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靈論

3.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성령세례,,,

영국신사77 2007. 8. 17. 16:36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성령세례,,,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성령


  필자가 지금부터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글의 목적 가운데,

 

  ① 하나는 앞에서 다룬 한국교회 성령세례 이해의 배경, 특히 근대 성령운동의 세 조류 중의 하나인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이, 한국교회 내에서 어떻게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전통을 만들어 내어 현재까지 이르렀는가를 살펴 보고자 함이다.

 

  ② 둘째 목적은, 이 전통과는 대조되는 또 다른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이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전통을 개혁파 그룹 속에 어떻게 소개하여 발전시켜 왔는가를 조사하는 일이다. 그리고

 

  ③ 셋째 목적은, 이 두 노선간에 지속되어 온 신학적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은 없는가를 숙고하고자 함이다.

  개혁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장로교의 성령세례론을 다룸에 있어서, 필자는 한국의 여러 장로교단들 중에서 특히 예수교장로회 측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주로 예장 교단신학교들인 합동 측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나 고신 측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의 교수진들 내부에서, 성령론 논쟁이 발발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충분한 사료(史料)를 앞으로 제시할 것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장로교의 다른 교단들, 예를 들면 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이나 기독교장로회 측에서는 ‘성령세례’를 하나의 논쟁의 주제로서 다룬 문헌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목적들 가운데 결국 이 마지막 목적에 대해 다루는 일은, 단지 개혁파 뿐 아니라 웨슬리안-성결 그룹과 20세기 은사적 기독교를 총괄하여 한국교회 성령론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중요성을 지닌다고 본다.



                                                  내한 선교사들의 성령 신앙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 성령운동의 영향은 내한(來韓) 선교사들을 통해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교회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성령세례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조사함에 있어서, The Korea Mission Field는 근본적인 사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여러 자료들 가운데 최근의 저작으로서, 총신대학교 교수인 박용규의 ?평양 대부흥운동?(생명의 말씀사, 2000)은 방대한 량의 관계 자료들을 바탕으로, 당시 성령운동에 대하여 통찰력있는 조명과 평가를 했다. 특히 이 책의 부록을 통해, 그는 평양 대부흥운동을 전후로 한 성령의 능력과 임재 현상에 관계된 유용한 연표(年表)를 제공하였다.

  또한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인 박명수는,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마음의 성결과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수많은 성결운동의 일환이었음을 밝혔다. 그는 박용규의 ?평양 대부흥운동?에 대한 서평에서, 사실 대부흥운동은 성결운동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죄에 대한 철저한 자각, 거기에 대한 고백과 배상, 변화된 새로운 삶,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한 전도 등은 성결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서, 이 책이 이같은 대부흥운동의 신학적 성격을 좀더 심도있게 조명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평했다.

  부흥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도 내한 선교사들의 저술속에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19세기 성령운동의 전통이 장로교와 감리교를 막론하고 지배적이었다. 성령세례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초대 내한 선교사인 장로교의 언더우드(Underwood)나 감리교의 아펜젤러(Appenzeller)에게도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본다.

  언더우드는 신학교 재학 중 성결단체인 구세군에서 성령 체험을 한 사람이었고, 아펜젤러 역시 원래는 장로교인이었지만 감리교의 속회에서 성령 체험을 하고나서 감리교 신자가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1890년의 한 서신에서 말하기를, “죄 씻음에 대한 확고한 세례와 강력한 회개의 힘이 필요하다. 한국 교인들이 죄를 깨닫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표현하였다.

  미국 매코믹신학교 출신의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1890년 1월에 내한하여 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장을 지낸 바 있는 모패트(Samuel A. Moffett)는 1894년 한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는 그날은 나와 한 선생에게 기쁜 날이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거둔 첫 열매 가운데에 영혼의 수확이 분명히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게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경향이 짙었던 것은, 그들이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이나 개혁파 성령운동으로부터 받은 영향임을 알 수 있다.

  박용규는 1901년 미국 남감리회와 북감리회 선교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송도(개성) 지역의 한 신학회에서, 한국 성도들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임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이 한국 교회 성도들이 최초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일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후 1902년부터 1903년에 걸쳐 그 지역에서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성령의 분명한 임재와 권능이” 현시되었다. 1903년에는 송도 뿐만 아니라, 평양, 원산, 서울 등지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하    디

  캐나다 출신으로서 1890년에 내한하여 후에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제 2대 교장을 지내고 <신학세계>를 창간한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는 원산 기도회에서 말하기를, 한국 내에서의 자신의 선교사업이 실패했던 원인은, 믿음이 약하여 아직 성령 강림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그가 새로운 능력의 영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는지를 증거했다. 그가 선교사들과 또한 한국인들과 함께 자신의 체험을 나누었을 때, 그들도 역시 하디와 비슷한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디는 성령 체험을 하고 난 후, 한국 신자들과 나눈 자신의 경험담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성신이 내 안에 충만하신 실증을 가지고서, 나의 부끄러움과 혼미에 찬 얼굴로 나의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함과 또 그 상태가 빚어낸 모든 결과를 자복하니, 회중은 강한 죄의식과 회개의 신앙생활 체험상의 작용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단순한 신앙으로, 내가 성신의 은사를 받았음을 알려주었다”고 하였다.

  이같은 새로운 능력의 성령 체험을 한 선교사들은, 그 이듬해에도 원산에서 같은 성격의 기도 모임을 가졌으며, 그때에도 그같은 체험은 다시 일어났다. 마침내 성령에 감동된 하디와 또 다른 선교사들은 한국 전역에 걸친 사역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처럼 1907년 1월 평양에서의 대부흥운동은 우연하고 갑작스럽게 다가온 사건이 아니었다.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교회사 교수, 성령운동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