위험이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었으며,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지막의 일곱째는 언어이다. 짧은 한국말 실력으로 수다를 떨어야 하는데, 어린아이나 바보가 된 느낌이 들고 그로 인한 실수는 좌절감과 수치감으로 자신을 괴롭힌다.

 

  이 일곱 가지는 게일 선교사가 실제로 선교지 한국에서 몸으로 겪은 어려움이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고 실감이 난다.   

 

  이 일곱 가지는 크게 세 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다.

 

   하나는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적응의 어려움이며,

   다른 하나는 건강을 위협하는 질병과 그에 따른 죽음의 공포,

   마지막으로 언어의 문제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의 문화에 대한 적응 문제는 선교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인 반면에, 나머지 두 가지는 고질적으로 괴롭힌 문제였다.

 

  이질적인 문화 중에는 주거 문제와 음식이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선교지에 오자마자 서구식의 집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비좁고 비위생적인 한옥에서 지내야 했다.

 

  또한 고국에서 식료품들을 모두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나는 식재료 일부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또 불편하고 불결한 환경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을 걱정했다.5) 주거와 음식에 관한 불편과 어려움에 관한 호소가 선교사들의 글이나 편지들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것이 선교지에서 부딪히는 첫 번째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러한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극복되었다. 큰 한옥을 사서 서양식으로 개조하기도 하고, 나중에 새 건물을 짓기도 함으로써 주거 문제는 미흡하나마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음식 역시 고국에서 보내오거나 중국이나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것을 구입할 수 있었다. 값이 상당히 비싸고 또 입수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순회 전도 여행을 할 때가 문제였다. 숙소는 주막이나 또는 관아의 손님방이나 민가 등을 이용했기 때문에, 온돌에 익숙하지 않은 선교사들에게 잠자리는 고역스러운 것이었다. 게일의 표현처럼, 잠자리는 오븐에서 구워지는 느낌이었으며, 좁은 방안에서 빼곡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역겨운 숨을 맡으면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몇 시간이고 있어야 하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렇지만 마펫 목사와 같이 순회 전도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한국 음식과 한국식의 주거 양식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 반면에 도시에 주로 머물렀던 선교사들은 적응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불편함에 대한 불평 또한 많았다.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릴리아스 언더우드 여사가 신혼 여행으로 관서와 관북 지방을 여행했을 때는 짐꾼들이 간이침대를 지고 따라다녔는데, 이와 같이 잠자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순회 전도 여행 중의 선교사들은 한국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렇게 했다. 그렇지만 여행 중에도 휴대할 수 있는 식료품이나 필요한 기호 식품, 예컨대 차와 설탕 또는 커피와 같은 것은 가지고 다녔다. 예컨대 휘트모어 선교사는 마펫 부인에게서 커피 그라인더를 빌려서 여행 동안에 쓰고 돌려주었다.6) 여행 중에도 커피를 갈아 마셨다는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 중에서 한국 문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려고 했던 이는  캐나다에서 온 매켄지(W. J. McKenzie) 선교사이다. 그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에서 일했는데, 서울을 떠나 오지에서 마을 사람들과 같은 오두막집(다른 선교사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서 기거하면서 “조선의 음식”을 먹었다.7) 나중에 더 상세하게 기술할 것이지만 그는 한국인과 꼭 같은 생활을 하면서 선교에 열중한 나머지, 과로로 쓰러져 불행히도 일찍 순직했다.

 

  맥캔지 선교사의 경우에도 그가 서양 식료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서울의 선교사들이 크리스마스에 집에서 만든 빵, 건포도 케이크, 과일 통조림과 야채, 차와 우유와 설탕을 넣은 상자를 보냈다고 한다.8) 마펫 부인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그녀의 생일날에 선교사 가족들이 모여서 즐겁게 놀면서 “아이스크림과 멋있게 포장되어 있는 케이크도” 먹었다.9)  선교사들 중에는 서양 야채를 길러서 먹기도 하고 딸기와 같은 것을 재배하기도 했다. 이처럼 음식 문제는 선교사들이 불편을 겪기는 했지만 고국의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의 주식은 쌀밥이 아니라 비싼 밀가루 음식이었다. 

