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황제의 기념비와 초상조각
여러분은 '로마(지도)'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세요? 개선문, 콜로세움, 로마 황제…. 바로 그런 것이 로마의 유산입니다.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영토확장과 그것의 유지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를 하면 개선문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전쟁에 승리한 후 신전을 지은 것과 큰 대조를 보이죠? 그리스인은 승리 후 신에게 감사드렸다면 로마인은 이를 황제의 업적으로 기린 것입니다. 티투스 황제(Titus: )의 개선문엔(도1) 그들이 예루살렘 점령 후 전리품을 들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부조를 새기고(도2), 아치 안에는 독수리로 로마황제를 상징하였습니다(도3). 로마인에게는 승리와 개선이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306-337)는 4세기에 그의 개선문을 축조하면서 이전의 현제(賢帝), 아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시대의 조각을 그의 개선문에 붙였습니다(도4,5,6). 이전 현제의 위업을 계승한다는 암시겠지요.
* 그림을 크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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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도1의 부분<티투스의 신격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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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315년 대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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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5 대리석, 지름 340cm, |
130-13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도4)의 개선문에 부착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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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6 180-190년경에 제작 |
(도4)의 개선문에 부착됨, 대리석, 높이 314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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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의 대상은 남녀노소가 다 포함되지만 우리 수업에서는 로마초기부터 4세기경까지의 황제초상을 살펴보겠습니다. 황제의 초상들은 각 시대가 어떠한 지도자를 원하였는지 잘 보여주어서 사회의 변천까지 느낄 수 있으니까요.
도14의 초상은 기원전 82년부터 4년 간 로마를 통치하였던 독재자 실라(Silla: 138-78 B.C.)의 초상입니다. 독재자로서의 권위보다 마른 얼굴에 집요한 성격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어서, 그리스의 인물상과는 매우 다른 로마의 초상 전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삼두정치시대를 마감하고 황제시대로 접어들면서 실제를 직설적으로 나타내던 로마의 초상방식은 점차 그리스 헬레니즘 양식을 가미하고 있습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제위27B.C.-14A.D.(도15))는 섬세한 얼굴에 예민한 성격의 개인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만 주름까지 나타내던 이전의 로마초상과 달리 얼굴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국가를 황제체제의 로마의 평화시기(Pax Romana)로 정립시키는 시기에 그리스방식을 적용시킴으로써 황제를 정통화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玉>(도16)은 이 시대 헬레니즘적 성격의 기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투구를 쓴 로마의 의인화 옆에서 그리스 영웅같이 반 누드로 있고, 우주의 상징인 오이코우메네(Oikoumene)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방패를 딛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옥좌아래엔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있으며, 아래 단엔 로마군들이 적을 포로로 삼는, 즉 승리의 순간을 새겨 넣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이상화시키는 이 모든 내용들은 우아하고 세련된 헬레니즘 양식으로 잘 포장되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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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4 <실라초상> |
기원전 80-75년,대리석, 높이 26cm |
베네치아 고고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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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5 <아우구스투스 황제초상> |
기원전 35-29년, 대리석,높이 37cm |
로마, 알바니 콜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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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6 <아우구스투스 玉> |
15-37년경, 카메오, 19×23cm |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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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 로마는 그들이 정복한 변방의 민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 황제 161-180년 A.D., 도21)는 그의 『명상록』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의무였음을 토로하며, 전쟁의 광경을 '뼈다귀를 위해 싸우는 인형들'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미술엔 특히 이러한 비참함이 강하게 베어있습니다. 그의 기념주엔 포로를 참수하는 끔찍한 광경이 묘사되고(도22), 그의 시대에 제작된 또 다른 부조의 장면은 적장이 아들과 함께 항복하는 장면을 처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도23,24). 눈동자와 머리칼, 그리고 옷자락을 깊게 파는 표현주의적인 조각기법은 참담함을 나타내는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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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
<안토니나 기념주>부분, 180-192년, 대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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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2 <포로들을 참수하는 로마군>, |
<안토니나 기념주>부분, 180-192년, 대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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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3 <적장의 투항을 받는 아우렐리우스 황제>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부분,,180-190년 |
높이314cm, 대리석,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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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4 도23의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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