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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개선문(81)의 부조

영국신사77 2007. 7. 25. 19:51

                                                             티투스 개선문(81)의 부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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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함락(70) 때 약탈한 7갈래의 촛대와 진설병(陳設餠) 탁자,

신성한 나팔 등의 성구(聖具)를 들고 로마에서 개선 행진을 벌이는 모습

 

 

                                            개선문 (凱旋門) - triumphal arch


  1개 이상의 아치 통로가 있는 기념비적 구조물.

 

  중요한 사람이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다. 외따로 세우기도 하지만 흔히 길 양쪽에 걸쳐지도록 만들며 개선행진을 위한 것은 대부분 길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개선문은 고대 로마 건축에 속하지만 그 기원과 의미는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도시 성문이나 성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립적 구조물이었으며 로마군이 승리를 거둔 뒤 로마의 성스러운 도시구역(포메리움)에 들어가기에 앞서 통과해야 했던 포르타 트리움팔리스(Porta Triumphalis)와도 뚜렷이 다르다. 개선문의 기본 형태는 아치로 연결된 2개의 기둥 위에 아티카(attica)라고 하는 상부구조를 씌운 것으로, 아티카는 조각상(彫刻像)을 놓는 대좌(臺座)로 구실했고 기념적인 문구가 새겨지기도 했다. 초기 개선문의 아티카에는 개선마차를 탄 승리자상이 많으나 나중에 만든 것은 황제상들뿐이다. 따라서 개선문은 아주 중요하고 명예로운 일을 기념하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개선문에 관해 언급했던 고대 작가인 대(大)플리니우스(AD 23~79)도 그렇게 해석한 바 있다.

공화정 이후에 지은 개선문은 거의 없으며, 조각상이 있는 3개의 개선문이 로마에 있었으나 그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의 개선문은 제정시대(BC 27~AD 476)에 세워진 것이다. 4세기초 로마에는 이런 기념물이 36개가 있었으며 이 제정 양식 구조물은 때로 높은 중앙 아치가 양쪽 아치를 거느리는 세 아치꼴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런 개선문은 정면이 대리석 기둥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아티카에는 장식된 코니스(처마돌림띠)가 붙어 있었으며 아치통로와 옆면에는 황제의 승리와 업적을 묘사하는 그림을 새겼다. 오늘날 로마에는 3개의 개선문이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승리를 묘사한 부조가 새겨진 티투스 개선문(81)과 파르티아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203~205)이 있으며 도미티아누스와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썼던 여러 재료를 뒤섞어 장식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개선문(312)이 있다. 그 밖에 수사·아오스타·리미니·폴라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개선문과 안코나· 베네벤토에 있는 트라야누스 개선문, 트리폴리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선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랩티스 마그나에 있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개선문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지어진 개선문 가운데는 나폴리에 있는 알폰소 1세 개선문(1453~70), 파리에 있는 17세기의 생드니 문과 생마르텡 문, 그리고 장 샬그랭이 지은 '개선문'(1836)이 유명하다. 런던에 있는 존 내시의 마블아치(1828 설계)와 하이드파크코너아치(1828 설계), 뉴욕 시에 있는 스탠퍼드 화이트의 워싱턴아치(1895 완성)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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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개선문(81)의 부조, 말 4필이 이끄는 이륜 전차에 오른 티투스

 

 

 

 

 티투스 개선문(81)의 부조 ②

 

 

                                                         티투스 (Titus)


 

  정식 이름은 Titus Vespasianus Augustus. 본명은 Titus Flavius Vespasianus.

39.12.30~ 81. 9. 13.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의 황제.

 

  짧았던 통치기간(79~81 재위)중 국고를 마구 낭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국고뿐만 아니라 자기 개인 재산도 가리지 않고 마음껏 사용했던 그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79)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가 멸망하자 캄파니아에 지원을 보내기도 했으며, 80년의 대화재가 일어난 뒤 로마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을 완성했다. 준공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축하행사를 벌였다.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근무한 뒤 유대 지방에서 지내며(67) 아버지 밑에서 보병 레기온(군단)을 지휘했다. 네로 황제가 죽자(68) 황제가 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제위 계승자가 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그에게 유대 전쟁의 지휘를 맡겼다.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의 원정은 예루살렘의 점령과 파괴로 절정에 달했다. 지금도 로마 광장 입구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81) 것이다.

 

 71년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호민관 권한(이것은 황제나 제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징표였음)을 부여받은 그는 73년 아버지와 함께 켄소르(감찰관)를 지냈고 몇 차례 공동 콘술(집정관)이 되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권력구조에서 군사적 오른팔 역할을 한 그는 점차 민심을 잃었고, 헤로드 아그리파 2세의 누이동생 베레니케를 정부로 삼으면서 더욱 로마인들의 신망을 잃었다. 로마인들은 여전히 클레오파트라를 기억하고 있었고, 동방 왕녀와의 혼인은 로마인들로부터 거부감을 사는 처사였다. 이때문에 그는 2번이나 그녀를 쫓아버려야 했다. 79년 티투스는 제위 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역모를 진압하기도 했으나, 아버지가 죽자(6. 23) 아무 소란 없이 즉각 제위에 올랐다. 로마의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가리켜 잘생기고 교양도 있으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출처 : 반딧불이  |  글쓴이 : 반딧불이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