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靈論

누가의 성령론- 노재관 교수

영국신사77 2007. 7. 23. 17:30
                                누가의 성령론 2005-08-30 10:08:46

                                                                                                                                 칼빈대학교 신약학 노재관 교수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성령'에 대하여 더욱 강조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누가는 '성령'이란 말을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일관성 있는 성령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핏츠마이어의 주장처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누가의 기독론과 구원론에 대한 적절한 이해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타툼은 누가의 사상 속에서 성령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이만큼 누가의 성령론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누가의 성령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누가는 '성령'에 대하여 아주 빈번히 언급하고 있다. 마가는 성령에 대하여 6번 언급했고, 마태는 성령에 대하여 12번 언급했다. 반면에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17번 성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사도행전에서는 57번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에 이렇게 성령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종종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언급의 문학적 구조

 누가는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일관성 있는 계획 속에서 성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성령에 대한 언급 및 성령의 사역에 대한 언급은 서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다.

 

 아래와 같은 대칭구조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의 사역과 관련하여(눅 1:15, 67, 80)
B.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눅 1:35, 41; 2:25, 26, 27)
C. 예수님의 공생애와 관련하여(눅 3:16, 22; 4:1, 14, 18; 10:21; 11:13; 12:10, 12)


 ※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연결고리(눅 24:49)
A'. 성령의 강림의 준비와 관련하여(행 1:2, 5, 8)
B'. 오순절 성령 강림 그리고 교회 탄생과 관련하여(행 2:4, 17, 18, 31, 38)
C'. 교회의 복음 증거 사역과 관련하여(행 4:8, 25, 31; 5:3, 9, 32: 6:3 등등)

 여기에서 A와 A', B와 B' 그리고 C와 C'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크게는 대칭구조 속에서 이야기 하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연결 고리로 누가복음 24: 49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예고해 주는 것이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성령의 이야기를 주로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를 따라 행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분이시고, 또한 증거 하는 분이시다. 예수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셨고, 그분은 능력으로 늘 예수와 함께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반면에 사도행전은 예수의 승천으로 인하여 다시 오시는 예수의 제2 자아로서의 성령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다시 오신 성령은 주로 교회의 사역, 즉 선교 사역과 관계되어 있다.

 

 이 교회 사역도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주로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성령의 사역이, 이제는 예수에 의해 복음 증거의 사면을 위임받은 교회와 늘 함께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의 계속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사역에 대한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성령을 '새 시대의 영'으로 제시한다. 성령님은 새 시대를 준비하시며, 새 시대를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새 시대를 세상 가운데 적용하는 교회의 사역을 주도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Ⅱ. 누가복음에서의 성령 

                                   1.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성령의 역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 1장에서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성령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누가는 먼저 세례요한의 출생과 관련하여 성령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 직무를 행할 때 천사가 요한의 출생에 대해 말했다:"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15).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재미있는 대조는 그가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왜 포도주나 독한 줄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는가. 이는 그것에 취할 수 있다는 것과 성령의 충만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 2:15-17과 에베소서 5:17 이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대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 지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술에 취하면 술에 지배를 당한다는 것이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누가복음 1:44에 의하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의 태 중에 있던 요한이 마리아의 태 중에 있는 예수를 알아차리고 기뻐 뛰어 놀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도 태 중의 요한이 마리아의 태 중에 있는 '주'를 알아차리고 기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성령이 태아에게 역사 하였다는 것이 확실하다. 본문의 "모태로부터"라는 말은 시편 22:10과 병행한다. 이 어구는 '출생 때부터' 또는 '출생 전에'라는 의미를 갖는다. 누가복음 1:41, 44과 '???'는 이것이 후자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라는 말은 상태나 행동의 계속을 의미하는 말로 '심지어' 또는 '이미'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미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아버지는 요한을 얻은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을 했다고 성경은 말한다(눅 1:67). 이 예언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셨다는 것과,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셨고, 요한이 지극히 높은 자의 선지자가 되리라는 예언이었다. 스가랴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성령의 충만과 관련이 있다. 이 예언으로 우리는 요한과 예수와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요한은 태어나면서 계속 성령의 충만 속에서 자라났다(눅 1:80). 누가가 세례요한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이유는 요한이 구속사의 중요한 장을 담담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을 예견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성령께서 메시야의 길, 즉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는데 역사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성령의 역사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알린 천사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말한다. 천사의 수태에 대한 언급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께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마 1:18).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의 수태 속에서 역사하신 성령의 역사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것처럼, 창조 시에 성령이 역사하는 것과 유사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와 예수의 잉태 사이에는 엄연한 구별이 존재한다. 탄생에 대한 기록에서 어떤 형태로 잉태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예수께서 잉태된 후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했는데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 속에서(눅 1:41)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눅 1:42~43)라고 예언을 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은혜 속에서 예수의 잉태를 인식했다. 그녀의 고백은 신적인 관점과 통찰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 태어난 후 결례의 날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만난 시므온 역시 놀라운 찬양으로 예수를 고백하고 있다. 시므온은 성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누가는 그가 철저하게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에 의하면, 성령께서 그 위에 늘 머물러 있어 왔다고 말한다(눅 2:25). 시므온은 늘 성령의 지시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는 성령의 지시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시므온이 예수를 만났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찬양을 했다.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성령의 인도 속에서 시므온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되었다. 성령은 바로 계시의 영이시며, 예수의 존재와 사역의 본질을 시므온에게 계시하신 분이시다.

