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6월 13∼23일 극동방송과 서울항공이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란 테마로 지중해 연안에서 펼쳤던 성지순례에는 400여명이 참여했다. 낮에는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밤에는 고명진(수원중앙침례교회), 김요셉(원천침례교회) 목사가 인도하는 선상부흥집회가 열렸다. 또 전 국회의원 김명규 장로의 간증, 포항극동방송 어린이 합창단의 콘서트, 영화상영, 선상침례식, 그리스 문화의 밤 행사가 이어졌다. 국내 최초의 크루즈 성지순례를 동행 취재했다.
지중해 한 가운데서 눈을 떴다. 선실 창문으로 잉크빛 바다가 산맥처럼 출렁거렸다. 지중해 연안은 일출과 일몰이 짧다. 잠시 등 돌린 순간 환했던 하늘이 온통 어둠이다. 터키 이스탄불항을 떠난 크루즈는 승객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시속 30㎞로 다음 기착지 디킬리항에 정박했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은 고온다습했고 불편할 것만 같던 선실도 하루만에 익숙해졌다.
그리스식 춤을 배우느라 스텝을 맞추는 젊은이들,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참가한 중년부부, 카메라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는 백발의 노부부 등, 순례객 모두 국내 최초의 크루즈 성지순례를 통해 초대교회 시절 사도 바울의 선교열정을 느끼길 원했다.
11박 12일 동안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의 6개 항구에 기항하면서 버가모, 서머나, 에베소, 라오디게아, 두아디라, 고린도, 사데교회와 히에라폴리스, 밧모섬의 성요한 수도원 등 30여곳을 순례했다. 지중해 뱃길로 펼쳐졌던 바울의 선교 대장정은 소아시아 9개국 60여곳으로 추정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 여정을 살펴보면, 대부분 당시 로마 제국 내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였다.
#사도 바울의 회심
사도바울의 선교여정은 멀고 험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고후 11:23∼27)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 순례에 함께한 성서 고고학자 김성(협성대) 교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없었다면 바울의 선교여행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으면 기독인이 될 수 있다는 바울의 메시지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다. 바울의 선교로 인해 기독교가 로마에서 유럽과 아시아로 전해질 수 있었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혈기왕성했던 바리새파 청년 바울.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180도 바뀐 인생을 살게 된다. 터키 다소에서 출생해 예루살렘에서 랍비 교육을 받았던 그가 회심한 장소는 시리아 다메섹. 당시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가기 위해 이곳에 이른 그는 눈이 부셔서 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신약전서 27권 가운데 13권을 기록한 신학자이며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은 은혜의 길이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례하면서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이스탄불=국민일보 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