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구약시대 1-1)
지금부터는 성경에 나오는 헷 족속(힛타이트)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 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샀습니다. 거기에 자기 아내를 묻고, 후에는 자기도 묻히고 아들 이삭과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 족속이라고 성경에 여러번 나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힛타이트 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힛타이트 족속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때문에 성경이 허무맹랑한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힛타이트 족속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헷 족속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됨에 따라서 힛타이트 문명권이 규명되었는데, 위 그림를 보면 터키 지도가 있습니다. 붉은 색을 칠해 놓은 이곳이 힛타이트의 중심부 입니다.
힛타이트의 수도는 '핫투사'인데, 터키의 현재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핫투사를 수도로 해서 터키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비옥한 초생달) 전체를 지배하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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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편 그림은 지금의 터키 땅에 있는 힛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의 왕궁터입니다.
위 오른편 그림은 힛타이트인들의 신전의 모습입니다. 거대한 돌기둥에 돌사자 두 마리가 보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거대한 청동으로 된 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신전의 규모도 대단합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힛타이트인들이 짧은 시간동안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하게 된 비결이 무엇인지를 고고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바로 이것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 힛타이트의 전차
이것은 힛타이트의 전차입니다. 속도전에 능했고,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활을 쏘고 하니까 일반 민족들이 그 속도에 도저히 방어를 할 수가 없어서 힛타이트인들이 중동지역을 장악하게 된 것이지요. 힛타이트의 전차가 바로 그들 나라의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힛타이트의 전차가 얼마나 감명이 깊었는가 하니, 이것은 이집트의 왕들이 세운 비석입니다. 이집트의 역사 자랑을 잔뜩 해 놓고는 힛타이트의 전차를 그려놓았습니다. 힛타이트 군이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이집트를 침략해 왔으나, 그것을 막아냈다 하는 뜻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이집트가 패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의 기록만 이렇지, 고고학적 조사결과 이집트가 힛타이트에 점령되어 조공도 바치고 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힛타이트 족속은 전차 뿐만이 아니고 금, 은, 동 특히 철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사 책에도 최초의 철기 문화는 힛타이트 족속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나옵니다. 철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대단히 앞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금속공예는 예술적 수준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아름다운 사슴을 정교하게 조각한 술잔입니다.
그런데 힛타이트 족속이 남긴 기록은 역시 수메르 인들이 만든 설형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술과 전투력은 앞서 있었지만, 학문적인 면에서는 수메르인들의 것을 그대로 이어서 쓴 것입니다.
왼쪽 그림은 히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에서 발견된 유명한 비석인데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서로가 평화를 맺도록 하고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한 평화조약 문서입니다. 인류 역사로 볼 때 평화조약문으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그것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 있는데요, 바로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총회장에 들어가시면 오른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힛타이트의 하투사에서 발견된 최초의 평화조약문을 확대하여 동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힛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의 평화조약은 오래 가지 않고, 결국은 다시 전쟁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8. 에돔 족속-페트라
다음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에돔 족속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6장 8, 11절, 기타 여러 곳에 보면 에돔 족속이 있었고, 에돔 족속의 최초의 조상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에돔이라고도 불리었고, 세일 산이라는 곳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어떻게 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것이 성경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에서'라는 말이나 '에돔'이라는 말이나 모두 붉다는 말입니다. 에서가 털이 많고 붉게 생겼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일산 자체가 아주 붉은 산입니다. 그래서 에서도 자기 색과 같은 땅을 좋아해서 거기서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에돔 족속이라는 것도 성경에만 기록되어있었지 다른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천년간 성경이 허위라고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중동의 고고학적 발견이 붐을 일으킴에 따라서 세일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탐사하다가, 에돔 족속이라는 집단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다는 사실이 발굴되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집단 주거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색깔이 붉지 않습니까? 들어가는 입구는 이렇게 좁은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면은 안쪽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래서 이곳도 지금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 들어가면 전반적으로 붉은 바위로 된 협곡인데요, 그 바위를 뚫고 집도 짓고, 신전도 짓고, 무덤도 만들고 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여기에서 거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BC 3세기경에 에돔족속들이 동서양 무역사업을 활발히 행하여 굉장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나바티안 상인집단을 형성해 가지고, 동서양에서 본 안목으로 자기들 거주지에 투자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페트라 폴리스라든가 여러 가지 화려한 집들을 짓고 아주 잘 살았습니다(오른 쪽 그림).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달력에서도 많이 나오는 페트라 입니다. 이것의 건축구조는 보시는 바와 같이 어디서 돌을 가져다가 다듬어 만든 것이 아니고, 바위산을 파 들어가 만든 조각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 덩어리를 파서 그 속에서 생활한 것입니다. 조금만 실수해서 조각이 떨어지면 작품전체가 망가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나바티안 상인들이 거금을 투자해서 유명한 조각가들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왼쪽 사진은 에돔 족속의 왕이 살던 집이요, 무덤입니다. 야곱자손과 에서자손 사이의 투쟁이 계속 내려왔는데요, 그 중에서도 절정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 당시의 왕인 헤롯이 바로 에돔 족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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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족장들의 도시인 헤브론의 역사는 이집트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해발 950 m 의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하므로 시작되었으며 (창 13:18 ~ 33), 은 400세겔을 주고 막벨라 (Machpelah, 쌍굴) 의 동굴을 샀다 (창 23:16 ~ 18).
