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렛의 마리아의 샘 기념 성당
갈릴래아 지방의 작은 도시 나자렛, 이미 이곳에 발을 디딘 우리 일행은
마리아의 샘 기념 성당을 찾아 나섰다.
일정상으로는 성모영보성당을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으나
예약된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성당문을 닫고 휴식을 취하는 것은 이곳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다.
문을 막 닫으려고 하는 순간에 도착한 우리들은 황급히 달려가서
들여보내 줄 것을 사정해 보았다.
무뚝뚝하고 근엄한 모습의 문지기 아저씨는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표정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모영보성당을 순례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들어가야겠다는 집념으로
성당 마당에 서 계시는 신부님을 불렀다.
Hello! Father! Hello Father! ... Help me!
Open the door...
애걸하는 나의 모습을 그냥 보고만 계신 것 같아서
다시 bady language를 발휘했다.
나의 표정이 얼마나 안쓰러웠으면 손등을 어루만지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세기의 반을 넘게 살아온 나를 할아버지 신부님은
십대 정도로 보시는 듯했다.
베일 밖으로 보이는 희긋희긋한 머리카락을 아마도 유색 머릿결 정도로 보신 건지?...
계속 나의 손을 잡으시고 천천히 타이르듯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말씀을 되풀이 하셨다.
그러나 나는 계속 졸라댔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 내가 성당문만 열어줘 봤자 다른 곳이 다 닫혀 있기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듣고보니 정말 그럴 것 같아서 다른 대안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방문 순서를 바꿔 이 지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마리아의 샘 성당을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무관한 곳이고 순례객들도 잘 찾지 않은 곳이어서인지
길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나 이곳은 성모님이 생전에 물을 길어다 요셉과 예수님을 위해
밥 짓고 빨래하며 집안 일을 하시면서 생활한 터전이기에
마치 포근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나자렛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우물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와 살았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 이곳에서
성모님이 물을 길어 가신 것을 기념하여 ‘마리아의 샘’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나자렛은 ‘수호자’ 또는 ‘파수꾼’이란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잘 지켜주었기에 그런 명칭이 나왔거나,
지형적으로 이즈르엘 평야에 우뚝 솟아 있어 옛부터 적들의 공격을 막아주는
파수꾼 역할을 해왔기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기도 한다.
나자렛은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높은 분지로
다른 도시와 마을과 교류가 거의 없던 매우 한적한 곳이다.
옛 나자렛은 유대역사가 요셉푸스가 언급한 지명에서 벗어날 정도로 시골이었다.
십자군 시대에 이르러 이 도시는 부흥하고 번영하기 시작했다.
그후 1187년에 살라딘에게 점령당했고 1263년 칼리프 바이바르스에 의해
파괴된 후 400년 동안 회교도의 지배를 받았다.
1620년에 이르러 그리스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 사는 주민들 대다수는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아랍인들이다.
지금은 4만 5천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꽤 큰 도시이다.
인구의 92%가 로마 가톨릭 신자라고 한다.
나자렛 거리 시장통의 정겨운 풍경
이스라엘에서 이 지역은 그리스도인과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공존하여 살고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구 나자렛이라고 불리는 언덕 지역에는
주로 회교와 그리스도교(가톨릭과 정교회)를 믿는 이들이,
언덕 오른쪽 신 나자렛 지역은 유대인들이 주로 모여 살고 있다.
우리는 마리아의 샘 기념 성당에 들러 잠시 기도를 하고
성모님이 마셨던 샘물을 마셨다.
샘물 줄기를 파이프로 연결하여 수도꼭지를 달아 놓았고
마치 우리나라의 약수터에서 볼 수 있는
조그마한 바가지 모양의 그릇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이 순간 나의 존재 안에 스며있는 모든 불순물이 깡그리
몸 밖으로 나가줬으면 하는 염원으로 한바가지를 받아 마셨다.
오후 2시에 미사를 드리겠노라고 예약한 성모영보성당에 제대로 도착하기 위해
점심식사를 할 식당을 찾았다.
식당을 찾느라 두리번 거리는 거리에서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길을 가던
예쁜 꼬마아이가 우리를 보고 시선을 돌리면서 멈췄다.
아이를 보는 순간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연상하면서
너무도 해맑고 예쁜 모습의 아이를 부둥켜 안아 보았다.
혹시 이 아이는 예수님의 혈통이 아닐까?...
이 순간 나는 성모님이 된 기분으로 잠시 착각에도 머물러 보았다.
주변 거리 상가에는 어느곳 보다도 목수일을 하는 상점이 눈에 띄었다.
이 모습 또한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는데
예수님의 양부 요셉 성인의 후손들이 오랜 세월 장인 정신으로 이어온
생활터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장소를 옮겨 예수님 당시의 회당에 잠시 들린 후 식당으로 들어 갔다.
성모영보 대성당
성모영보 대성당
성모영보 기념 대성당은 나자렛의 대표적인 순례지이다.
나자렛 거리의 좀 혼잡스러운 아랍시장을 지나는 길목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영보(領報):-성모 마리아가 성자(聖子)를 잉태할 것을 하나님(天神)에게서 기별받은 일.
이 기념성당이 위치한 곳에서 성모님이 가브리엘 천사의 알림을 받으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순간,
작고 조용한 촌락,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성지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이 성당은 정면 폭이 30m, 길이가 70m나 되며
건물 외부는 베이지색에 옅은 벽돌색 돌이 줄무늬를 이루고 있다.
