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성 (上)[신학과 과학의 만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요새- |
국민일보 기사입력 2005-06-24 15:35 최종수정 2005-06-24 15:35
3300여년 동안 침묵을 깨고여리고성(예리코·수 2:1)이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것은 최근이었다.
1999년 ‘Creation Ex Nihilo Journal’에 실린 성서고고학의 대가 브라이언트 우드 박사의 논문은,
여리고성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드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요단 계곡에 위치한 여리고성은 고고학적으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도시로 밝혀졌다.
길이가 450㎞나 되는 요단(요르단) 계곡은
헬몬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아카바만, 그리고 케냐와 탄자니아를 거쳐 모잠비크까지 이어진다.
계곡의 가장 낮은 곳은, 해수면보다 396m나 낮은 사해 부근이다.
여리고는 이런 요단 계곡 주변의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해 있었으며,
그 안에 펼쳐진 이른바 ‘녹색 카펫’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여리고의 토질은 기름졌으며,
이런 토질 덕분에 오렌지·바나나·대추야자 등 열대 과일이 풍성했다.
여름에는 메마르고 매우 무더웠지만,
겨울과 봄에는 수많은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향수 항아리에 담겨 있는 듯했다.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이런 아름다움을 놓칠세라,
주변의 부호들은 이곳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게 발굴팀들의 전언이다.
당시 클레오파트라나 헤롯의 궁전과 별장이 있었던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오늘날에도 나쁜 물에 소금을 넣어 좋은 물로 만든 엘리사의 샘물(왕상 2:21)이 솟아나고 있다.
신약에 소개되는 여리고는,
구약에 등장하는 여리고와 지리적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구약의 여리고보다 남쪽으로 조금 비켜난 아브엘 알라익이라고 불리는 폐허지역이,
바로 신약의 여리고다.
예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삭개오를 만난 곳(눅 19:1)이기도 하며,
현재 예루살렘에서 암만에 이르는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구약에 등장하는 성곽도시 여리고(수 6:16)는, 1868년 첫 발굴이 시작될 때까지
누구도 고대 도시의 유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만큼 흙으로 뒤덮인 언덕에 불과했다.
하지만 성서의 무오성에 한 점 의혹을 갖지 않았던 전 세계 고고학자들의 끈질긴 발굴작업으로,
여리고성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 발굴은 1908년 오스트리아의 셀린 박사에 의해 시작됐으며,
본격적인 발굴은 1930∼36년 영국의 고고학자 존 가스탕,
1952∼1958년 역시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캐더린 케니언,
1997년 이탈리아 탐사팀 등에 의해 이뤄졌다.
모두 1만여명에 달한다.
우드 박사의 논문은,
100여년 동안에 걸친 유적 발굴에 관한 보고서를 분석한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여리고성은 외벽과 내벽 등 두겹으로 돼 있으며,
외벽은 5m 정도 높이의 기초 성벽 위에 두께 2m, 높이 7m의 진흙 벽돌벽으로 세워졌다.
내벽은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14m 정도 되는 둑 위에,
다시 높이 솟아오른 내성벽의 구조로 설계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구조를 지닌 이중 성벽이었다(사진 참조).
여리고성에 거주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안의 벽을 그림으로 장식했고,
죽은 사람의 두개골을 방바닥에 매장하는 풍습을 지녔던 것으로 발굴 결과 드러났다.
또한 진흙으로 빚은 여자의 형상과 동물들도 발견돼,
진흙이 성벽을 쌓는 벽돌 뿐 아니라,
이들의 문명과 문화, 그리고 삶에 깊이 연관돼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주거지에서 터키 지역에서만 생산됐던 오석(Turquolse)이 발견돼,
여리고는 먼 지역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음을 입증해줬다.
그러나 이런 유물들 외에 발굴팀을 놀라게 한 것은, 정작 따로 있었다.
발굴팀이 1m 정도 땅을 파고들어 갔을 때 발견한 것으로,
불에 탄 곡식 항아리들의 재와 흔적들이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성에 이르렀을 때는 추수가 거의 끝난 시기였다(수 3:15).
이 때문에 추수한 곡식이 항아리에 가득 담겨 있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불에 탄 흔적에 대한 성서의 해답은 무엇일까?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수 6:24)
그래도 의문은 또 다시 이어진다.
가나안 전쟁을 계속 치러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한 군량미를 다 태워 없애버렸다는 것은, 억지 해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리품 중 어떤 것도 가지지 마시오.
이것은 이미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므로 모두 없애 버리시오…”(수 6:18? 쉬운성경)
발굴팀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여리고성 북방 외벽에는 집들이 벽에 붙여져 지어졌는데,
오직 한 부분만 무너지지 않은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 역시 성서가 던져줬다.
라합의 집이 외성벽에 붙어 지어졌으며,
여리고 정복시 라합의 가족은 그 집안에서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수 6:22,25).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정복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누구든지…이 성의 기초를 놓는 사람은 맏아들을 잃어버릴 것이고,
이 성에 문을 세우는 사람은 막내아들을 잃어버릴 것이다”(수 6:26)
고 경고했다.
그러나 아합시대 벧엘 사람 히엘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려다가,
정확히 첫째 아들과 막내 아들을 잃고 말았다(왕상 16:34).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심한 벌을 내렸을까?
여리고성의 유적과 폐허의 현장은, 하나님의 승리와 심판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
후세에 남겨놓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수 4:6∼7).
그렇다면 이런 철옹성 같았던 여리고성은 어떻게 무너졌을까?
여리고성(하)[신학과 과학의 만남] 국민일보 기사입력 2005-07-01 15:35 최종수정 2005-07-01 15:35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 성은 어떻게 무너졌을까?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시기는 BC 1405년(출3:17).
이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의 도성 가운데 최초로 공격한 곳이 바로 여리고 성이다.
육중한 성문과 절벽 위에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요새가
도대체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읽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신 전술은 ‘성벽 돌기’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한 차례씩 엿새동안 성벽을 돌고,
칠일째 되는 날에는 성을 일곱바퀴 돌며,
제사장들에게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라는 독특한 전술이었다(수 6:3∼5).
이런 전술은 인류가 전쟁을 시작한 이래,
성서를 빼고 그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하고 진기한 방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리고 성은 진동에 의한 ‘공명’과 ‘지진’에 의해 무너졌다는 것이,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전문가와 창조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공명의 위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타코마교가 무너진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강철이나 콘크리트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저마다 고유한 진동 수를 갖고 있다.
예컨대, 밀폐된 공간에서 같은 진동 수를 가진 1개의 소리굽쇠를 준비해,
타코마교는 현수교였던 것만큼 바람이 불 때마다 약간의 진동이 생겼는데,
공명 현상에 의해 무너진 다리는 이 뿐만 아니다.
그렇다고 한강다리가 이런 현상에 의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두번째로 지진의 가능성이다.
BC 1446년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남자 성인만 60만3550명(민 1:46)이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공명과 지진’으로 압축할 수 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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