 

  선교사들은 외국인 거주 지역에 따로 살았으며, 한국인들에 비해서는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들이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거하던 세련된 사람들”이었다거나, 선교사 거주지를 “언덕 위 도시”로 비판을 하기도 한다.10) 그렇다고 해서 선교사들 모두가 외국인 거주지에 사는 것을 달가워한 것은 아니다. 외국인 거주지에서는 한국인, 그중에서도 하층민과의 접촉이 어렵기 때문에 사역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곳 외국인 거주지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저희 사역을 방해하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 대부분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습니다. 게일 씨와 베어드 씨 그리고 저는 서울에 배치되더라도 이 외국인 거주지에 머무르는 것은 반대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11)

 

  선교사들은 주거와 음식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것이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들의 선교 열정과 사명감을 꺾은 것은 아니었다.


                                                                      IV


  초기 선교사들이 사역에서 좌절한 것은 언어 문제와 부딪혔을 때였다.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와 같은 최초의 선교사들은 이미 일본에서 한국어 공부를 했다. 선교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다. 특히 목사 선교사들은 설교를 하고 대화를 통해 설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에 능통할 필요가 더욱 절실하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잘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선교사들은 대체로 한국어 선생을 고용했으며, 선임 선교사가 나중에 온 선교사에게 한국어 교습을 하기도 했다. 한국어 시험을 실시했는데, 일정 기간 내에 통과하지 못하면 제재가 가해졌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시험에 대비해서 어학 공부에 골몰했다. 시험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12) 한국어가 배우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게일은 언어가 선교의 어려움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으며, 그래함 리 목사는 한국어가 얼마나 배우기 어려운 언어인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람들은 마귀가 중국 선교를 방해하기 위해서 중국어를 고안해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한국어는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것 같으며 그 마귀의 마지막 걸작품이라고 여겨집니다.”13)

 

  한국어는 선교의 걸림돌이 되었지만, 한글은 오히려 선교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게일은 한글이 한국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담고 있다고 찬사를 했다.

 

  “한글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제일 간단하다.... 그것이 너무 쉬웠기 때문에 결코 쓰여지지도 않고 멸시만 당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의해 그것은 신약 성서와 다른 기독교 서적을 위해 준비된 채 자기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4)

 

  한글은 배우기 쉬웠기 때문에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읽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흔히 신약성서가 여인의 허리끈에 매여 있다. 유쾌한 여행길에 있는 등산가의 짐꾸러미 속에, 작은 마을에 있는 가정의 벽장에, 그리고 거실의 선반에 쌓여있는 것은 예수를 말하고 구원해 줄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언문으로 씌어진 이 책들이다.”15)

 

  게일은 이어서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한달 남짓으로 언문을 깨우쳐서 성경을 읽게 된다고 썼다. 이와 같이 한글은 익히기 쉬웠다는 것이 초기 한국 선교를 매우 용이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한글은 초기 한국 선교에 또 다른 방식으로 기여했다.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같이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영국 성공회 소속의 존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 그리고 이수정의 번역본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쓰기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번역도 엉망이었고 한문 단어 투성이에다 인쇄 상태도 조잡했다.16)

 

  초기 선교사들은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력해서 번역 사업을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용어들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용어들을 정리하고 이른바 기독교 단어집을 만드는 성과를 올렸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이라는 용어이다.

