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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의 일생

영국신사77 2007. 9. 8. 22:10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출   생 :  1935년 10월 12일
출생지 :  이탈리아 모데나
학   력 :  모데나 사범학교
수상경력 :  1961년 이탈리아 아킬레 피레 국제콩쿠르 우승

 

 

파바로티 그는 지난 20세기 후반에 3대 태너중 1인이다.

전율마저 느끼게 하는 고음과 미성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로  20세기 후반 음악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테너의 제왕 루치아노 파바로티.

 

1991년 7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15만 인파 속에 열린 런던 하이드 파크 공연은 대공원에서 열리는 클래식 공연의 신기원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타고난 자질보다 후천적인 노력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믿고 있는 파바로티. 그는 곧잘, 바리톤이나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에 비해 더 다양한 표현력을 필요로 하는 테너에겐 후천적인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를 가리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라고 입을 모으지만 정작 그는 연습 때도 최선을 다해 노래 부르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그의 영혼을 울리는 섬세하고도 웅장한 벨칸토 미성은 1988년 독일 오페라 하우스에서 가진 "사랑의 묘약"공연에서 무려 1시간 7분동안 박수갈채를 받았고, 165번의 앵콜을 받아 기네스북에 오리기도 했다.

그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관객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박수와 환호속에서 그는 30여년의 음악세계를 이어 왔다.

 

은퇴설이 간혹 나돌긴 하지만 파바로티 자신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바로 생을 마감하는 그 날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노래하는 생을 살아가고 있다.

 

파바로티는 1935년 5월 12일 이태리 모데나에서 태어났다.
고향 모데나는 <페라리>자동차로 유명한 인구 10만의 소도시인데 이제는 그와 전쟁고아들을 위한 "파바로티와 친구들" 공연을 개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음악인들에게 더 유명해졌다.

"이태리인은 개구리 울음소리에서도 오페라의 아리아를 연상한다"라는 바그너의 표현에 걸맞게 도니제티, 베르디, 풋치니 등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들의 고향이기도 한 이태리 10년만에 태어난 '집안의 유일한 사내아이'인 그의 출생은 시작부터가 오페라 무대의 주인공처럼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의 음악인생은 오페라를 광적으로 애호하는 테너 음역을 가진 그의 부친과 함께 모데나 시 오페라 극장의 코러스로 시작하였다.
오페라계에는 1961년 라보엠에서 로돌포 역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브람스, 모차르트, 롯시니의 작품을 유년시절부터 접하면서 음악적 환경이 조성된 그의 음악적인 성장은 제빵업자인 부친의 음악사랑에 큰 영향을 받는다.
5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유년시절 체험한 전쟁(제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공포의 기억은 그로 하여금 생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끝나버린 커튼 콜… 하늘로 간 ‘신의 목소리’

김성현 기자 [조선일보]
입력 : 2007.09.07 00:2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9/07/2007090700041.html
끝나버린 커튼 콜… 하늘로 간 ‘신의 목소리’

  • 6일 타계한 ‘세기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는 이탈리아 북부의 모데나에서 빵 굽는 아버지와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그는 정규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 대신 9살 때부터 마을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했고, 소년 시절에는 엔리코 카루소와 티토 스키파 등 아버지가 모았던 음반 속의 가수들이 그의 ‘성악 선생님’이었다. 축구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한때 프로 선수가 되기를 진지하게 꿈꾸기도 했다.

    19세에 고향에서 개인레슨을 받으면서 테너로서의 재능을 깨우쳤지만, 처음 6년간은 연주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시골 마을에서 독창회를 갖는 것이 고작이었다. 파바로티는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시간제 교사나 보험 회사 직원으로 일하며 정식 무대에 설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테너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26세)에 파바로티는 푸치니의 ‘라 보엠’ 가운데 로돌포 역으로 오페라무대에 데뷔했다. 4년 뒤 그는 소프라노 존 서덜랜드의 공연에 출연하면서 세계 진출 기회를 잡았다. 이듬해인 1965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과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잇따라 데뷔했다.

    1972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열린 도니제티의 오페라 ‘연대의 딸’ 무대에서는 거침 없이 ‘하이 C(세번째 옥타브의 도)’ 음을 9차례나 쏟아냈다. 청중의 박수에 화답하기 위해 무려 17차례의 커튼 콜을 받으면서 당시 이 오페라 극장의 기록을 깼다.

    든든한 체구를 바탕으로 아무런 무리나 왜곡 없이 고음까지 곧바로 목소리를 올려보내는 그에게 이때부터 ‘하이 C의 제왕’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1988년 독일에서 열린 오페라 ‘사랑의 묘약’ 공연에서는 박수가 1시간 7분이나 쏟아졌고 165차례의 커튼 콜을 받으며 기네스 북에 오르기도 했다.

    파바로티는 1990년대부터 전통적인 오페라 극장만이 아니라 대형 야외 무대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클래식 음악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는 호평도 나왔지만 지나친 상업주의에 휩쓸렸다는 비판이 함께 따라다녔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그가 불렀던 푸치니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테마 곡으로 지정됐고,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67), 호세 카레라스(61)와 함께 무대에 선 ‘스리 테너(Three Tenors) 콘서트’는 이탈리아 월드컵 전야제부터 월드컵을 기념하는 대표적인 음악 행사로 자리 잡았다.

