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Rome 이태리 歷觀 & 聖地순례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영국신사77 2007. 7. 21. 18:01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영)Vespasian. 정식 이름은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본명은 Titus Flavius Vespasianus.

 AD 9. 11. 17(?) 라티움 리에티~79. 6. 24.

  로마의 황제(69~79 재위, 10년간).

 

                                                                개요

 

 

베스파시아누스, 오스티아에서 발견된 흉상, 로마에 있는 Museo Nazionale ...
비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내전에서 승리해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가 되었다. 그는 재정을 개혁하고 제국의 통치를 공고히 하여 정치를 안정시켰으며 로마의 대규모 건축공사를 추진했다.

 

                               초기생애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 또한 에퀴테스 계층에 속했으나, 원로원에 들어간 오빠가 1명 있었다.

 

  초기 시절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형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그늘에 가려 지냈다. 그의 형은 출세를 거듭해 48년경 도나우 지역의 중요한 지휘권을 맡았으며, 네로 치세에는 수년 동안 황실 근위대장을 지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형을 따라 원로원에 들어가기 전에 많이 망설였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출세는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크레타에서 콰이스토르(재무관)를 지낸 뒤, 그는 큰아들 티투스가 태어난 해인 39년 법이 정한 가장 이른 나이에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 칼리굴라(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환심을 샀으며, 다음 황제 클라우디우스 때는 해방노예 출신의 권력자 나르키수스의 후원을 받았다.

 

  43년 브리튼 침공에 참가한 메드웨이 강의 도하(渡河)에서 뛰어난 공훈을 세운 뒤, 그는 선봉부대의 좌익을 맡아 아일오브와이트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멀리 데번까지 여러 부족을 정복했으며, 20개가 넘는 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이같은 공적으로 그는 개선식을 치렀고, 2가지 성직에 임명되었으며, 51년에는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그러나 5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죽음으로 권력을 잃게 된 나르키수스가 자살하자, 이후 한동안 아무런 직책도 얻지 못했다. 63년경 그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엄격한 재정 운영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샀으며, 한번은 지나가던 중에 사람들이 그에게 순무를 던진 일도 있었다. 그가 개인적 치부를 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으나, 이후 평생 동안 그에게는 탐욕스런 인물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66년 가을에는 네로를 수행하고 그리스로 갔다가 황제의 예술 공연중에 잠든 실수를 범했으나, 67년 2월 별 탈 없이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유대는 그 전 해에 로마군이 2차례나 대참패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유대에는 이전에 군단급 병력이 주둔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지휘관 임명은 이례적인 조치였다. 그는 대규모 보조병력과 함께 3개 군단의 병력을 할당받았다. 이같은 조치의 이면에는, 그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인물이라는 고려도 작용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장수였지만 하층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네로의 통치에 도전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네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같은 판단이 확실히 옳았다. 그는 67, 68년 2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68년 6월 네로가 죽자, 그는 이내 전투를 중단했다.

 

                                                     권력투쟁

 

  그가 전투를 중단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며, 이와 함께 아들 티투스를 중개자로 삼아, 인접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와 모종의 의견 조정을 했다. 두 지휘관 사이에 무슨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후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은 이미 권력 장악을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표면에 내세운 주장은, 유대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새 황제 갈바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형식은 타당한 것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정치적 고려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결국 새 황제 갈바를 인정하기로 했다. 갈바의 귀족 혈통은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베스파시아누스 같은 사회적 지위로서는 감히 맞서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머물러 있었고, 다음 겨울에 갈바에게 보내는 축하 사절로 티투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티투스는 도중에 코린트에서 갈바의 살해 소식(69. 1. 15)을 듣고 그 길로 돌아왔다. 이제 이탈리아는 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주요한 제위 경쟁자들인 오토비텔리우스는 모두 베스파시아누스가 한 번 맞서볼 만한 인물들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후 취한 행동은 정확한 시기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확실한 것은 오토가 패배해 자살한 4월 16일 직후, 그가 지지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7월 1일 사전에 꾸민 계획에 따라 이집트의 2개 군단이 그를 황제로 선포했으며, 며칠 후 시리아와 유대의 군단들이 그뒤를 이었다. 이후 제국의 도처에서 같은 반응이 있었던 것은 결코 사전계획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군사혁명이 비텔리우스의 실정(失政)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비텔리우스는 겨우 7월 중순에야 로마에 도착했음).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는 한여름에 유대인들을 상대로 단기간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가 이끄는 원정군을 디라키움(두라초)으로 파견해 그곳에서 함대와 합류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로마에 대한 곡물 보급을 중단시켰다.

