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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희수교수의 세계문화기행 - 페르세폴리스

영국신사77 2008. 5. 9. 14:40

[이란] 이희수교수의 세계문화기행 - 페르세폴리스
2005.09.10 22:52
http://tong.nate.com/travel/4447579

 

[이희수교수의 세계문화기행]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2500여 년 전에 건설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다. 인도·아리안계인 ‘파르스’족의 아케메네스 가문이 이룬 국가라 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두 시간을 날면 고대 도시 시라즈에 도착하고, 다시 자동차로 동쪽으로 한 시간을 달리면 ‘타크트에 잠시드’에 도착한다. 페르세폴리스의 현재 지명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셀 수 없는 열주와 초석, 궁전 터와 성벽 계단, 건물의 잔해들, 궁전의 규모라기보다는 궁성 대도시였다. 고도 1500m의 황량한 평원에 끝없이 펼쳐지는 폐허의 잔해에 묻히고 잊혀진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역사의 상처마저 풍화되어 보는 이의 가슴을 친다.
 
 페르시아는 고대 아시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힘으로 서양을 실어 날랐던 알렉산더의 도도한 물결에 정신적 가르침을 준 마지막 스승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바로 그 동양적 정신의 심장부였다.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완성은 그 뒤 100년이 지난 뒤였다. 세계 정부가 있던 곳이며, 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 중앙 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 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축제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날마다 계속 되었다.
 
 그러나 페르세폴리스의 운명은 그렇게 길지 못했다. 기원전 330년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알렉산더는 이 놀라운 아시아의 번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이렇게 페르세폴리스는 182년만에 사라지고, 2260년 동안 망각 속에 있었다.
 
 1931년부터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 고고학 팀이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페르세폴리스의 역사적 의미가 되살아났다.
 페르세폴리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아파다나궁이다. 왕들의 대접견장이었던 이 건물은 다리우스 대제 때 시작하여 크세르크세스 왕 때 완성되었다. 지금은 72개의 기둥 중에 13개만 남아 있다.
 
 기둥과 벽면에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적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조그맣게 새겨진 외국 사신들이 손에 진상품을 가득 들고 커다랗게 묘사된 페르시아 왕들 앞에 서 있는 조각은 정말 사실감을 준다. 사신들의 공손한 표정이며 왕의 근엄한 태도, 날리는 옷자락에서 공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의 몸부림까지 역동적인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가 전개된다. 어떻게 돌을 쪼아 저토록 선연하고 감동 어린 조각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항상 그러하듯이 수천 년 전의 한 역사 유물에서 인간은 비로소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페르세폴리스 건물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화려한 건물은 크세르크세스궁이었다. 19.42m 높이의 100개의 열주로 꾸며졌으나, 이제 몇 기둥만이 그 흔적을 전해 줄 뿐이다.
 
 입구의 대문을 받치는 두 개의 큰 기둥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황소가 조각되어 있다. 11m 높이의 대문 위에는 아람어와 아시리아어, 페르시아어로 각각 ‘전세계의 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의 기둥마다 쐐기 문자로 새겨진 역사가 숨쉬고 있다.
 
 왕은 주로 세 가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불을 모신 신전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 또는 걷고 있는 모습들이다. 부조의 양식들은 아시리아의 니네베 조각 양식을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약간의 차이도 보인다. 권력과 신분에 따라 인물조각의 크기가 다르다. 커다란 왕의 위엄 앞에 보일락 말락 하는 이름없는 백성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특히 옷자락의 묘사에서 니네베 양식은 옷이 사람 몸에 찰싹 들러붙어 있으나, 이곳 페르세폴리스 양식은 옷이 펄럭펄럭 날리고 있다. 최고의 예술적인 조각 기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신전은 불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모셨다. 빛과 어둠, 선과 악이 엮어 내는 페르시아 사람들의 이원론적인 민간 신앙이 조로아스터교로 성장했다. 그리고 유대교에 직접 영향을 주어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종교사 이야기다.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의 창건자인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을 무사히 이스라엘로 돌려 보냈다. 나아가 재정 지원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는 유대인 지도자에게도 좀처럼 부여하지 않았던 각별한 존경을 키루스에게 표하고 있다. 신과 악마의 대결, 천국의 보상과 지옥의 응징 개념 등이 바빌론 유수 이후에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더의 광풍에 견뎌 낸 세력은 없었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알렉산더는 전군을 풀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 카스피 해 연안까지 쫓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총독이자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베소스의 배반으로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온몸을 열 군데 이상 칼로 찔린 아시아의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한 병사의 눈에 발견된다. 포로로 잡힌 다리우스는 그 병사로부터 물 한 모금을 받아 마신 뒤 조용히 눈을 감는다. 기원전 330년 7월 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대페르시아 제국도, 그 수도였던, 화려한 페르세폴리스도 이렇게 하여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 갔다.
 
 
                                      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 lee20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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