 

  당시에 영어의 대문자 신(God)을 가톨릭에서는 천주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천주가 기독교의 신과 개념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가톨릭교회가 선점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도 탐탁하지 않았다. 거론된 용어로는 신이 있었는데, 귀신의 의미를 강하게 띠고 있어서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이라는 단어를 쓰면 “예수님이 귀신의 아들이라는 인상을 갖게 할 우려가” 있었다.17) 그 외에도 상제와 하늘님 등이 토론되고, 아예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오랜 토론 끝에 새로운 용어로 고안해낸 것이 유일신의 의미가 담겨 있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라는 용어의 고안은 성경 번역과정에서 일구어낸 업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에 대한 명칭과 개념의 정의 없이는 복음 전도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리나 신학을 정립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번역은 성경에 쓰여 있는 단어와 기독교 용어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용어와 같이 기독교 신학과 교리의 핵심이 되는 것들을 한국어로 고안을 해내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언더우드가 말하는 일종의 “성경 번역의 신학”을 정립하는 일이었다.18) 초기 선교사들은 한글 맞춤법을 만들고 단어들을 정리하고 사전을 만들어 가면서 성경 번역을 했다. 그러한 번역 사역은 교회적으로 신학과 교리를 세울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일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인들이 읽기 쉬운 성경책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선교의 큰 업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번역 사역은 한글이 언문으로 천시를 당하던 시대에 맞춤법과 문법 그리고 사전을 만들어냄으로써 한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V


  선교사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질병과 그로 인한 죽음이었다. 열병, 설사, 식중독, 몸살은 흔한 것이었으며, 전염병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대체로 질병에서 회복되었지만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최초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존 헤론 의사의 갑작스런 죽음은 선교사 공동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헤론 의사보다 앞서서 같은 해(1890년)에 호주 장로교 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 목사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서울 성안에는 묘지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서양인이 죽었을 경우에 제물포 근처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7월 무더위에 헤론 박사 유해를 가마에 싣고 제물포까지 운반하는 것은 또 다른 슬픔이자 아픔이었다. 성밖에 장지를 내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를 가지게 되었다. 헤론 박사는 그래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첫 선교사였다.

 

  감리교의 윌리엄 제임스 홀 박사는 청일전쟁을 용하게 피했지만 발진티푸스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는 후일에 한국 여성 의료 선교와 결핵 환자를 위한 치료와 선교로 한국 선교에 크게 기여한 로제타 셔우드 홀 의사의 남편이었는데, 장로교의 마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 선교를 개척한 선교사이다. 청일전쟁으로 인해 평양을 비롯해서 북부 지방에는 시체들이 곳곳에 버려져 있었고 물은 오염되어 있었다. 발진티푸스와 콜레라와 같은 설사병과 열병이 창궐했는데, 홀 박사가 그 희생이 된 것이다.

 

  앞서 기술했듯이, 매켄지 목사는 황해도 소래로 가서 한국인과 같은 음식을 먹고 누추한 한옥에서 살며 함께 교회를 짓고 노동을 했다. 그는 한국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함께 동고동락한 선교사였다. 그의 헌신적인 사랑과 몸을 아끼지 않은 선교 사역은 그를 과로와 병마에 쓰러지게 했다. 그는 1895년 여름에 적절한 치료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둘러싸여서 마지막 숨을 쉬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선교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 충격으로 인해 이어지는 콜레라와 전염병 퇴치에 의료 선교사들 뿐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목사들도 전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했다.19) 그로 인해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에게 신뢰를 얻고 선교의 큰 진척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1902년 6월에 최초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아펜젤러 목사를 선박 침몰 사고로 잃은 것은 한국 선교 120년에서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는 17년이나 척박한 선교지 한국에서 여러 가지 선교 사역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성경 번역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배재학당을 설립해서 이승만 등의 개화적인 인재들을 양성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그리고 만민공동회에까지 음으로 양으로 관여하면서, 한국 사회의 개화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했다.

 

  위에 기술한 사례들 외에도 선교사들의 희생은 많았다. 특히 내한 선교사들의 수가 증가하는 대신에 위생 환경이 향상되거나 일 부담이 경감되지 않았기 때문에 질병에 걸리는 수도 많았으며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례도 상당 수 되었다.