 

  8월중 도나우 지역 군대가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그 지역 군단 지휘관의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5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해, 크레모나 부근에서 비텔리우스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크레모나 시를 약탈했다. 이어서 안토니우스는 계속 승리의 행진을 벌이면서 남하해 12월 20일 로마에 입성했으며, 비텔리우스는 이때 자기 군대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의 처형을 막지 못했다. 사비누스는 소병력을 이끌고 카피톨(주피터 신전)을 점령하도록 파견되었다가, 그곳에서 비텔리우스 부대의 습격을 받고 처형당했다. 안토니우스의 침략과 파괴적 행동만 없었더라면, 베스파시아누스가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믿기 어렵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가 신속하게 로마로 건너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안토니우스에게 최후의 불운이었다.

 

                                                      황제 재위

 

  12월 21일 원로원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지위를 공식 승인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군사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군대가 그를 황제로 선포한 7월 1일을, 자신의 통치의 기점으로 꼽았다. 그럼으로써 이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전임자들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도 받지 못했던 많은 권한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갈바·오토·비텔리우스에게도 비슷한 권한이 주어졌는지, 또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후임자들에게도 그같은 권한이 계승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권한 규정 법령을 보면 명백한 독재권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조항이 들어 있다(→ 절대주의).

 

  그러나 어떤 법령보다도 그에게 더 중요했던 문제는, 자신의 치외법권적 권능(auctoritas)을 인정받고 벼락출세한 자기 가문의 위신을 높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등극을 예고하는 신성한 징조들을 주의깊게 퍼뜨렸으며, 자기 이름의 앞뒤에 여러 호칭을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재위중 두 해를 제외하고 매년 짧은 기간에 콘술(집정관) 직책을 겸임했으며, 두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를 콘술 자리에 여러 번 앉혔다. 재위기간 내내 자기 아들들이 차례로 제위를 계승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티투스는 아들이 없었음). 이같은 제위 세습문제를 놓고, 그는 76년에 처형당한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같이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원로원 의원들과 다투었던 것 같다. 그러나 헬비디우스와 그 동료들은 70년 초반에 이미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에 관한 전면적인 염려를 토로한 일이 있었다.

 

  70년 10월경 베스파시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돌아왔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자금을 마련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그는 황실의 토지를 투기꾼들에게 팔아넘기는 한편,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이집트인들의 원성을 샀다. 이어서 그는 국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제국의 재정수입이 약 3배 정도 더 필요하다고 선포하고 자신의 귀환을 전후해 재정조달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속주의 세금을 때로는 2배까지 늘렸으며, 그리스어권의 여러 속주와 도시에 부여했던 면세권을 취소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공유지를 무단 점유자들에게서 다시 빼았고 각양각색의 세금을 신설했으며, 이산(離散)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는 세금까지 로마 국고로 돌리도록 했다. 이같은 조치는 네로가 재정을 탕진하고 내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줄곧 베스파시아누스의 탐욕을 비난했다. 그러나 70년의 상황에서는 어떤 황제라도 그같은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모은 공공자금의 규모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그 자금으로 그는 로마 포룸(광장)과 평화의 신전을 지었으며, 네로의 '황금궁전' 터 위에 콜로세움 공사를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카피톨 신전의 복구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위기간 내내 일관되게 '흔들리는 국가를 먼저 안정시키고, 다음에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확고한 방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토목공사와 가난한 친구들을 돕는 데 많은 돈을 썼음에도, 그는 공공자금의 상당한 잉여분을 자기 후계자들에게 남겨주었던 것 같다.

