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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고고학>제1장 땅 속에 묻힌 성서의 이야기를 찾아서

영국신사77 2007. 11. 1. 22:01

    김성교수의 '성서 고고학 이야기'

 

          제1장 땅 속에 묻힌 성서의 이야기를 찾아서

                1-1   '텔' 이란 무엇인가? 
                1-2   에드워드 로빈슨과 성서지리학

 

 

                               1-1 '텔' 이란 무엇인가?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431813

<사진설명-아래>

  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30~50m 높이로 솟아있는 유적의 발굴을 통해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왜 고대 유적들은 땅속에 묻혀 있으며 높은 언덕을 이루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성서고고학의 핵심적인 연구과제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지역들은 오늘날의 중동지역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다.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 유적지들은 독특한 형태의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이러한 폐허의 언덕을 아랍어로는 `텔(Tell)'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할 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를 선택했다.우선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며,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이어야 한다.또 주위에 경작할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고,교통의 요충지로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성서의 대표적인 도시인 예루살렘, 헤브론, 브엘세바, 실로, 세겜, 사마리아, 도탄, 벳샨, 므깃도 등이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텔은 흙벽돌이 부식돼, 부서진 흙과 기초로 사용됐던 돌이 오랜 세월 쌓인 언덕이다.대부분의 흙벽돌 건물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열풍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 버린다.다시 집을 지을 때는 무너진 잔해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새로운 흙벽돌과 돌을 가져다가 새 건물을 완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너진 옛 집터에 수북이 쌓인 돌과, 흙더미를 성 밖으로 치우지 않고 그 위에 새 집의 기초를 놓는다는 점이다.따라서 이런 과정이 수천년동안 지속되면 주거지의 지반이 상당히 높아져서 전형적인 텔을 이루게 된다.그렇다면 텔은 어떻게 발굴되기 시작했을까.

  1871년 10월11일 이른 아침 소아시아의 서쪽에 위치한 `히싸를릭크 언덕' 위에서 10여명의 인부들이 한 독일 갑부의 지시에 따라 보물을 찾기 위한 삽질을 시작했다.이곳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그리스 영웅들의 전쟁터인 트로이로 확신했던 고고학자 슐리만은, 평생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투입해 트로이전쟁의 역사성을 밝히려 했다.발굴단의 인원은 1백명으로 늘어났고 매일 새로운 유물들이 나왔다.로마시대의 웅장한 신전터가 발견됐지만, 그는 그러한 유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트로이의 성벽을 향해 계속 땅을 팠다.

  이듬해 4월 재개된 두번째 발굴에서, 그는 트로이의 언덕에는 여러 시대에 걸쳐 성벽과 건물들이 지어지고 무너졌기에, 그 상관관계를 잘 분석해야한다고 생각했다.파면 팔수록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한 도시의 잔해 밑으로 또다른 도시의 유적이 나타나, 모두 아홉개나 되는 도시들이 층층이 쌓인 것을 확인했다.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밑바닥의 도시는 금속을 사용할 줄 몰랐던 선사시대의 도시로 밝혀졌다.
 
