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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皇城新聞], 1898년 9월 5일 창간

영국신사77 2008. 4. 13. 22:31

 

   국운이 다해가던 1898년 9월 5일(광무 2),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 일간지 '황성신문 [皇城新聞]'이 창간되었다. 당시 주 2회 발행되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이라고 개제(改題)했다.

 

  사장은 남궁억(南宮檍), 총무는 나수연(羅壽淵)이 맡았고, 편집진은 박은식·장지연·신채호 등 면면히 한국학에 조예가 깊고 민족주의적 사관을 지닌 인사들로 구성되어, 애국적 논필로 풍운의 한말 정국을 매섭게 비판하였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었지만  한글은 한자에 토를 다는 정도로만 쓰여져, 당시 독립신문 이후 불기 시작한 순한글 제작 전통을 깨뜨림으로써, 한학 독자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 독자들은 한글 전용의 〈데국신문〉을 '암(雌)신문', 한문을 섞어 쓰는 〈황성신문〉을 '수(雄)신문'이라고 불렀다.

 타블로이드판 전체 4면으로, 1면은 논설, 2면은 국내외 기사 및 잡보, 3~4면은 광고로 꾸민 결과, 광고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

 

  남궁억이 사장으로 있던 4년간 2번이나 구속될 만큼, 황성신문은 배일(排日)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당국의 법적인 판결을 받아 최초의 필화사건을 일으킨 사람도 남궁억이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을 맞아 사장 장지연의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문제가 돼, 장지연은 70일간 구류를 살고 황성신문도 80여일간 정지당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 신문은 고종황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으며, 독자도 중류층 이상에 두었는데, 일본의 국권침탈로 1910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개제하여 발행하다가. 동년 9월 14일 제3470호로 폐간되었다.

 

                                 황성신문 [皇城新聞]

 

                        한말 1898년 9월 5일에 창간된 일간 신문.

〈황성신문〉(1898, 6. 23)

  주 2회 발행되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이라고 개제했다. 사장은 남궁억(南宮檍), 총무는 나수연(羅壽淵)이었고, 편집진은 한국학에 조예가 깊고 민족주의적 사관을 지닌 박은식·장지연·신채호 등이었다.

 

  창간사를 통해 한문을 이해하는 특권층만 대상으로 하지 않고 국한문을 써서 일반대중의 지식계발을 꾀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당대 독자들은 한글 전용의 〈제국신문〉을 '암(雌)신문', 한문을 섞어 쓰는 〈황성신문〉을 '수(雄)신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타블로이드판 전체 4면으로, 1면은 논설, 2면은 국내외 기사 및 잡보, 3~4면은 광고로 꾸민 결과, 광고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

 

  1900년 8월 8일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을 분할·점령하고자 논의했다는 내용을 다룬 〈청자(請者)나 절자(絶者)나〉라는 논설 때문에 남궁억이 구속되었는데, 이는 정치문제로 법적 판결을 받은 최초의 필화사건이었다.

 

  〈황성신문〉은 고표(股票) 500을 발행하여 창간한 합작회사로 경영되었으나 당시 신문사 수입의 주류인 구독료가 걷히지 않자 1902년 8월 31일 찬조자 5명을 추가하고 고표 300을 더 발행했다. 이때 사원총회를 통해 남궁억을 퇴임시키고 장지연을 사장으로 선출했다.

 

  1902년 9월 11~20일 동안 휴간했고 그후 재정이 회복되지 않자 '대호척필'(大呼擲筆)이라는 논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재정궁핍을 호소했다. 1903년 2월 6~8일 다시 휴간하자 〈황성신문〉 재발간 운동이 전개되어 성금 1,000원이 걷혀 그 돈으로 한동안 발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1904년 1월 27일부터 2월 10일까지, 5월 17~26일까지 또다시 휴간하게 되자, 고종이 훈령을 내려 신문값 납부를 촉구하는 한편 보신각 근처에 있는 관청 건물을 하사하고 보조금을 지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사설란에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악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글로 장지연은 70여 일 간 구류되고 〈황성신문〉도 80여 일 간 정지당했다가, 1906년 2월 12일 신문이 속간되었으나 장지연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어 3대 사장에 남궁훈, 1907년 5월 4대 사장에 김상천, 그해 9월 5대 사장에 유근, 1910년 6월 6대 사장에 성선경이 취임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대한'이나 '황성'과 같은 단어를 못 쓰게 하자 〈한성신문 漢城新聞〉으로 바꾸었다가 1개월도 안 된 9월 15일 제3470호로 폐간되었다. 〈제국신문〉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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