 

  이같은 안정화 시책의 일환으로 군사문제에도 관심을 돌렸다. 첫번째 과제는 68~69년 내란 이후 흐트러진 군기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귀환 이전에 무키아누스는 비텔리우스가 크게 늘렸던 황실 근위대 병력을 대략 이전 수준으로 감축했으며, 변경에 배치된 군단을 재편해 비텔리우스 편에서 싸웠던 군사들을 위험성이 있는 지역에서 이동시켜 놓았다.

 

  동방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티투스는 70년 8월 예루살렘을 점령해 유대 전쟁을 사실상 종결지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라인란트에서 일어난 반란도 베스파시아누스의 사촌 페틸리우스 케레알리스가 진압했다. 그리고 몇몇 변경에서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독일 남부에서는 아그리데쿠마테스를 합병해 바젤에서 라인 강을 경계로 형성된 요각지대(凹角地帶)를 차단했다. 브리튼에서는 더욱 중요한 진공(進攻)이 이루어져,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간티아 왕국이 속주에 통합되었다. 웨일스 지역은 완전히 평정되었으며, 78년 그나이우스 아그리콜라 장군이 7년 동안 총독 통치를 실시해 로마군을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로 진출시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위 초기에 아들들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가 귀환하기 전 수개월 간 오만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했으며, 이 때문에 그후 내내 철저하게 하위 직책에 머무르도록 조치당했다. 티투스도 유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의 군대가 자신들을 이탈리아로 데려가줄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위험요인을 안고 있었으나, 그는 결국 혼자서 돌아왔다. 티투스는 독자적인 개선식을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에 실질적인 동반자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 콘술이 되었으며, 친위대의 사령관 직책까지 맡았다.

 

  73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켄소르(감찰관)가 되었다. 이 직책을 맡고서 그들은 속주의 지방행정을 광범위하게 재편한 것으로 짐작되며, 앞서 말한 세제개혁도 이때 실시되었다. 그들은 스페인 전역에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곧 스페인의 모든 도시 행정관들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것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제국의 재정수입도 늘어났다. 또한 그밖에 다른 곳에서도 로마 시민권이 폭넓게 부여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아울러 그들은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속주까지 망라해 로마 원로원에 많은 새 의원을 뽑아들였다.

 

  원로원과의 관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초기의 수개월 간 불화가 있었지만, 이후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말년에 원로원 활동을 시작한 역사가 타키투스가 보기에 그는 '역대 황제 중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해간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위험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자들에게는 무자비한 태도를 취했다.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와 연루된 '철학자들'이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했으며, 78년에는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가 처형당했다. 이 인물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활동 초기부터 가장 유능한 지원자였으나 ,티투스와 유대인 공주 베레니케 사이의 관계를 겨냥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여긴 도발행동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인적 특성

 

  그의 흉상을 통해 잘 알려진 투박하고 고집센 외모에 걸맞게,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즐겨 회상하던 비천한 출신성분 특유의 무뚝뚝하고 때로 거칠기까지 한 기풍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러한 기풍은 고된 일을 감당해내는 그의 대단한 능력, 일상생활의 소박함과 더불어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당대 귀족계급의 모범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기민하고 빈틈없는 야심가였다. 출발부터 재빠르게 강한 세력기반을 쌓았으며, 초기의 관직 임명은 대부분 친족관계나 과거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이루어졌다. 통치정책은 합리적이기는 했지만,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 같은 후기의 황제들과 비교해볼 때 별반 두드러진 독창성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이 보기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종식시켜 제국의 붕괴를 막은 인물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주화에 '팍스'(평화)라는 글자가 기본문양으로 쓰인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임종 때 그는 "아, 나는 신이 되는 것 같다"(Vae, puto deus fio)고 말했으며, 죽은 후에 즉시 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플라비아 도미틸라라는 여인과 결혼해, 아들 티투스·도미티아누스, 딸 플라비아 도미틸라(이후 신으로 모셔짐)를 낳았다. 부인과 딸은 모두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으며, 이후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처제 안토니아의 해방노예였던 예전의 정부 카이니스를 데리고 살았으나 그녀 또한 그보다 먼저 죽었다.

 

 

G. E. F. Chilver 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하여 티투스가 완성한 콜로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