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이 신화이거나 사람이 조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사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사실과 지명이 실제로 있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고학 (考古學 , archaeology)은 인간이 남긴 유적·유물과 같은 물질 증거와 그 상관관계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및 생활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시대와 성서와 연관된 지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입니다.
시대적 범위에서 성서 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서 시대, 즉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00)부터 신약시대인 서기 1세기까지의 고고학이 됩니다.
초기의 성서 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서의 여러가지 사건들의 역사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기 전에는, 현장답사를 통하여 주로 성서의 지명들을 확인하여 지도상에 표기하는 일종의 지리적 탐사작업이 수행되어졌습니다.
성서 고고학이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재구성된 역사 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서 고고학의 발굴의 기원은 1890년 페트리(F.M. Petrie)에 의한 텔 엘헤시(Tell el-Hesi) 발굴로 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30~50m 높이로 솟아 있는 유적 언덕의 발굴을 통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언덕을 아랍어로 '텔'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관측과 방어에 유리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고,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흙벽돌 건물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풍화작용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지는데,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무너진 잔해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새로운 흙벽돌과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짓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수천년동안 계속 되면서 주거지의 지반이 높아졌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유적 언덕인 '텔'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최초의 텔 발굴은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1년 행했는데,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전 재산을 투자하여 발굴했습니다. 소아시아에 위치한 히싸를릭크 언덕에서 새로운 도시 유적이 계속 발굴 되었는데, 모두 9개나 되는 층층히 쌓인 도시들 가운데 밑에서 여섯 번째 도시가 트로이로 추정되었습니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을 계기로 '주거층론'이 등장하였는데, 주거층이란 일정 기간 존속한 고대인들의 삶의 터전을 말하여, '주거층론'이란 그들 사이의 상관 관계를 규명하는 학문입니다.
페트리의 '토기연대 측정법' 고안
1890년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인 페트리는,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광야의 유적 언덕을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점령한 성경의 라기스라고 확신하고 발굴해 냄으로써, 주거층의 연대는 출토된 토기 모양으로 결정된다는 '토기연대 측정법'을 고안했습니다.
페트리의 토기 연대는 성서 고고학의 달력으로 인정되었는데, 누구든지 토기 아구리 한 조각만 있어도 그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나사렛 등의 주요 성지들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아 왔고, 중세시대부터 기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쉽게 찾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벧엘, 실로, 아이, 기브온, 므깃도 등 구약시대의 도시들과 가버나움, 벳세다, 거라사 등 신약시대의 마을들은 이미 오래 전에 폐허가 되어 있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한 장소를 찾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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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1794~1863년) 1969년 이후 발굴을 통해 솔로몬시대 요새로 건설된 텔 브엘세바의 모습이 밝혀졌다. |
이렇게 묻혀 있는 팔레스타인 성서 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당대 최고의 비교언어학적인 방법론으로 무장한 에드워드 로빈슨이란 미국인 목사에 의해 1838년 최초로 시도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성지를 순례했는데, 카이로를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 등정한 후 요단강 건너편으로 향한 다음 여리고성으로 들어 갔습니다.
로빈슨은 수주일동안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조그만 샘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르 에-세바라 불리는 베두인 마을에서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였던 브엘세바를 발견하였습니다.
로빈슨은 고대의 지명은 비록 그 지방 주민과 언어가 바뀌더라도 그 발음은 계속 보존된다고 믿어, 현지의 아람어 지명을 참고로 성경의 도시들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로빈슨은 하루 종일 길 없는 외딴 곳에 위치한 유적지들을 당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탐사하였습니다.
1838년 로빈슨은 예루살렘 북쪽의 유적지들을 탐사하여 아나타를 예레미아의 고향인 아나돗으로, 제바를 게바로, 묵크마스를 믹마스로, 엘-지브를 기브온으로, 그리고 베이틴을 야곱이 제단을 쌓았던 벧엘로 정확하게 일치시켰습니다.
* 목차 (구약시대 1-1)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런 말이 성경에는 기원전 1400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11장 31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인의 땅 우르라는 곳에 살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성경의 이 말씀을 한낱 전설과 같이 우습게 알고 수천년을 지나 왔습니다. 근대까지만해도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지금의 이라크 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짐으로써 정말 갈대아 우르지방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에 지도가 나와 있는데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주욱 유지되고, 지중해 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유지가 되지요.