그리고 그곳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그리고 레아 등 모든 조상들의 무덤이 되었다.
한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12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내 정탐하게 한 곳이 바로 헤브론에 이르는 에스골 (포도송이) 골짜기였으며, 정탐 후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그들이 가지고 온 "포도 한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였다" (민 13:23).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헤브론의 포도와 과일은 유명하여, 포도의 경우 한 송이의 무게가 10 Kg 이상 나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맛도 매우 달다. 이 기사에서 성경은 "헤브론은 이집트의 소안보다 7년전에 세운 곳이다" (민 13:22)라는 토를 달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헤브론에서 일어나는데, 바로 다윗왕이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임명되어 (삼하 2:1 ~ 4), 7년 6개월동안 수도로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삼하 5:44).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도 헤브론은 여전히 유다의 중요한 요새였다. 이 사실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헤브론을 그의 혁명 기지로 삼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하 15:1 ~ 10).
헤브론에 관한 신약 성경에서의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헤롯 대왕 때에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 위에 거대한 건축을 함으로써 조상들의 무덤을 보호하는 일을 하여, 오늘까지 그가 쌓은 예루살렘 성전 벽과 더불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8세기 이후 아랍이 이 지역을 장악한 이래 족장들의 무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아랍인들이 관리하고 있어, 1967년 6일 전쟁이후 이 곳을 찾는 유대인들과 종종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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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000년 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깃도는 이집트와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 년 므깃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도시는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지 못할 만큼 강한 가나안의 요새였으며 (삿 1:27 ~ 28), 아마도 다윗에게 정복된 것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에 이르러 므깃도는 견고하게 수축되어 가장 강력한 북방 요새가 되었다 (왕상 9:15 ~ 19). 특히 솔로몬이 세운 마병장과 기병대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순사적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국제로를 장악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므깃도는 BC 923년에 이집트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합 왕에 의해 재건 되었다. BC 609년에 요시아 왕은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고 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왕하 23:28 ~ 30). 그후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17년 영국의 알렌비(Allenby)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므깃도였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곳에서 발굴된 마병장에는 말들의 고삐를 매어 놓았던 구멍이 뚫린 돌들이 말구유와 함께 늘어 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BC 869-850)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水路) 장치의 발견이다. 큰 통로가 바닥까지 내려 있고, 그 통로의 끝에서 바위 구멍을 뚫고 도시 밖의 샘으로부터 도시 내부로 끌어 들이도록 되어 있다. 밖의 샘 입구는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에서부터 비롯됐다(창32:28).그런데 엘, 즉 하나님과 싸웠다는 뜻의 이스라엘의 기원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민족이 약탈당해서 더 이상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졌다는 고대 이집트의 한 절망적인 비문에서부터 출발한다.
