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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아래> 1844년 5월 어느날 독일 출신의 한 성서학자가 시내산 중턱의 성 카타린 수도원 구내 도서관에서 큰 바구니에 담긴 양피지 뭉치를 살피고 있었다.그곳의 한 수도사는 이 뭉치 중 일부가 이미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던져졌노라고 말했다.언뜻 보기에도 또렷한 그리스어 대문자로 구약의 예언서들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었다.그는 대부분 구약성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총 1백29쪽이나 되는 이 양피지들을 하나씩 골라서 수도원측에 건네주었고,수도원에선 그중 43쪽을 답례 선물로 주었다.1천5백년동안 잊혀져 있던 세계 최고의 그리스어 성서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 역사적인 위업의 주인공은, 복음서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대항할 만한 물적 증거로 가장 오래된 신약성서를 찾는 데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29세의 티셴도르프(C.Tischendorf)였다.1815년 독일의 렝겐펠트에서 태어난 그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신약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840년에 이미 독자적인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출판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이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했다.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기독교 국가답게 정통성있는 최고의 성서들을 보유하고 있었다.이들은 영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프랑스의 에프라임 사본,이탈리아의 바티칸 사본들이다.당시 이렇다할 만한 고대 성서를 갖고 있지 못했던 독일은, 티셴도르프의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을 국가적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티셴도르프는 1846년 삭소니 지방의 왕을 기념하여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 사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입수한 43쪽을 출판했다.1852년 말 그는 두번째로 성 카타린 수도원을 방문,나머지 부분을 찾으려 했으나 이미 그 중요성을 알아챈 수도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빈손으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1859년 1월 러시아 황제의 후원으로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수도원을 방문했다.친분이 있는 한 수도사가, 자신의 방에서 붉은 천에 싸서 보관했던 3백47쪽에 달하는 성서를 보여주었다.필체로 보아 이미 그가 알고 있는 43쪽과 같은 필자의 것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이 사본은 그가 그토록 찾길 원했던 신약 전체와 구약의 일부를 담고 있었다.흥분을 가라앉힌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엄청난 보물을 수도원 담장 밖으로 빼돌릴 수 있을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마침 수도원장이 카이로에 있었기에, 그는 그곳의 부속 수도원으로 가서 허락을 받기로 했다.수도원장은 카이로에서 내용을 베끼는 것만을 허락했고, 티셴도르프는 한 번에 8쪽씩 받아서 2개월동안 3백47쪽 모두를 베끼는 데에 성공했다.이제 남은 일은 수도원측이 러시아 황제에게 증정하도록 일을 꾸미는 것이었다.하지만 그가 외교력을 최대한 동원해도, 수도원측에선 전혀 기증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티셴도르프는 양피지에 전문적으로 필사본을 복제하기 위해 잠깐동안만 러시아에 원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고,외교문서가 오간 끝에 정식으로 임대가 성사됐다.그는 1859년 11월 러시아 황제에게 시내 사본을 증정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원본을 돌려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고,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수도원측에 9천루블을 지불했다.그렇지만 그후로 서양의 학자들은 수도원에서 호의적인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아궁이에 던져질 운명인 고대성서를 구했다는 티셴도르프의 최초 진술도 거짓임이 밝혀졌다.왜냐하면 누가 보아도 깨끗하게 잘 보존된 양피지에 또렷하게 기록된 그리스어 성서를, 그리스 정교회 수도사들이 모르고 불쏘시개로 태울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내 사본의 기록 연대는 복음서 부분의 여백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일련의 숫자 표시로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므로 그의 사망연도인 340년 경으로 추정된다.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1년 가이사랴의 성서학자인 유세비우스로 하여금 그리스어 성서를 50권 제작하여 제국 내의 중요한 교회에 배포하라고 명령했다.그중의 하나가 가이사랴에 있다가 638년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 그들의 박해를 피해 빠져나온 어느 피난민에 의해 성 카타린 수도원까지 오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내 사본의 내용상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쟁은 마가복음서의 끝부분에 예수의 부활 기사(마가복음 16:9~20)가 없다는 점이다.당시 모든 신약학자들이 마태복음서를 가장 초기에 기록된 문서로 여겼기 때문에, 티셴도르프는 자연스럽게 필사자의 실수라고 해석했다.하지만 이 문제는 마가복음서가 최초의 기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19세기 말부터, 복음서 논쟁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편 공산화된 러시아는 자금 부족을 겪던 중, 1933년 시내 사본을 영국에 10만파운드를 받고 팔아넘겼다.1975년 5월 성 카타린 수도원 구내의 한 구석진 방에서 불이 났다.불을 끄고 내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상자 47개분에 달하는 고대 문헌들이 발견되었고,이들 중에 10여장이 넘는 시내 사본의 일부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김성(협성대교수·성서고고학) [사진 설명] 1. 콘스탄틴 티셴도르프(Constantin Tischendorf:1815~1874년) 독일의 성서학자인 티셴도르프는 복음서의 진실성을 부인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대항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로 고대의 신약성서를 찾는 데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그는 1844년 시내산 중턱의 성 카타린 수도원에서 4세기에 기록된 시내 사본을 발견함으로써 그의 꿈을 성취했다. 2.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 350년 경 기록된 시내 사본의 한 양피지에는 요한복음서 1장38절~2장17절의 내용이 특징있는 그리스어 대문자로 기록돼 있다.두세 줄마다 한번씩 펜에 잉크를 채웠기 때문에 진한 글자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시내산 지역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1천6백년 이상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잘 손질된 양가죽과 잉크 자국이 매우 선명하게 보존됐다.가로 세로가 38~40㎝ 크기인 양피지는 한 마리의 양에서 두 장만 얻을 수 있다. 3. 성 카타린 수도원 330년 헬레나 황후는 시내산 중턱 1천5백m 지점의 샘이 흐르는 골짜기에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와 모세의 불붙는 가시덤불을 보호하는 망대를 건설했다.548~56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벽을 건설하고 수도원을 확장했다.726년부터 시작된 성상파괴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원 구내에는 희귀한 고대의 성화들이 수백점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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