  문제는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9개 도시들 중에 어느 것인가하는 점이었다.오늘날 고고학자들은 맨 밑에서 여섯번째의 도시를 프리암과 헬렌 왕비의 전설적인 트로이로 보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비로소 성서고고학 발굴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인 `주거층론(stratigraphy)'이 탄생됐다.주거층이란 한 세대 또는 파괴되지 않고 일정기간 지속된 고대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터전을 말하며,주거층론이란 그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1890년 봄 영국 출신의 이집트 고고학자 페트리는 이스라엘 남부 네겝광야의 한 언덕을 주목했다.`텔 엘 헤시'라 불리는 이 언덕의 동쪽에 흐르는 `와디'는 고대 도시를 절반쯤 침식시켜서 그 잔재를 드러내게 했다.그는 이 곳이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점령했던 성서의 라기스로 확신하고, 6주간에 걸쳐 발굴해 냈다.특히 페트리는 당시 다른 고고학자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수많은 토기 조각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슐리만의 트로이 주거층론에 영향을 받은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주거층의 연대는 함께 출토된 토기들의 모양으로 결정된다는 토기 연대측정법을 처음으로 고안해 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 달리, 쉽게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고대도시 발굴에서, 페트리의 토기연대는 성서고고학의 달력으로 인정돼, 이제는 토기의 아가리 부분 한 조각만 있으면 그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됐다.성서고고학사에 일대 획을 긋는 페트리의 텔 엘 헤시 발굴은 90년에 1백주년을 맞았고, 예루살렘에서는 국제,성서고고학,학술대회를 열어 이를 기념했다.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흙먼지 날리는 언덕을, 화려한 고대도시의 보금자리로 여기고 꾸준하게 인내하며 발굴했던 슐리만과 페트리는, 둘 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하지만 그들은 땅속 깊은 곳에 묻힌 먼 옛날의 유적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지녔다.
 
  트로이와 텔 엘 헤시 발굴을 통해, 고대 근동지역 수백개의 텔들이 성서 도시들의 무궁무진한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보물창고임이 비로소 밝혀졌다.
 
                                                          /김성 교수(협성대 성서고고학)



[사진설명]

1.하인리히 슐리만(Heinlich Schliemann:1822~1890년)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전설의 도시 트로이를 찾겠다는 꿈을 갖고 자수성가해 갑부가 된 슐리만은 1871년 마침내 그 꿈을 실현했다.그는 모두 아홉개나 되는 트로이의 시대별 도시를 발굴하면서, 여러 시대에 걸쳐 주거층이 형성된 텔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밝혔다.


2.플린더스 페트리(Flinders Petrie:1853~1942년)

  영국출신의 이집트 학자로서 1890년 이스라엘 남부의 텔 엘 헤시(Tell el Hesi)를 발굴하여, 성지 최초의 과학적인 텔 발굴자가 됐다.`성서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트리는, 각 주거층에서 나오는 토기의 모양과 특성에 따라 연대를 추정할 수 있음을 밝혔다


3.`텔 도탄(Tell Dothan)'

  도탄은 사마리아 북부에 위치한 성서시대의 도시로 전형적인 유적지 언덕인 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창세기에 요셉이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는 무대가 되는 도탄에는 샘이 있고,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국제적인 대상들의 통로이면서 높은 곳에 위치해 고대도시로는 가장 이상적인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1-2 에드워드 로빈슨과 성서지리학

 




예루살렘을 비롯해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나사렛 등 주요 성지들은 사람들이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그런 성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벧엘 실로 아이 기브온 므깃도 단 등 구약시대의 도시들과 가버나움 벳세다 거라사 등 신약시대의 마을들은 이미 오래전에 폐허가 된 후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따라서 어느 누구도 정확한 장소를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렇듯 확인되지 않는 팔레스타인의 성서 지명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비교언어학적인 방법론으로 접근한 한 미국인 목사에 의해 1838년에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유럽의 자유주의적인 성지탐사와는 달리 철저하게 신앙적 관점에서 비롯된 미국의 성지연구는 뒷날 `성서고고학은 곧 미국적 학문'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주는 계기가 된다.

1794년 미국 코네티컷주의 사우딩턴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워드 로빈슨은 일찍부터 그리스어에 능통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관한 주석서를 편찬하는 등 고대어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하버드대학의 자유주의적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엔도버신학교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던 그는 성서의 철저한 언어학적 연구를 토대로 보수적인 신학을 견지하는 한편 4년간의 프랑스·독일유학을 통해 유럽의 비교언어학을 터득하였다. 미국인 학자로서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 그는 1837년 뉴욕의 유니온신학교로부터 성서학 주임교수로 초빙을 받자 먼저 성지를 탐사할 시간을 달라는 조건을 내세웠고,마침내 1838년 3월 카이로에 도착함으로써 그의 성지탐사는 시작되었다.