 지금까지 생각해 본 것처럼 성령은 예수의 잉태, 엘리사벳 그리고 시므온을 통하여 강하게 역사하셨다. 이것은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성령께서 친히 증거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공생애 사역 속에서 역사하신 성령

 예수의 공적인 생애는 그의 세례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그 후로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셨다. 

                                            1) 공적인 생애를 위한 요한의 선포

 예수의 공적인 생애를 준비하는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했다. 요한의 선포의 주된 주제들 중의 하나는, 여호와의 종말론적인 진노가 곧 이스라엘 위에 임한다는 것이다. 이 종말론적인 진노는 구약적 배경 속에서 주의 날의 도래를 의미한다. 이 날은 구원의 날이기도 하고, 또한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가올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회개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도록 요청했고, 모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즉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권한다(눅 3:8).

 요한의 이런 행위로 인하여, 백성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한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요한은 이 선포를 통해 자기 자신과 예수를 대조하고 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는 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마가복음에는 '불'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에 오시는 성령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세례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문제는 '불'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로 요약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성령과 동격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시험의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심판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령과 불이 나란히 언급된 것은 종말론적인 정화와 심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요한은 에스겔 36:25 이하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말씀은 두 부분의 예언으로 되어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의 백성을 물로써 목욕시켜 정결케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새로운 영(하나님의 영)과 새로운 심장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예언인데, 바로 예수에게서 이것이 성취되고 있다고 요한은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전자의 성취로써 물로 세례를 주었고, 후자의 성취로써 예수를 소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예수의 세례

 요한의 선포에 이스라엘 백성은 반응을 보였다.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나오셨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신 것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마 3:14~15).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고 누가는 말한다(눅 3:21). 누가는 특별히 기도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세례 시에 예수께서 기도했다는 것도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졌다고 말한다(막 1:10). 이는 이사야 64:1의 말씀을 연상시켜 준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도록 비는 내용이다. 아마도 마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심으로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마태와 누가는 하늘이 열렸다고 말한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구약 선지자의 소명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겔 1:1). 신약과 유대 묵시문학에서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시작됨을 알리는 표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하늘이 열렸다는 이런 표현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강림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2)라고 말한다. 복음서 기록자들은 모두 이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수님께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유대교적 배경에서(구약) 볼 때, 성령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졌다. 구약은 또한 종말의 날에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는 날이 임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욜 2:28-32). 또한 메시야에게 성령이 주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사야 42:1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사야 63:14에 대한 LXX[70인역]의 번역은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성령이 주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인도했다". 그러므로 메시야 시대에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예수님께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며, 메시야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종말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냄을 받은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종말의 주로서 사역을 감당키 위해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받으셨다.

 성령은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오셨다. 누가는 '형체'라는 말로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객관적인 실체가 있었다는 것이고, 현상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였다는 것이다.

