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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6] 메샤 석비와 모압 고고학

영국신사77 2007. 10. 26. 01:07
[성지를 찾아서 6] 메샤 석비와 모압 고고학
- 작성자이름 : 강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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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아래>

1869년10월 어느날.예루살렘 주재 프랑스영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20대의 젊은 고고학자 끌레몽 가노(C.Clermont Ganneau)는 여러 조각으로 찢어지고 구겨진 한 고대어 비문의 탁본을 해독하고 있었다. 비슷한 글자인 페니키아어 비문이 이미 발견되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없이 한 줄씩 읽어나갈 수 있었다. `나 모압 왕 메샤는…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통치하던 땅을 되찾았다'.열왕기하 3장에 나오는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에 관한 내용이었다.계속해서 읽던 그는 더욱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다.`나는 느보에 있는 야훼의 기물들을 끌어내어 그모스 앞에 바쳤다'.기원전 8백50년경 기록된 성서 외의 자료에서 야훼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메샤 석비라 불리는 이 유물의 최초 발견은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19일 독일인 선교사 클라인(A.F.Klein) 목사는 에돔 지역의 케락을 선교차 방문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출발,요단강을 건너 길을 가던 중 모압 지방의 디본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다. 저녁식사 후 베두인들은 그를 마을 한 구석으로 안내했다.그 곳에는 새까만 석비 하나가 땅에 반쯤 파묻힌 채 놓여 있었다. 한쪽 면에 알 수 없는 글씨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본 클라인 선교사는 어림잡아 크기를 재고,그 중 몇 글자를 스케치하여 비망록에 적어 두었다. 선교활동을 마친 그는 열흘 뒤인 8월29일 예루살렘 주재 독일영사인 피터만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대어 전문가인 독일영사는 그 글자들이 모압어임을 즉각 알아차렸고,곧 베를린 제국도서관에 도움을 요청했다.도서관측은 유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천프랑이라는 비싼 가격으로 그 석비를 구입할 것을 지시했다.그들은 곧 아랍인 중개인을 내세워 흥정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왜냐하면 메샤 석비가 묻혀있는 땅 주인과 직접 거래하지 못하고,자신들이 알고 있는 근처 부족에게만 연락했기 때문이었다.독일측에서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지만 비밀은 새나갔다.이듬해 봄부터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워렌과 프랑스의 끌레몽 가노가 이 유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69년6월 독일은 외교력을 총동원했으나,당시 오스만 터키와 요단 건너편 부족들의 관계가 악화됐기 때문에 별 효과는 없었다. 탁본을 뜨려 해도 현지 베두인들이 `이교도들이 탁본을 뜨면 검은 석비 속의 신비스러운 정령이 빠져나간다'고 믿고 반대해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그 해 7월 영국의 워렌은 공식적으로 런던의 팔레스타인탐사재단에 메샤 석비의 존재와 독일이 흥정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대영박물관이 적극적으로 나서 메샤 석비를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재정난에 시달리던 탐사재단은 이 석비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10월에 독일은 액수를 더 높여서 2천4백프랑을 제시했고 석비의 소유권을 주장했던 바니 하미디 부족이 그 조건에 동의했다.하지만 석비를 운반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북쪽 지역의 아드완 부족이 통행세를 요구하는 문제가 발생했다.훗날의 학자들은 프랑스측에서 아드완 부족을 매수하여 독일의 석비 획득을 방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독일은 단순히 석비를 사려고만 했고 탁본을 시도하지는 않았다.그 내용의 중요성에 비추어 적극적으로 탁본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이에 비해 프랑스측에선 곧바로 3명의 아랍인들을 보내 메샤 석비의 탁본뜨기를 시도했다.이들이 현장에서 탁본을 뜨고 있을 때 현지 아랍인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고,급기야 총을 쏘는 바람에 탁본을 뜨던 한 아랍인이 부상을 당했다.하지만 곁에 있던 동료가 목숨을 걸고 채 마르지 않은 탁본 종이를 급히 뜯어서 가죽부대에 넣고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도망쳐 나왔다.비록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메샤 석비의 내용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성서고고학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이 발생했다.이 귀중한 석비가 현지인들의 손에 의해 파괴돼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워낙 단단한 돌이었지만,오랜시간 장작불을 지펴 돌이 뜨겁게 달구어졌을 때 찬 물을 끼얹으니 깨진 것이다.아마도 통째로 파는 것보다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파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이라는 속셈이었을 것이다.일설에 의하면 도대체 이 조그만 석비 안에 무슨 보물이 들어있기에 유럽의 강대국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그토록 애쓰는지 궁금해서 깨뜨렸다는 말도 있다.아무튼 현지의 베두인 족장들은 석비 조각을 하나씩 나누어 가졌고,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는 일종의 부적으로 삼아 곳간에 이 돌조각을 넣어두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독일은 석비 구입을 완전히 포기했지만,영국의 워렌과 프랑스의 끌레몽 가노는 부서진 조각들을 수집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한편,각자가 입수한 것들의 내용을 공동 연구하기로 합의했다.메샤 석비의 전문은 끌레몽 가노에 의해 1870년4월3일에 발표됐다.그해 일어난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이 이 석비와 무관하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체의 65% 정도만 회수된 메샤 석비는 1873년 결국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겨졌다.메샤 석비 발견을 계기로 모압 지역의 고고학이 탄생했다./김성(협성대 교수·성서고고학)



[사진 설명]

1. 메샤 석비
높이 110㎝,폭 60㎝ 크기의 이 석비에는 성서 외의 자료에서 처음으로 야훼라는 이름이 언급돼 있고,열왕기하 3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2. 야훼의 이름

메샤 석비의 열여덟번째 줄에는 선명한 글씨로 야훼의 이름이 씌어있다.복원된 부분이 아닌 본래의 석비 조각에 새겨져 있어서 더욱 신빙성이 있다.

3. 모압의 디본으로 가는 길

디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몇 개의 골짜기를 지나게 된다.해발 1천m 이상의 고원지대인 모압은 예로부터 양과 염소의 목축으로 유명했고,열왕기하 3장에는 모압의 왕 메샤가 양털 20만 마리분을 이스라엘에 조공으로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