메소(사이) 포타미아(강)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끝 부분, 바로 이 곳이 우르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1800년대 중반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연구를 하였습니다.
왼쪽 그림은 갈대아 우르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실제모습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水路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르의 지구랏트. B.C.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라트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임. 창세기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우르의 지구랏트는 꼭대기에 있는 난나(nanna) 신전의 받침대
역할을 하였다.
1929년 3월 17일자 뉴욕 타임스 에는 "우르의 발견, 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이라는 머릿기사가 실렸는데, 이는 대공황의 늪에서 실의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에게 성서적 복음주의의 희망을 주었습니다.
새로운 '아브라함'이란 제목이 갖는 의미는 아브라함이 유목민일 뿐만이 아니라, 당대 최고로 발달된 도시문명의 법과 문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박물관에서 고고학 연구를 한 '울리'라는 고고학자입니다. 그는 대영박물관과 펜실베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습니다.
위 사진의 B.C.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라트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으로 꼭대기에 있는 난나(nanna) 신전의 받침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우르 제3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도시의 수호신 난나를 모신 신전을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도시인 우르에서 믿음이 있던 아브라함을 광야로 불러낸 것입니다.
주택단지들을 파 들어가 보다가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사 책에 보면 인류 문명의 최초의 문명으로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메르 문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 파이프는 아니고,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습니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2005. 2. 26. 조선일보 기사 '대영박물관이 온다'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라크 남부의 고대유적도시 우르. 1920년대 발굴에서, 서기전 2600~2400년으로 추정되는 여왕 푸아비의 무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10명의 여인이 순장(殉葬)됐는데, 한 여인의 주변에서 금빛이 번쩍였습니다. 황소의 황금 가면이었습니다. 황금 황소는 목제 11현 수금(竪琴·하프의 일종)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발굴단장 L. 울리는 “순장된 한 여인의 손은 현이 있던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20세기 발굴 유물 중 최고품의 하나로 꼽히는 4500여년전 수메르문명의 수금은 이렇게 발굴됐습니다.
우르 지역에 살던 수메르 인들이 섬기던 신들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이 '이난나' 여신인데, 이것이 이난나 여신의 상입니다. 머리에 있는 이것은 뿔이 아니라 '달'(초생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흥분도 하고 땀도 흘리고 하면, 비도 많이 오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기간동안 모든 여성이 남성들과의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수 있게 하였으며, 신전은 공공연한 난교의 장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이난나 여신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으로 불렸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들어가면서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으며, 그리이스로 가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으며, 결국 로마로 가서 비너스가 되었습니다.
그 신이 다 그 신이고, 그 원조가 이난나 여신입니다. 의학적으로 성병을 베네리얼 디지즈(Venereal disease, VD)라 부르는데요, 이 베네리얼이란 말은 비너스의 형용사로서 비너스 여신으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비너스 여신이 관련된 병이라는 것이지요. 비너스 신전의 모든 성직자들은 여자들인데, 이 여사제들의 성은 완전개방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입니다. 쐐기라는 것은 곤충 중의 풀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Wedge)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요, 그 어순( 語順)이 서양이나 중동 사람 말이 아닌,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고요, --'가', --'을' 등의 토시를 붙여서 말을 구성하며,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뒤에 '님'자를 붙입니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지요. 그러한 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입니다. 예수님의 별명도 '샤론의 장미'이지요. 찬송가 89장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 인데요, 그것은 바로 무궁화 꽃의 학명과 동일합니다. 그 옛날 고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동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유래의 언어와 자취와 그들이 사랑한 꽃을 가져와 극동에 위치한 우리나라까지 대장정을 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메르인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라는 청년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밝힌 '길가메시 에픽'에 관한 기록입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만 순종을 하여, 하란까지만 가서 살다가 늙어서, 거기서 죽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가지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고 하셨지요.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해서(우르를 떠날때는 60세 가량) 그 하란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 때에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 것이지요. 그래서 갈대아 우르도 중요하지만, 이 하란이라는 지역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근래에 와서 이 하란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이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에벨 왕이 세운 '에블라 문명'
하란 지역은 지금의 시리아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 결과, 과거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수메르보다 몇 백년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그 문명을 세웠던 나라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에블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에블라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발굴된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을 분석한 결과 에블라 문명을 세운 왕의 이름이 '에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믿던 신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그 이름은 '야'였습니다. 아마도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현재의 하란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보시면 하란에 있었던 에블라의 대문명을 암시하는 족보가 있습니다. 여기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0장 21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나"
'히브리인'의 어원은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
'히브리인'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요? 어떤 잘못된 견해로 이집트에서 나온 문자를 토대로 '하비루'라는 노예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이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이 '히브리'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결국 노아의 아들 셈, 셈의 아들 아르박삿, 그 아들 셀라의 아들인 '에벨'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이 에벨이 큰 문명국가를 이루었고, 에블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통 셈족의 국가인데, 어떤 원인에 의해 수메르인에게 멸망당합니다. 강 아래쪽의 더 강성한 국가 수메르의 사르곤 왕이 에블라를 멸망시킨 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끌고 갔는데, 이들이 그곳에서 우상이나 만들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영적 분별력을 주셔서 새로운 땅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는 가다 말고 자기 조상 에벨이 세웠던 찬란했던 나라 '에블라'의 고토 하란 땅에 머무르다가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침내 가나안까지 들어갔습니다.