페트리의 이스라엘 석비
1896년 겨울 이집트 최대의 유적지 테베에서 한 파라오의 장례신전을 발굴하던 영국 출신의 이집트학자 페트리(W.F.Petrie)는 높이 3.2m,폭 1.6m에 달하는 검은 화강암 석비 하나를 발견했다.당시까지 이집트 지역의 발굴에서 파라오의 업적을 새긴 전승비와 기념비가 자주 출토되기 때문에 이 발견은 그리 대수로운 사건은 아니었다.하지만 모두 28줄에 달하는 비문의 내용을 해독하던 그는, 27번째 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더군다나 이 단어의 끝에는 민족을 의미하는 한정사가 붙어있어서, 특정한 민족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성서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이 최초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람세스2세의 아들 파라오 메르네프타의 전승비
이 비문을 기록한 주인공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열 세번째 아들인 메르네프타였다.부친이 거의 90세가 넘도록 67년간이나 통치했기 때문에, 메르네프타가 서기전 1210년쯤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이 넘어서였다.부친의 오랜 통치기간 중 그 위로 열 두명의 형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메르네프타는 모두 10년을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를 괴롭혔던 남쪽의 누비아와 서쪽의 리비아를 점령했고 북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평정했다.일명 '이스라엘 석비'로 불리는 메르네프타의 전승비는 바로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르네프타는 시적인 어조로 팔레스타인 정복사건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홉 활(원수) 중에서 아무도 고개를 드는 자가 없다.
이제 리비아는 폐허가 됐고 하티는 평정됐다.
가나안은 온갖 재난으로 약탈당했다.
아쉬켈론은 정복됐고 게제르는 사로잡혔으며 야노암은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의 자손은 더 이상 없다.후루(팔레스타인)는 이집트 때문에 과부가 됐다.메르네프타는 가나안 지역의 세 도시국가와 한 민족을 정복했다고 언급하는데, 아쉬켈론,게제르,야노암 등은 모두가 땅을 의미하는 접미사가 붙어 있어서 그들은 이미 정착한 도시국가 내지는 왕국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민족을 뜻하는 접미사가 붙어 있어서, 당시 이 민족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던 유목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비문을 통해서, 이미 서기전 1210년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막강했던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 민족을 물리친 사건을 그의 승전비에 기록할 만큼 위협적인 세력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당시까지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근거하여, 람세스라는 도시를 건설했던 람세스 2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여겼다.하지만 1896년에 발견된 이스라엘 석비에서 메르네프타가 이스라엘 민족을 무찔렀다는 언급 때문에, 그가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1:8)이라고 여겼다.더욱이 왕들의 계곡에 있는 메르네프타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서, 이상하게도 그의 미이라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하다 홍해에 빠져 죽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출14:28).하지만 1898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아멘호텝 2세의 무덤에서 무려 16기에 달하는 왕족의 미이라가 발견됐고 이 중에서 메르네프타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이 가설은 더 이상 신빙성이 없어졌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발견됐지만 당시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모습은 1840년대 니느웨에서 발견된 산헤립 왕궁 벽의 라키쉬 부조를 통해서였다.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메르네프타 석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민족에게 점령당하고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시켜 준 테베의 카르낙 신전 부조
하지만 페트리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석비를 발견한지 80년이 지난 1976년, 시카고 대학의 유르코(F.J.Yurco)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모습을 카르낙 신전 부조를 통해 확인했다고 발표했다.그의 발표는 니느웨 궁전의 부조보다 무려 500년이나 앞선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집트 테베의 카르낙 마을에는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을 모신 대신전이 있는데, 신전 마당의 한 외벽에 메르네프타가 가나안의 네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사실 이 부조는 당시까지 람세스 2세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됐지만, 왕의 이름을 자세히 분석한 유르코는 그의 아들 메르네프타의 전투장면이 추가로 삽입된 것을 확인했다.유르코는 ‘3200년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논문에서 메르네프타가 그의 비문에서 아쉬켈론, 게제르, 야노암, 이스라엘을 정복했다고 언급한대로, 실제로 신전 부조에서도 모두 네 가지 장면의 전투가 등장한다고 밝혔다.
비록 이 부분에서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민족과 전투하는 생생한 장면은, 서기 5세기쯤 로마인들이 근처에 세워진 한 오벨리스크를 로마로 운반하기 위해서 벽을 허무는 바람에 일부가 훼손됐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모습을 구체적으로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전투장면에서는 세 도시와는 달리 성벽을 지닌 도시가 나타나지 않는다.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서기전 1210년쯤 아직 도시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스라엘 용사들은 머리띠를 두루고 길다란 턱수염을 길렀으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은 것으로 나타난다.이들은 아쉬켈론, 게제르, 야노암 사람들과 복장과 생김새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원주민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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