    ‘스리 테너 콘서트’는 다시 세계 투어와 음반 발매로 이어지며 수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 이 기록으로 다시 파바로티는 기네스 북에 올랐고,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는 ‘세계 3대 테너’(빅 3)로 불렸다.

    파바로티는 대중음악가수들과 잘 어울렸다. 팝 가수 엘튼 존·스팅 등과는 UN 기금 마련을 위한 ‘파바로티와 친구들’ 활동을 펼쳤다. 1991년 런던 하이드파크 공연에는 15만명의 관객을 운집시켰고, 지난해 2월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서도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로 전 세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기념한 ‘한반도 평화 콘서트’를 비롯해 수차례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말년에는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36년간 함께 활동했던 매니저 헤르베르트 브레슬린과 2002년 결별했고, 브레슬린은 2004년 ‘왕과 나’라는 책에서 파바로티의 악보 읽는 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2003년에는 35세 연하의 개인 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식을 올렸다. 무명 시절인 1961년 결혼한 부인 아두아 베로니와는 2000년 이혼하면서 도덕적 비난을 초래했다.

    평생의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도밍고가 67세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서면서 120여 개까지 배역을 늘리고 있는 데 비해, 파바로티는 상대적으로 ‘라 보엠’과 ‘사랑의 묘약’ 등 몇몇 이탈리아 오페라에 역할이 한정됐다는 지적도 받았다. 하지만 ‘라 보엠’의 로돌포를 비롯해 자신의 배역에서는 당대에 필적할 만한 가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탁월한 성량과 음색을 선보였다. 도밍고는 “나는 항상 파바로티가 가진 ‘신의 목소리’를 존경한다”며 “파바로티 특유의 음색은 테너가 부를 수 있는 모든 음역을 소화한다”고 격찬했다.

     

    ◆파바로티 연보 

    ▲1935년 10월 12일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서 출생. 부친은 오페라광이자 아마추어 테너.
    ▲1954년 사범학교 졸업 후 개인교습 받으며 성악가 준비.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의 스승이기도 한 에토레 캄포갈리아니 사사.
    ▲1961년 레지오 에밀리아의 작은 콩쿠르에서 우승.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데뷔. 첫 부인 아두아와 결혼.
    ▲1962년 툴리오 세라핀이 지휘하는 ‘리골레토’에 발탁. 1963년 코벤트 가든(영국), 1965년 라 스칼라(이탈리아), 1968년 메트로폴리탄(미국)에 데뷔.
    ▲1966년 영국에서 오페라 ‘연대의 딸’ 중 9번 하이 C가 등장하는 아리아 ‘친구들이여, 오늘은 즐거운 날’을 120년 만에 원래 악보대로 불러 화제.
    ▲199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첫 ‘스리 테너 콘서트’. 이후 야외 공연장이나 경기장의 대형 리사이틀, ‘파바로티와 친구들’ 같은 콘서트에 주력.
    ▲2003년 비서 출신의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두번째 결혼.
    ▲2004년 3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토스카’ 공연 앞두고 마지막 오페라 무대라고 선언. 하지만 2005년부터 세계 고별 투어.
    ▲2006년 3월 브라질 투어 앞두고 장기입원하면서 일정 취소. 그해 7월 췌장암 수술.
    ▲2007년 9월 6일 고향 자택에서 췌장암으로 사망.

 

 

 

                 하늘로 간 `천상의 목소리`… 파바로티 타계 [조인스]

J-Only
황금의 테너’ ‘하이 C의 제왕’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6일 타계했다. 71세.

그는 그때까지도 오페라 무대에 서면서 ‘최장수 테너’로 인정받았다. 주제페 디 스테파노는 53세, 프랑코 코렐리는 55세때 은퇴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파바로티는 지난해 7월 췌장암 수술을 받았으며 지난달 고열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가 2주전쯤 모데나의 자택으로 퇴원했다.

[사진=AP]
‘ 플라시도 도밍고(65), 호세 카레라스(60)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려온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모데나 태생이다. 19세때부터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시작했다. 1961년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공식 데뷔했고 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성악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오페라 뿐만 아니라 런던 하이드파크, 뉴욕 센트럴파크 등 대규모 청중을 위한 야외공연을 이끌었다. 열렬한 축구광이기도 한 그는 1990년부터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전역에서 ‘쓰리 테너 콘서트’를 열었다. ‘쓰리 테너 콘서트’에서 부른 푸치니의 ‘투란도트’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199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월드컵 경기의 주제가로 불려졌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파바로티 하면 생각나는 노래가 돼 버렸다. 파바로티는 지난해 2월 10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이 노래를 불러 기립박수를 받았다. 췌장암 판정을 받기 직전의 일이다.

‘쓰리 테너 콘서트’는 LA, 도쿄, 파리, 서울, 요코하마 등지에서 열렸다. 서울에서는 2001년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렸다.