 

  1897년에 제이콥슨 양이 죽었으며,20) 1900년 봄에는 다니엘 기포드 선교사 부부가 차례로 사망했다. 기포드 부인은 메리 해이든으로 1888년에 내한했다가 기포드 목사와 결혼했다. 렉 선교사는 순회 전도 여행 중에 강계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으며, 같이 있던 웰즈 의사나 휘트모어 선교사가 같은 병에 걸리지 않았는가 걱정을 하고 있었다.21)

 

  선교사 부인이나 아이가 목숨을 잃는 경우는 실제로 상당수 될 것이지만 기록상으로는 쉽게 확인이 되지 않는다. 선교 본부에 보내는 편지들에는 공식적인 사안들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선교사의 죽음은 보고가 되지만 그 가족의 사망은 제대로 보고가 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사적인 편지에 가족을 잃은 슬픔이 적혀 있지만 입수할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다. 호주의 맥케이 선교사가 아내를 잃고 심하게 앓다가 귀국했다는 보고가 있으며,22) 그래함 리 목사가 아들, 레이몬드를 잃은 슬픔을 부모님께 편지로 쓴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23)

 

  내한 선교사들은 단기간 체류한 이들도 많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10년 또는 수십년 아니면 평생을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이 의외로 많다. 여성 선교사들 중에서 독신으로 20대에 한국에 와서 평생을 선교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족 단위 선교사들의 경우에도 평생을 한국에서 보낸 이들이 손을 꼽으면 상당수 된다.

 

  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서 한국 선교사로 사역한 선교사 집안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보기로는 최초로 내한한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을 들 수 있다. 언더우드 가족이 올해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났으니까 120년을 한국에서 선교한 셈이다. 이와 같이 한국 선교 120년은 선교사들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선교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자 친구인 샘 마펫(마삼락) 목사에게서 들은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의 끝을 맺겠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마펫 목사네는 평양에 있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살 정도였고 아래 남자 동생이 있었다. 그 즈음 몇날 며칠을 바깥은 소란했다. 하루 종일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부모님들께서는 형제들을 자기들 방에 들어가게 하고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잠을 자라고 했다. 얼마 있다가 바깥이 시끄러워지면서 일본 순사들의 쿵쾅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철거덩거리는 총검 소리가 방밖에서 들려왔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 방에 누가 있어?”하면서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어린 마펫 목사와 동생은 이불 속에 숨어있다가 눈과 머리를 빼꼼이 내밀고 순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슬그머니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라고 말했다. 사실 형제는 대한 독립 만세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냥 종일 그 소리를 들었으니까 따라했을 뿐이었다. 일본 순사들은 어이없어 하면서 문을 꽝 닫고 나갔다.

 

  마펫 가족은 그 시각으로 24시간 안에 한국을 떠날 것을 명령받았다. 손으로 들고 갈 수 있는 짐만 챙겨 갈 수밖에 있었다. 그렇게 그 가족은 한국 땅에서 추방을 당했으며, 그 후 마펫(마포삼열) 목사는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물론 마삼락 목사를 비롯해서 동생들 역시 한국 선교사로 사역했다.

 

  이와 같이 한국 선교 120년은 목숨과 건강을 담보하고, 또 일제 하에서는 추방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선교 사역을 해온 선교사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참고문헌


게일, J. S. Korea in Transition. 신복룡 역. 『전환기의 조선』. 서울: 집문당, 1999[1909].

Moffett, S. A.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 편지(1890-1904)』. 김인수 역.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0.

Underwood, H. G.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 편지(1885-1916)』.  김인수 역.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2.

Underwood, 릴리아스.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 신복룡·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 조선』. 서울: 집문당, 1999.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1884-1910』.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임희국.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이해.” 『선교와 신학』 제13집 (2004.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