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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깃도, 아마겟돈(이스라엘)

영국신사77 2008. 4. 11. 15:38

                                     므깃도, 아마겟돈(이스라엘)

 

                       

                                                                           므깃도(아마겟돈) 전경

 

  BC 4000년 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깃도는 이집트와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 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 년 므깃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도시는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지 못할 만큼 강한 가나안의 요새였으며 (삿 1:27 ~ 28), 아마도 다윗에게 정복된 것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에 이르러 므깃도는 견고하게 수축되어 가장 강력한 북방 요새가 되었다 (왕상 9:15 ~ 19), 특히 솔로몬이 세운 마병장과 기병대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순사적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국제로를 장악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므깃도는 BC 923년에 이집트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합 왕에 의해 재건 되었다.  BC 609년에 요시아 왕은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고 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왕하 23:28 ~ 30). 그후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17년 영국의 알렌비(Allenby)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므깃도였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곳에서 발굴된 마병장에는 말들의 고삐를 매어 놓았던 구멍이 뚫린 돌들이 말구요와 함께 늘어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BC 869-850)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 제단 터-1

 

                       

                                                                                  므깃도 제단 터-2

 

                       

                                                                                  므깃도 곡물저장소

 

                        

                                                                   지하 수로, 지하 35m, 200m 터널

 

  므깃도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 장치의 발견이다. 큰 통로가 바닥까지 내려 있고, 그 통로의 끝에서 바위 구멍을 뚫고 도시 밖의 샘으로부터 도시 내부로 끌어 들이도록 되어 있다. 밖의 샘 입구는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텔 므깃도 박물관

 

므깃도는 고대 근동 세계에 있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제국 사이에 대치점이라 할 수 있다. 므깃도는 수 천년 동안 공포와 두려움의 이름으로 사람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지중해 해변에서 이스르엘 평원으로 접근하는 좁은 길에 걸터 앉아있는 므깃도 성은, 그 성의 주권자에게 나일과 유프라테스를 잇는 국제해안도로의 자유로운 통행권을 주었다. 국제해안도로는 대상들이 오가는 무역로였는데 므깃도는 그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므깃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주전 6천년기에 도착하여 신석기 시대를 이루며 살았다. 이 시기에 바위 위에 긁어서 그린 인간의 모습은 이 첫 번째 정착민들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으며 제의적 혹은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금석 병용기의 초기인 주전 4천년기까지는 므깃도의 주민들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실체 속으로 병합되기 시작했다.

 

좀 더 후기인 초기 청동기 시대의 출발점에서(약 주전 3300년) 므깃도의 신전들 중에 알려진 것 중에 가장 이른 신전이 그곳에 세워졌다. 이 시기가 보여주는 것은 므깃도가 처음으로 국제적인 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원통형 도장이 인쇄된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와의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3천년기의 끝은 정착을 위한 건설의 시대였다. 거대한 성벽이 이 때 세워졌다. 므깃도의 유명한 제단이 있었는데 높이 1.5미터의 원형 돌 구조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은 희생제사로 사용되었던 단이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세기들(centuries)에서 적어도 세 개의 신전이 제단으로 신성시된 지역과 확장된 지역에 더 세워졌다.

 

                        

                                                              솔로몬 시대 므깃도 요새 모형, 므깃도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