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자료실]/♣北部(갈릴리) 이스라엘

★여호수아의 에발산 제단

영국신사77 2008. 3. 18. 14:38

 

                                    여호수아의 에발산 제단

 

                                                                                                               김성(협성대교수·성서고고학)

 

 

                                                                                  세겜 평야

 

                                                                       여호수아의 에발산 제단

 

                                                                여호수아의 에발산 제단 복원도

 

 

  1986년 8월 어느날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의 한 강당에서 이스라엘 고고학자제르탈(A.Zertal)은 자신의 발굴 결과, 세겜에 있는 에발산 중턱에서 여호수아에 의해 건설된 제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3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국제구약학회의 성서고고학 분과에서 제기된 이 폭탄선언은 곧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유럽 학자들의 반격이 시작됐다.로마 대학의 소진(A.Soggin)교수는 강단으로 올라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한마디로 일축해버렸고,다른 학자들도 그것은 제단이 아니라 근처의 농부들이 만든 일종의 망대라고 주장했다.너무나도 강한 그들의 어조 때문에 한동안 강의실이 술렁거려 더 이상 순서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에발산 중턱의 여호수아 제단
  1980년부터 세겜을 중심으로 하는 므낫세지역에 대한 포괄적인 지표조사를 진행하던 제르탈은 해발 940m로 솟아 있는 에발산의 경사면을 지나다가 중턱에 위치한 한 돌무더기를 주시했다.돌이 많은 산지에서 포도원이나 올리브 밭을 가꾸기 위해 치운 돌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들은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지만 그중 에발산의 것이 유난히 이 고고학자의 눈길을 끈 이유는 바로 근처에 흩어진 구약시대의 토기조각들 때문이었다.성서고고학의 `달력'으로 일컬어지는 토기조각들은 그 지역이 곧 어느 시대에 번창했던 주거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주변과 구분되지 않는 흙언덕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유적지 조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2년부터 2년간에 걸친 발굴 결과, 이 돌무더기 아래에서 철기 1시대[BC 1200~1000년]에 건설된 제단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한 변의 길이가 8~9m 정도인 직사각형의 제단은 벽의 두께가 1.4m나 되는 단단한 구조였다. 이 제단의 한가운데 바닥에는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진 직경2m정도의 원형 화로가 놓여 있었다. 구약시대의 다른 제단들과 마찬가지로 동쪽에서부터 제단 위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있었다. 제단 위에서 짐승을 불사르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사장들이 올라가는 이 경사로는 길이가 7m, 폭이 1m 

정도였다. 제단 주위로는 거룩한 장소임을 구분하는 돌로 쌓은 울타리가 있었고 한쪽에는 출입구까지 만들어졌다.

 

  내부에 채워진 흙과 불에 탄 재 사이에는 여호수아 시대의 토기 조각들과 동물들의 뼈가 많이 출토되었다. 짐승뼈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섭씨 400~600도의 불에 태워졌고, 소·양·염소·사슴 등인 것으로 밝혀졌다.이들 중 사슴을 제외하고는 모두 레위기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희생제물이었다.원래 희생 제사는 가축의 도살권을 가진 제사장이 특정한 장소에서 가축을 잡은 후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잘라서 불에 굽는 행위다. 여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제의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고대 종교의 중심적인 행사로 정착된 것이다.

 

  육중한 이 유적의 정체를 두고 발굴자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단순한 집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입구가 없는 게 이상했고,망대로 보자니 너무나도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근처에 이렇다 할 만한 중요한 요새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발산에 제단을 쌓고 율법을 낭독

  모세는 요단 건너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에 들어간 후 세겜에 있는 에발 산에 제단을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 드릴 것을 명령했는데[신명기 27:4~8], 이에 따라 여호수아는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들"로 제단을 쌓았다[여호수아 8:30].

 

  그후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기록하매[수8:32]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대로 함이라[수8:33]

 

           그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수8:34]

 

  하였다[여호수아 8:30~35]. 


  이 제단이 여호수아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발견된 토기류의 70%가 `목이음 항아리'였는 점이다.물이 부족한 산악 지대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멀리 떨어진 샘으로부터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길어 오기 위해 대용량의 항아리가 필요하엿다. 몸통과 아구리를 분리해 만든 다음 목 부분을 이어놓은 이 큰 항아리는 정착시대[BC 1200~1000년]의 특징적인 토기로 분류된다. 또한 람세스2세~3세시대[BC 1279~1153]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양식의 스캐럽 도장도 발견되었다.[이집트에서 태양신 라(Ra)를 운반하는 신으로 숭배된 풍뎅이 모양의 도장은 연한 동석을 정교하게 조각해서 만든 것으로 주로 반지에 끼고 다녔으며 이스라엘지역에서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종교적 중심지 세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민족적·종교적 출발지는 예루살렘이라기보다는 세겜이다.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은 세겜이었다. 비록 출애굽 사건 후 여리고를 먼저 점령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길갈을 제외한다면, 첫번째 종교적 중심지는 세겜의 에발 산 제단이었다.

 
  한편 이 제단을 발굴했던 제르탈은 이스라엘민족의 지리적 기원을 요단 강 건너편의 얍복강이 흐르는  숙곳 평야로 보고 있다.이곳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 나루터를 건너 파라 골짜기를 따라 세겜 분지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종교적 중심지와 법궤의 이동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온 후, 여호와의 상징인 법궤가 안치된 곳이 바로 종교적 중심지였다. 맨 처음 여리고 근처의 길갈에서 시작된 여호와 성소는 세겜의 에발 산 제단, 실로의 여호와의 전 등으로 이동하다가, BC 1050년경 블레셋 전투에서 전투에서 법궤를 탈취 당해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가드의 다곤 신전에 모셔진 법궤 때문에 재앙이 내리자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블레셋 민족은 다시 법궤를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려 보냈다. BC 1000년경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윗은 잃어버렸던 여호와의 상징인 법궤를 모셔온다.
 
  법궤의 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세겜으로부터 시작해 남하했다는 사실은 철기1시대[BC 1200~1000년]의 시대별로 주거지의 발달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며 영향을 끼쳤다는 것에서도 입증된다.
 
 

                                                                                                                         출처:김성교수의 '성서고고학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