1993년 ‘전쟁고아(War Child)재단’을 설립, 94년부터 자신의 고향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에릭 클랩턴, 스파이스 걸스, 머라이어 캐리, 리키 마틴 등 유명 팝가수들과 함께 ‘파바로티와 친구들’ 공연을 이끌면서 공연ㆍ음반 수익금을 기부해왔다.

파바로티는 다이애나 영국 황태자비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노래를 불러달라는 초청을 받기도 했지만 “너무 슬퍼서 목소리가 잠길 것 같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파바로티가 남긴 명반으로는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미미 역),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녹음한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1972년, 데카) 등이 있다.

파바로티는 무대 위에서 땀을 닦기 위해 대형 타월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형 타월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 버렸다. 이것은 최고음(最高音)이 갈라지지 않도록 행운을 빌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타월을 걸치고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3년 미국 미주리 공연에서부터다. 파바로티는 1992년, 1993년, 2000년에 내한 독창회를 했다.

파바로티는 어떤 사람?

-데뷔: 1961년 4월 28일 푸치니‘라보엠’의 로돌포 역(레지오 에밀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데뷔: 1965년 푸치니‘라보엠’의 로돌포 역

-즐겨 불렀던 오페라 배역: 로돌포(푸치니‘라보엠), 네모리노(도니제티‘사랑의 묘약’), 리카르도(베르디‘가면 무도회’)

-즐겨 마신 커피: 모데나 산 ‘카페 몰리나리(Caffe Molinari)’

-부모의 직업: 아버지는 제빵 기술자(아마추어 성악가), 어머니는 담배 공장 공원

-어릴 때의 꿈: 축구 선수

-가장 친한 성악가: 소프라노 미레나 프레니

-성악가가 되기 전의 직업: 초등학교 교사, 보험회사 외판원

-별명: ‘하이 C의 제왕’(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출연한 ‘연대의 딸’공연 이후 붙여짐)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2007.09.06 13:46

 

 

 

 

 

                                   칠순 파바로티, 아직도 여성 보면 눈에 '불꽃'

                                                                                      오클랜드<뉴질랜드>=연합뉴스
                                                                                                                           2005.11.11 07:2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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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파바로티
아름다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목소리 하나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거장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어느덧 칠순의 나이에 접어들었으나 젊은 여성들을 보면 아직도 눈에서 불꽃이 인다.

작별공연 순회여행의 일환으로 12일[2005.11.12.] 오클랜드 노스하버 스타디움 무대에 서기 위해 뉴질랜드에 도착한 파바로티(70)를 회견한 뉴질랜드 헤럴드 기자는 11일자 기사에서 파바로티에 대한 첫인상을 그렇게 썼다.

헤럴드 기자는 딱 벌어진 어깨와 근육질의 팔뚝, 짙은 눈썹과 얼굴의 거의 절반쯤을 뒤덮은 새까만 수염은 아직도 젊은이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검은 색 셔츠위에 걸친 오렌지, 자주, 초록, 분홍색이 뒤섞인 숄은 이탈리아인 특유의 정열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했다.

파라로티는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로 몰려든 뉴질랜드 언론사 기자들과 회견을 하면서 젊은 여기자가 뉴질랜드에 대한 인상을 묻자 “정말 당신은 아름답군요.....그리고 이 나라도...”라고 대답했다.

여기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정열적인 이탈리아인들이 그렇듯이 불꽃이 반짝이는 듯 했다.

젊은 소프라노 시모나 토다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레온 마기에라 등 일행들에 둘러싸인 채 기자들을 맞은 그는 공연을 앞둔 심경에 대해서는 언제나 기대감으로 설레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무척 떨린다고 고백해 거장의 인간적인 면모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나는 지금까지 일생 동안 첫 공연만을 해왔다”면서 “무대에 설 때마다 과거에 했던 것은 싹 잊어버리고 항상 처음으로 무대에 선다는 느낌으로 노래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오로지 현재에만 정신을 몰두해 불만스럽거나 후회할 일 같은 것은 전혀 남기지 않고 정열적으로 노래만 부른다”고 말했다.

그는 함께 공연하는 소프라노 토다로에 대해 “신인이나 마찬가지지만 내 고모가 토다로의 할머니이기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눠 가진 사이”라며 그녀의 재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순회공연 여행에는 부인과 2살 반 된 딸은 물론이고 파바로티의 어린시절 고향 친구도 3명이나 동행하고 있는데 평생을 함께 사귀어온 어린 시절친구들은 매일 아침, 그리고 공연을 앞두고 파바로티와 카드 게임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 홍보 관계자는 “카드 게임이 좋은 것은 목소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목소리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문제에 대해 파바로티는 꽤 까다로워 공연은 휴식을 위해 반드시 3일 정도의 간격을 두어서 하고, 꽃은 무대는 물론이고 분장실에도 가져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근처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담배 피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이 불거나 먼지가 이는 날은 밖으로도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는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15일 전까지도 정말 아름답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미모의 여기자가 손에 넣지 못해서 가장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냐는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당신”이라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