 

 물론 '비둘기 같이'라는 표현은 애매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비둘기가 성령의 상징으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둘기는 이스라엘을 상징했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리되시는 분으로 제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는 성령께서 이렇게 예수에게 임하심으로 이사야 61:1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이사야 42:1의 성취, 즉 하늘에서 나온 음성과도 일치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새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분이시다. 이제 예수는 새 이스라엘의 머리요 대표로 그의 백성을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곧 12제자를 선택하시고 훈련하시는 것이었다. 12제자는 새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약의 12지파를 대신하는 새 언약의 백성을 적절하게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70명의 또 다른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도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즉 70은 당시의 세계 국가들을 의미했다. 70인의 훈련도 결국 예수로 말미암아 세계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새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예수의 시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을 입으신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가셨고 시험을 받으셨다. 그분은 공적인 생애를 철저하게 성령에 이끌림 받는 삶을 사셨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림 받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한다.(마 4:1; 막 1:12; 눅 4:1ff.). 누가는 '?? ?? ????????'라고 말하는데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성령 안에서'가 된다. 어쩌면 이런 표현은 예수께서 성령에 의해 인도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령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주동사가 수동태이기 때문에 전치사 ??은 대리자로 인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령의 인도에 수동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광야는 맹수와 악령의 거처로 이해되었다(레 16:10; 사 12:43; 13:21; 34:14). 또한 광야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호 2:14~15), 종말의 메시야가 오는 곳이기도 하다(사 40:3). 그리고 광야는 고난의 장소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다. 이 40이라는 숫자도 역시 연단과 고난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재미있게도 마가는 예수의 시험 이야기를 기술하는 중에, 예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연상시켜준다. 즉 이사야 11:608; 65:25; 호세아 2:18~20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원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에덴 동산의 회복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아담 기독론에 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첫 아담은 시험에서 실패를 함으로 에덴 동산을 잃었고 쫓겨남을 당했다. 그 결과 세상의 질서가 깨어졌고 광야가 만들어졌으며 들짐승들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질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는 사단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낙원을 회복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천사들이 수종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천사들이 낙원에서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천사들이 광야에서 수종들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낙원을 회복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것은 제2의 아담으로서 예수께서 사단의 세력을 묶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사단의 세력이 예수에 의해 패배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것을 기대케 한다. 또한 예수의 승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준다. 원리적으로 에덴 동산이 회복된다는 것을 이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 즉 재창조의 사역이 예수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조 시에 여호와의 신이 수면에 운행한 것같이, 재창조의 사역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예수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며, 사단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부르신다. 그것은 바로 복음 증거와 귀신 축출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놀라운 일은 바로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이다.

                                                        5) 예수의 공생애

 예수의 공생애는 철저하게 성령과 함께 하는 사역이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성령의 권능으로 시작하셨다(눅 4:14). 예수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시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눅 4:18)라고 선언하신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복음의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후로 예수의 사역은 철저하게 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씀과 사역으로 증명하신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귀신 축출이었다(눅 11:20).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고(눅 10:21), 또한 성령을 구하는 자들에게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셨다(눅 12:13). 그리고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눅 12:10). 더 나아가 환난 중에 사람들 앞에서 마땅히 행할 일을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실 것을 말씀하셨다(눅 12:12).

 특별히 예수님의 중요한 언급은 누가복음 24:49의 말씀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이 구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연결하는 구절이다. 물론 이 구절에 '성령'이라는 명백한 말이 없다. 하지만 이 구절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과 내용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구약 성경에 약속된 종말론적인 성령을 언급하는 것이다(겔 36:27; 욜 2:28).

 

 이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은 본문에서 "내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육체로 살아 계실 때에 성령의 담지자였다. 즉 성령이 예수에게 임하여 그와 동행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예수는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cf. 요 16:7). 이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도 능력을 받게된다. 이는 모두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Ⅲ. 사도행전에서의 성령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불릴 만큼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기록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교회의 확장, 즉 선교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사역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예수의 사역을 계속 적용하시는 분으로 성령이 기술되고 있다.

                                                  1. 성령강림 준비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눅 24:49)의 성취를 준비하는 장면에,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사도행전 1:2에서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명하신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고, 4~5절에서는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것을 누가가 거듭 밝히고 있다. 5절에서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대조되고 있다. 이는 요한의 멧시지를 반영하는 것이다(막 1:8).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들의 관심은 지상적이고 국가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대답하셨다. 어떻게 보면 이 대답은 적절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즉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성령'의 도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복음 증거의 확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성령의 강림과 복음 증거를 통해 적용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온 땅에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구속의 적용인 선교적 사역을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선교적 사역으로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은 적용되는 것이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며, 그것은 온 세상의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점진적으로 확장됨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성령의 도래, 즉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을 제자들에게 준비시켰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했다.

