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과 성령론
-'언약신학과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인 결핍이나 능력의 결핍으로 보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능력의 결핍을 돕고 채워주는 추가적인 은혜로만 볼 때, 당연히 성령의 사역도 인간의 부족을 보충해주는 분으로 이해하게 된다. 부족한 능력을 부어주고 채워주는 신비한 영으로만 성령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가 능력의 결핍이 아닌 인격적인 죄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능력의 결핍을 돕는 추가적인 은혜가 아니고, 죽은 죄인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은혜라고 한다면, 성령의 근본적인 사역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기 전에, 우리의 부패했던 인격과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성령신학에 큰 혼란이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을 능력의 결핍을 돕는 능력의 필터로 조명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회복의 필터로 조명해야 할 것인지는 바로 성령과 관련된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의 종합적인 구도 속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의 종합적인 관계성을 무시한 채, 성령론만 따로 떼어서 말하게 되면, 성령은 자연스럽게 힘 없는 인간을 도와주는 신비스런 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자기부인이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순종의 삶 같은 것은 불필요하게 된다. 능력만 채워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받자 능력받자 하는 초월적인 사상들이, 거룩한 순종의 삶, 인격의 변화, 자녀로서의 영광과 명예 같은 주제들을 무시한채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속적인 “성령론”으로 가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개혁신학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기대하지만, 순종과 인격의 성화를 골자로 하지 않은 성령론과 초월주의는 인정하지 않는다. 성령의 궁극적인 역할은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능력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주권아래서 순종하면서 살도록 지어졌다. 성령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사람 안에서 역사 하신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일치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의 통치권(Lordship)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따라서 성령사역의 핵심은, 죄인을 거듭나게 하여,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에는 우선 순위가 있다.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열매, 그리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이고 순차적인 우선순위가 있다.
성령세례는 죄인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중생을 의미하며,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면서 변화되는 성품을 의미하며,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방편이다.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그 주권을 통해서 그 주권을 영화롭게 한다는 중심 주제가 성령론에 포함되어야 한다. 은사 일변도로 나가는 성령론은,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지 않고, 파워나 능력을 강조하여, 성화의 질서를 초월해 버리는 지나치게 초월적인 성향으로 나간다.
개혁주의 성령론에 의하면, 성령세례는 "보편"적이며, 성령의열매는 "보편-예외"적이며, 성령은사는 "예외"적인 성격을 갖는다. 성령세례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가장 우선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이다.
①첫째로, 성령세례를 통해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②둘째로,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도달해야만 하는 목표이다. 성품적인
변화는 다양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선 순위에서 볼 때 "보편-예외적"인 성격을 갖는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보편적인 신분만큼은 중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③셋째로, 성령의 은사는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예외적"인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순차적으로
볼 때 가장 우선순위가 낮은 것이다. 성령의 세례나 열매처럼, 누가 가진 것을 내가 못 가져도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칙은, 예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 순차적으로 밑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 중요성에 있어서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열매보다 밑이며, 성령의 열매는 거듭 나게 하는 성령세례보다 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있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밝혀진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항상 정비례 하지 않는다. 은사와 순종은 필연적으로 정비례 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가 좋은 사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분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성령세례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축복이요 선물이다. 성령세례는 바로 언약적 관계회복의 시작을 선언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세례(거듭남)와 성령의 열매(성품의 변화)는 “됨(being)”을 강조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일”(doing)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됨”이 “일”보다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은 “됨”을 무시하면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방편이 되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성령론의 최고 원칙이다. 더 나아가서 성령론과 기독교 세계관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진정한 성화와 영성은, 성도의 삶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주권사상(Lordship)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를 넘어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주권사상이 빠진 영성이나 종교적 체험을 개혁신학은 멀리한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영성이나 체험은, 순종 없는 제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언약신학은 “됨”(being)의 신학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묵상해보자.
알기 쉬운 조직신학 총론 <송영재 교수> 中에서
블로그 > 쉴만한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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