에벨 시절에 번성하던 에블라는 수메르인들이 강해지면서 망하게 되었고, 니므롯의 제국 때 바벨탑을 세우다가 세상이 나누이게 되었는데, 그때가 벨렉의 시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창세기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 그가 말하기를 "네 목숨을 위하여 도피하라. 네 뒤를 돌아보거나, 어떤 평지에도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그래야 소멸되지 않으리라." 하므로 천사들은 소돔성에서 머뭇거리는 롯에게 손을 잡아 이끌며 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소돔성을 빠져나와 산으로 대피하라고 하였습니다.
롯이 사위들을 설득했지만 사위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아내와 딸들도 반신반의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밤이 지나 날이 밝아 오고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천사들은 억지로 롯과 아내와 딸들의 손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창세기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이전에 하나님은 두 천사와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죄가 매우 중하므로 심판하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 50명이 있어도 소돔을 멸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의인이 50명뿐만이 아니라 10명이라도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의 죄악을 정탐하기 위해 온 두 천사는 소돔 성문에 앉아있던 롯의 간청으로 롯의 집에 초대받게 됩니다. 롯은 평소에 선량한 마음으로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이런 평소의 건실한 자세가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소돔 사람들은 잘생긴 남자 천사 두 명이 롯의 집에 들어가자 그들과 동성연예를 하기 위해 롯의 집으로 몰려들어 갔습니다.
두 천사를 내어 달라는 소돔 사람의 협박에 롯은 차라리 내 딸들을 범하라고 하였지만 소돔 사람들은 듣지 않고 롯을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습니다. 이에 두 천사들은 롯을 집 안으로 잡아당긴 후 문을 닫고, 문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롯에게 소돔의 죄가 크므로 주께서 성을 멸하실 것이니 가족들을 데리고 대피하라고 하였습니다.
롯이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렸으나 사위들은 롯이 농담하는 줄 알고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롯은 천사들의 강권으로 반신반의하면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소돔성을 빠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평지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해야 한다고 했지만, 롯은 도주하기 가까운 작은 성읍으로 대피하기를 원하니 천사가 허락하여 소알이란 성읍으로 대피하게 됩니다.
롯이 소알에 들어가 해가 중천에 솟았을 때 하나님은 소돔 위에 불과 유황을 비처럼 내리셔서 소돔과 고모라와 주변 평지의 모든 사람과 생물들을 뒤 엎으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쳐져서 소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어나 소돔지역을 살펴보니 그 지역은 화산재로 뒤덮혔고 연기가 피어 올랐습니다.
성경 속에서만 있는 줄 알았던 소돔의 멸망이야기가 성서 고고학에 의해 진실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사해(Dead Sea)는 물이 증발해 소금기만 남아 있는 곳으로 소돔지역으로 의심되었던 곳입니다.
1920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사해 북동쪽 고대 유적지인 툴레이랏 엘-기술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수천년 전에 건설된 신전과 형형색색의 벽화가 발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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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해변 |
사해 소금기둥 |
1965년에는 미국의 고고학자들이 사해 동편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밥 에드라'라고 불리는 고대도시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은 서기 전 2000년경에 수천명이 거주하던 대도시임이 밝혀졌습니다.
