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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영국신사77 2007. 8. 10. 11:53
 

                            사라진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최재호 집사_뉴스엔조이 기자

 

 



  지난 주일 아침 예배드리러 교회당으로 가던 때 일입니다. 도로에 차가 별로 없는 한적한 주일 오전이지만, 시골에 사는 까닭에 교회당까지 꽤 먼 거리를 가야 합니다. 저희 가족은 종종 찬양 씨디를 들으면서 그 길을 가곤 합니다.

                                                 종종 차에서 찬송가 들어

  그날도 제 아들 녀석은 요절을 외우고 저는 찬양 씨디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멜로디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들려온 찬양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었는데 저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해 자주 부르는 찬양인데 최근 들어 예배나 집회 시간 등 공적인 자리에서 불러본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인가 싶어 아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 최근 이 찬양 어디에서 불러보거나 들은 적 있어?” 아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어릴 적에 많이 불렀는데 언제부턴가 예배 시간이나 모임에서 잘 안 불렀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왜 그럴까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곧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으로는 찬송가의 가사 때문이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찬송 가사의 요지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란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예수 믿는 것이 곧 노예 신분으로의 전락과 모든 사회적 물질적 권리를 포기하는 것, 바위틈과 땅 속에서 벌레 같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초대 교회 와 고대 교회 때 일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으로 살았던,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주를 위해 능욕 받고 고난당함을 당연하게 여겼던, 아니 영광스러운 훈장처럼 여겼던 분들이었고, 그런 믿음을 소유한 분들이었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따진다면 그런 믿음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예수 믿으면 병 낫고 부자 되고 행복하며 자손이 평안하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르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그런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이유 때문입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또 그분의 성품과 계획에 대해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영광과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것은 천지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들이고 드러내고 선포해야 할 인간이 범죄에 이르러 영원한 사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을 통해 동일한 목적을 이루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해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이름을 받고 드러내는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부차적’으로 천국을 소유함과 자녀 됨의 은혜를 우리가 받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구원받고 은혜 받은 자로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인해 존재하며,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를 가까이 하며 동행하는 삶속에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부자 되고 명예를 얻고 성공하는 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의 가르침 앞에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겸손히 무릎 꿇는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가시밭의 백합화가 가시에 찔릴 때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기복주의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고난과 시련이 있음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주님은 천국의 보상 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라는 찬송을 많이 불러야겠습니다. 예수 믿게 된 것 자체를,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에서 사랑받는 자녀로 선택 해 주시고 삼아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해야지, 다른 것을 ‘더’ 관심하고 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에서 이 찬송을 많이 듣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알려주는 ‘경고음’이라 할 것입니다. 말씀에서 떠난 그릇된 확신은 결코 우리를 바르게 세울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으로 인도 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예수 믿는 것은 우리에게 고생이 되고 아픔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일이며 우리의 존재 목적에 충실한 삶 입니다. 의미 있는 아픔이며 수고인 까닭에 하늘에서 상이 큰 일입니다.

                                        고난의 의미 다시 생각해

  주변에서 이 찬송을 더 많이 부르고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계획 가운데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cj8412@newnjoy.co.kr

 

 

 

 

출처 : 예수가좋다오  |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