                                               2.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

 오순절날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있었다. 그 날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모인 자들 위에 강림하셨다.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성령에 대한 언급을 상기시켜주고 있다(요 3:8). 바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한다(겔 37:9). 바람은 인간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인간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는 분이시다. 바람이 보이지 않고 또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도 그런 분이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성령의 강림의 표시가 바람 그 자체는 아니었다. 본문은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문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고 말한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출 3:2ff.).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상징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마 3:11; 눅 3:16). 이는 예수께서 심판과 정화의 사역을 행하시는 종말론적인 주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제 성령이 불 같이 임함으로 성령은 종말론적인 예수의 사역을 적용시키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성령이 오심으로 거기 모인 모든 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성취가 되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들은 성령의 주도적 사역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큰 일"(행 2:11)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각 방언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바벨의 저주가 풀린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예수로 말미암아 종말론적인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성령께서 적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될 것을 예표하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의 종말론적인 백성이 수없이 창조되고 모아질 것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오순절날의 베드로 설교는 주목해 볼 만하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성령이 오셨음을 선언한다. 이 성령은 예수로 말미암아 오셨다고 선언함으로, 베드로는 예수의 승귀를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고 선포한다. 이런 베드로의 선포는 예수로 말미암아 종말론적인 그 시대가 도래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선포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분명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 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38)고 대답한다. 이런 베드로의 선포는 구약 예언의 성취로서 예수의 사역을 이해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선포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했다고 누가는 말한다(행 2:41). 믿는 자들은 사도의 기르침을 받으며 서로 교제를 했고 함께 떡을 나누며 기도에 전념했다고 역시 누가는 진술하고 있다(행 2:42).

 

 이제 예수께서 이루신 사역의 터전 위에 명실상부한 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머리는 바로 예수님이시며, 모든 지체들은 예수 안에서 성령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

 한편 누가는 제자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행 2:43). 사도들을 통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은, 메시야 시대의 도래의 외적인 표지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에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표지로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그분이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후 보내신 성령의 역사로 예수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이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성령의 지도와 능력 속에서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고, 그분이 성령으로 통치하심을 기사와 표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요성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첫째,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세례 때에 성령의 오심과 병행한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 성령이 예수께로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셨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야 직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는 성령의 인도 속에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성령'과 '메시야' 그리고 '새 시대'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로 말미암는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받은 성령을 보내신 사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완성하신 구원 사건에 대한 보증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둘째,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승귀를 보여준다. 베드로는 이것을 그의 설교를 통해서 적절하게 제시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셨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선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하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예수를 높이셨다는 것이다. 오순절은 바로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③ 셋째, 오순절은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보여준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드디어 성취되었다는 것을 베드로는 분명히 제시했다. 이는 메시야 시대, 즉 종말론적인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처럼 '말세'의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구원 역사의 새 시대가 이 땅에 도래한 것이다.

  ④ 넷째, 오순절 성령강림은 재창조의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로 말미암아 재창조, 즉 새 생명의 백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선언이 바로 성령강림이다. 이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예수께서 이루신 새 언약이 적용됨으로 새 언약의 백성이 창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새 언약의 백성의 창조는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일을 위해 복음을 증거 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될 선교 사역을 언급하셨다(행 1:8).

  ⑤ 다섯째,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속사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성육신, 죽으심, 부활 등과 마찬가지로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즉, 단회적으로 성취된 구속 역사의 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3. 선교 사역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

 사도행전은 철저하게 성령께서 선교의 주체이심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주신 말씀처럼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되는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즉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1:8의 말씀의 성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에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의 복음화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고, 그 후 사마리아에 대한 전도를 기술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이것은 모든 복음 증거의 역사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인들을 통한 복음 증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이야기들을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 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선교의 주체로 전도자들을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선교의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누가는 두 서신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오심과 사역 그리고 그의 구원 사역 완성의 결과로서 성령이 오시고, 그의 구원 사역을 계속 적용시키고 계신 성령의 사역을 잘 제시하고 있다. 성령님은 지금도 신실한 자들을 통하여, 예수의 구원 사역을 적용시키고 계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