고대 사해 변 싯딤 골짜기에는 5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소돔과 고모라는 그 중에 있었습니다. 창세기 14장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다섯 왕이 싯딤 골짜기의 다섯 왕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해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같은 지명이 등장합니다.
1973년 이 지역 탐사에서 서기 전 3000년경에 설립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다섯 도시들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밥 에드라, 누메이라, 사피, 페이파, 카나지르로 이름 붙혀졌습니다.
다섯 도시의 특징은 모두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변에 건설되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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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논 골짜기 와디 무집 사해의 동쪽 지역은 넓은 집수 유역 덕분에 수량이 풍부한 여러 강들로부터 물이 흘러 들어옵니다. |
지금부터 바벨탑 사건에 얽힌 고고학을 살펴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1장 1-9절에 보시면,
"'온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서로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니...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니...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서 성이란 도시를 말합니다. 개정개역판 성경에 보시면 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성이 아니라 거대한 도시였던 것이지요. 이를 누가 주도했을까요? 바로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을 만든 사람 '니므롯' 입니다. 니므롯이 통일제국을 만든 뒤 여러 가지 이질적인 종족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쉽게 다스리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와 같이 도시부터 만든 이후에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이제 바벨탑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살펴 보겠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합니다. 그 신전중에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그라트가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역사를 가진 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미 지그라트는 오래된 탑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기록뿐 아니라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BC 500년 경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건축물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는데,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다고 합니다.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되는 것이지요. 63빌딩보다 더 높습니다. 수천년 전에 이러한 어마어마한 탑을 지은 것입니다. 다 지었으면 더 높았겠지만, 중간에 하나님이 공사를 중단시켜 그 정도로 그친 것이지요.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 많은 지구라트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구라트의 무너진 수많은 벽돌을 다시 쌓아서 복원하였습니다. 후세인이 관광목적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수천년전에 만들어진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둑(Marduk)'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이라크에 있는 많은 지구라트 중 하나의 모습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진의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작습니다.
고대 근동에 최고의 영웅이던 니므롯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창세기 10장에 상세히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함의 아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사냥꾼'이란 히브리어 뜻으로 볼 때 '전쟁을 즐기는 사냥꾼', '사람을 죽이는 사냥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이라는 이름의 뜻은 '님(높은 사람)' + '마랏(반역한다, 대항한다)'으로서 높은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반역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그(니므롯)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도시라)을 건축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아갔다'는 말은 쳐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앗수르는 셈의 자손들로 큰 민족이었으나, 니므롯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그 결과 동방으로 이주해서, 아사달에 도착해서 홍익인간의 기치를 내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동방으로 이주할 때 앗수르 족속만 온 것은 아니고, 야벳 족속의 일부와 함족속의 일부도 함께 이주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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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티그리스강 주변의 비옥한 땅에 고대도시 니므롯도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다른 고대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위 오른쪽 그림이 티그리스 강입니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고 있지요. 강 가에 자리잡은 이 도시가 바로 니므롯 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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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쪽은 그 니므롯 지역의 발굴현장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와서 발굴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니므롯 지역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장식들로 뒤덮힌 찬란한 고대도시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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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쪽 그림은 고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니므롯의 도성을 복원한 복원도입니다. 비록 바벨탑은 무너졌지만, 니므롯은 대제국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니므롯이 죽은 후 가족들에 의해서 니므롯이 마르둑 신으로 화했다고 조작되었습니다. 고대 갈대아인들이 세운 모든 나라의 왕들은 이 니므롯의 화신인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권위가 인정되었습니다.
위 오른쪽 그림 은 앗시리아의 살만엣셀 왕의 모습인데요,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고 왕권을 받는 모습입니다. 결국 니므롯은 사후에도 계속 갈대아 지역을 통치한 것입니다.
위 왼쪽 그림은 니므롯 지역의 신전 입구에서 발견된 거대한 인면수신의 조각입니다.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현재 이 조각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이 모두 망한 뒤에도 마케도니아를 거쳐 니므롯의 권위는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비석에도 니므롯이 최고의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위 중앙).
위 오른쪽 그림은 그리스 사람들이 세운 영웅의 만신전, 즉 팡테옹입니다. 여기서도 니므롯은 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는 서열이 한참 아래였습니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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