서쪽과 남쪽 벽면은 육화와 성모영보를 묘사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가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5세기 초에도 성모영보가 있었던 동굴 위에 다시 탄크레드가 성당을
로마 건축양식으로 재건하였느나 614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 되었다.
1263년에는 십자군이 성당을 세웠으나
이집트의 바이바르스에 의해 다시 파괴 되었다.
1730년에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다시 작은 성당을 세웠으며
1877년에는 더욱 확장시켰다.
비잔틴 시대, 십자군 시대, 이슬람교 시대를 거치면서
성지 관리 주역이 바뀜에 따라 파괴와 복구가 거듭 이어지길
다섯 번이나 반복 되었다.
그후 오늘의 대성당은 마리아의 집터였다고 하는 곳에
유명한 교회 건축가인 이탈리아의 무지오의 설계로
1960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69년에 완성된 것인데 그 자리에 세워진 다섯 번째 건물이다.
프란치스꼬 수도회는 성모영보가 있었던 이곳에
적합한 성당을 지으려고 노력한 결과
1969년 3월 25일 성모영보대축일에 대성당을 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성전을 짓기 전 벨라르미노 바키티 신부님은 1954년부터 1965년까지
거의 11년 동안이나 고고학적인 발굴을 했었다.
수많은 동굴, 물 저장 장소, 곡식 저장소, 기름틀, 포도즙을 짜는 틀 뿐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성전터도 찾아냈다.
성전 안에 잘 보수되어 있는 ‘성모영보 동굴’은 헤로데 시대에 속하는
가정집인데 마리아가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동굴 안에는 북쪽과 남쪽으로 서로 대칭되는 위치에
돌기둥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성모님의 기둥이고
다른 하나는 가브리엘 천사의 기둥이라고 불리운다.
대성당 내부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발현하여
잉태사실을 알려주는 장면과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 계신 성화가 있다.
또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등 네 복음사가가 조각되어 있다.
출입문 동판 부조에는 예수님의 생애 중 탄생, 이집트 피난, 목수일 도움,
세례 받으심, 가르치심, 십자가의 죽음 등 여섯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성당 내부 아래에서 올려다 본 천정
지하성당에는 성모영보 동굴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는데
중앙 제대 앞면에 라틴어로
“이곳에서 말씀이 육화 되셨다”.(Verbum Caro Hic Factum est) 라고 적혀 있다.
이 제대를 ‘성모영보 제대’라고 한다.
성모영보 제대
성당 내부는 웅장한 크기에 걸맞게 제대가 여러 곳에 있다.
이곳 성지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대대로
이 성지를 보호하고 관리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특히 이들은 마리아와 혈육관계가 있는 친척들이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이곳 성당에서 장엄하게 미사를 봉헌했다.
성당을 관리하는 프란치스꼬회 신부님께서 제대를 잘 준비해 주셨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미사 중에 서원갱신을 하려고 계획했었고
거룩하고 멋진 분위기를 갖기 위해 서원문 낭독 때
초를 각자 들고 있다가 제대에 봉헌하기로 하고 예쁜초를 준비했었다.
관리하시는 신부님께 우리의 계획을 말씀 드렸더니
화재의 위험과 초 때문에 그을음이 생긴다고 못하게 했다.
미사의 퇴장성가로 불렀던 ‘살베레지나’는 성당 내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우렁찬 박수를 보내 주었다.
우리는 제대를 향해 있어서 보지 못했지만
신부님께서는 회중을 향해 있었기에 미사 동안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우리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을 보셨단다.
중앙 제대에서 미사를 마치고 다른 곳을 둘러보는 동안
우리와 함께 미사를 봉헌했던 순례객들은
‘살베레지나’ 노래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성모영보 동굴을 향해 가고 있다.
제대 뒤쪽에 성모님이 살으셨던 곳으로 추측하는 장소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었다.
마치 살아계신 성모님을 뵈러 가는 기분이라 내심 설레이는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성모님의 보살핌으로 이곳에서 기쁨 중에 뛰어 놀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을 체험한 적도 있었으리라.
나는 인간적인 위로를 받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이곳에서 부끄러운 나의 삶에 힘을 얻도록 전구해 주시길 청했다.
믿음의 대답인 네!를 말하기 보다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어
복된 이의 대열에 들 수 있기를...
대성당 마당에는 조각품들이,
외부 벽면에는 여러나라의 문화가 표현된 성모님의 성화가 붙어 있다.
한국 성모님은 이남규 루가 (1931-1993년) 화백의 작품이다.
성요셉[성가정 기념] 성당
성가정 기념 성당 또는 성요셉 성당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성모영보 기념 대성당에서 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요셉 성인의 작업장이 있었고 예수님과 마리아와 함께
성가정을 이루고 살았다고 여겨 이런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비잔틴 시대부터 이미 성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때는 프란치스꼬 수도회 전용 성당으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현재의 기념 성당은 1914년에 다시 새워진 것이다.
요셉 성인의 신앙과 진실된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성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당 입구에는 석조로 된 성가정 조각상이 있다.
성당 내부에는 성모님의 수태고지,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요셉 성인과 함께 목수일을 하는 예수님의 모습 등이
그려진 성화가 화려한 색채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11년 동안에 걸쳐 발굴해 낸
예수님 당시의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다.
작업장 터
출처:성바오로딸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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