로빈슨의 성지탐사에는 그의 제자이며 목사로서 레바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엘리 스미트가 동행했고,그의 뛰어난 아랍어 실력은 팔레스타인의 현지인들과 접촉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카이로를 출발,홍해를 건너 시내산을 등정한 후 요단 건너편을 지나 여리고로 들어가는 여정을 계획했다. 비록 현지 탐사의 위험 때문에 요단 건너편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그들은 당시 서구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네게브 광야를 처음으로 탐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내세운 성지탐사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기독교 유적지마다 위치해 있는 기념교회의 수도사들을 피할 것.

둘째,현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마을을 주로 찾아다닐 것.

셋째,되도록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을 찾아다닐 것.

수주일동안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비르 에 세바'라 불리는 조그만 샘을 중심으로 형성된 베두인 마을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였던 브엘세바임을 밝혀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로빈슨은 성전 터의 축대 둘레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유태인들의 기도장소인 `통곡의 벽'의 남쪽 모퉁이 근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진의 결과라고 믿었던 돌출부를 자세히 관찰한 그는 요세푸스의 헤롯 성전에 관한 서술을 참고로 그곳이 바로 성전으로 향하는 입구를 받치고 있던 아치의 한 부분임을 확인했다. BC 20년 경부터 헤롯왕이 건설하기 시작한 성전 터의 남쪽 끝에는 로마의 공회당을 본떠서 만든 웅장한 규모의 바실리카가 있었다.그곳은 귀족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별도의 다리로 연결돼 있었는데,로빈슨이 발견한 아치의 일부는 바로 이 통로를 받치고 있던 것이었다. 1967년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을 통하여 아치의 무너진 돌들이 15m 깊이의 땅 속에서 발견됨으로써 로빈슨의 예리한 관찰은 사실로 입증됐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성지 안내원들은 오늘날 이 부분을 `로빈슨의 아치'라고 부른다.

로빈슨은 `어느 지역이든지 고대의 지명은 비록 그 지방의 주민과 언어가 바뀌더라도 발음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전제 하에 현지의 아랍어 지명을 참고로 성서 속의 도시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1838년 5월4~5일 로빈슨은 예루살렘 북쪽의 유적지들을 탐사하여 아나타를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으로,제바를 게바로,묵크마스를 믹마스로,엘 지브를 기브온으로,그리고 베이틴을 야곱이 제단을 쌓았던 벧엘로 확인했다.

로빈슨과 스미트는 하루종일 길없는 외딴 곳에 위치한 유적지들을 따라 당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탐사하고,밤에는 천막을 치고 모닥불 옆에서 낮동안에 다닌 지역들의 아랍어 지명을 일일이 기록해 성서의 히브리어 지명과 비교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들은 연구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두 사람이 각각 별도로 탐사일지를 기록했다. 로빈슨의 업적을 계기로 중요한 성서 속의 지명들이 많이 확인되었지만,아직도 성서와 관련된 많은 유적지들이 학자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김성(협성대교수·성서고고학)


[사진 설명]

1.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1794~1863년)
미국의 목사이며 언어학자인 로빈슨은 성서의 문자적 정확성을 입증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지역에 위치한,미확인된 성서 속의 여러 지명들을 지리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텔 브엘세바'.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로빈슨 일행은 `비르 에 세바'라 불리는 조그만 베두인 천막촌에 도착했다. 이곳의 아랍어 지명을 토대로 그는 이곳이 다름아닌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도시인 성서 속의 `브엘세바'임을 밝혔다. 1969년 이후 발굴을 통해 솔로몬시대 요새로 건설된 텔 브엘세바의 모습이 밝혀졌다.

3. 로빈슨의 아치(1850년대)
1838년 예루살렘의 성전 터의 축대 부분을 관찰하던 로빈슨은 지진으로 인해 튀어나왔다는 돌출부를 성전 부속건물로 통하는 통로를 받치기 위한 아치의 일부라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밝혔다.

4.로빈슨의 아치(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