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영국신사77 2007. 6. 20. 15:38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이채윤 지음 Ⅰ 미래사>


  Ⅰ 어린 시절


록펠러가 태어난 시절은 

미국이 무서운 속도로 자본주의의 모험적 드라마를 펼치며 

초강대국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존의 아버지가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데 반해, 

신앙심이 무척 깊었던 어머니는 

어린 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록펠러는 어머니에게서 

강한 의지와 근면함, 근검절약하는 정신을 이어받았다.


록펠러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존, 너도 이제 여섯 살이 되었어. 

오늘부터 너 혼자서 교회에 다니도록 해라.”


그러면서 어머니는 존의 손에 난생 처음으로 

20센트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존은 그 돈을 받아들고 기뻐하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어머니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존, 그 돈을 꺼내보렴.”

존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돈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20센트는 분명 엄마가 너에게 준 거야. 

하지만 너는 이 돈을 함부로 다 써서는 안 돼. 

이 안에는 네가 하나님에 바쳐야 할 몫이 있거든. 

20센트 가운데 십분의 일인 2센트는 하나님의 몫이란다.”

 

어머니는 2센트를 따로 떼어 헌금 봉투에 담아주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것이 ‘십일조’라고 하는 것이고, 

앞으로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를 

반드시 따로 떼어 두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어린 시절 존은 집안일 외에도 이웃집 농부의 감자를 캐는 일도 거들어야 했다. 아들에게 자립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어머니가 일부러 고된 일을 시켰던 것이다. 며칠 동안 감자를 캐고 존은 생전 처음 돈을 벌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처음으로 번 돈을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어머니는 미리 준비한 듯한 두 개의 주머니를 존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작은 주머니에는 네가 번 돈 가운데 십분의 일을 넣었다가 하나님께 드려라. 나머지 돈은 이 큰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쓰고. 알겠지?”

존은 어머니의 말대로 두 개의 주머니에 돈을 나누어 넣었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학교에도 들어가기 전부터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철저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일기를 쓰듯 평생 철저히 회계장부를 썼고, ‘수입의 십분의 일 헌금’이라는 원칙을 지켰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후에는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십일조 전담 부서에 40명의 직원을 두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받은 가르침이 록펠러의 일생에서 약속의 말씀이자 가장 큰 유산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와의 세 가지 약속


록펠러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서 ‘어머니와의 세 가지 약속’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

2.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3. 교회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가 자서전을 낸 뒤 어느 신문기자가 물었다.

“회장님께서는 이번에 출간하신 자서전에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비결이 

어머니가 주신 세 가지 유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어머니에게 받은 첫 번째 유산은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용돈을 20센트씩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십일조 헌금을 해야 한다면서 

십일조 습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사업에 대한 모든 비전을 기도 중에 얻었고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내가 만일 그때 어머니에게서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나중에 백만 불을 벌었을 때에, 

십만 불이라는 십일조를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철저한 십일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중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엄청난 돈을 벌 때도, 

변함없이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많은 물질을 드리면서, 20년, 30년 후에 그것이 반드시 어마어마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경제학을 나는 철저히 내 어머니에게서 배웠습니다.”

 

 

                                                         Ⅱ 일찍 시작한 사업


 1855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의 소년 록펠러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꿈꾸던 사업가의 길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큰 포부를 펼치기 위해 사업을 배울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마침내 원하는 곳을 찾았고 그곳에서 일하는 법을 배웠고 사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록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일기를 쓰는 대신, 자신만의 금전출납부인 회계장부에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일 매일의 수입과 지출, 저축과 투자금, 그리고 사업과 자선금의 내역을 한 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작성해 나갔다. 매일 저녁 그 장부를 기록하며 자신의 하루 일과를 꼼꼼히 더듬어보는 한편, 다음 날의 수입과 지출을 따져보았다. 말하자면 장부에 적힌 숫자가 그에게는 하루하루의 기록이자 반성인 셈이었다.

그는 장부에서 늘어나는 자신의 재산을 보면서 항상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자신의 장부에서 수입이 늘어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내 수입이 늘어난 것은 내가 돈을 벌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할 줄 아시고 더 축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1859년 3월, 록펠러는 부둣가의 허름한 창고 건물에 ‘클라크 앤드 록펠러’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장의 문을 열었다.

그는 내심 자신감으로 가득 찼지만,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이 청년은 하나님께 겸손함을 달라고 기도했다.

“저 자신을 돌아보고 조심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항상 겸손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록펠러는 자신의 치밀한 성격을 최대한 발휘해서 상품의 구매와 판매 등 영업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록펠러의 헌금 액수는 놀랄 만큼 늘어났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벌어들인 돈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십일조를 드렸다

 

 록펠러는 교회에 헌금을 내거나 남을 돕는 일은, 보답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 해야 하는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돈을 결코 혼자만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1905년에 어느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록펠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내게 돈을 벌게 해주셨습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나는 내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서 그 돈을 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돈을 벌면 곧 그것을 다시 나누어줄 것을 아시고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려 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


“돈 버는 재능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 중의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을 받은 나는 원도 없이 돈을 많이 벌어보았지요. 이제 나는 양심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 돈을 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내린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이 말은 록펠러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선기관인 록펠러재단을 설립한 후에 한 말이다.

일찍이 자신에게 돈을 버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록펠러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여기고 평생 즐겁게, 열심히 돈을 버는데 매달렸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을 최상의 무기로 사용할 줄 아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자기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이다.


“엄청난 양의 석유는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은 록펠러가 석유사업에 성공을 거둔 후 한 말이다.

록펠러는 석유사업의 미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의 종교적인 신성함마저 띠고 있었다.


록펠러는 평소에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지만 용돈에 관해서는 무척 엄격했다. 아이들은 용돈을 타기 위해서는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해야 했다. 또 그렇게 받은 용돈 중 20센트는 매주 교회에 헌금해야 했다.

 

 Ⅲ 일생을 바친 석유사업


그는 석유사업을 시작하면서 원유를 생산하기보다는 그것을 정제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 저렴하게 수송하는 것에 큰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철도 회사와 리베이트 계약을 맺어 운송권을 장악했고, 송유관과 터널 설비들을 인수해 경쟁자들을 물리치면서 정열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는 동안 록펠러는 오직 석유만 생각했다. 옷은 항상 석유 냄새로 가득했으며, 집에 돌아와서도 사업 구상으로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그리하여 그가 이끄는 스탠더드 오일은 한 산업의 여러 분야를 모두 독점하는 최초의 기업으로 석유 시장의 95%를 독점하면서 전무후무한 부를 거머쥐었다.


록펠러의 성공에는 그의 주도면밀하고 세심한 성격과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록펠러는 기도를 통한 기적을 여러 번 일구어냈다.


록펠러는 많은 사람을 사귀지는 않았지만 한번 믿은 사람에게는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주었다. 그는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채용할 때는 신중을 기했고, 일단 채용한 뒤에는 과감하게 일을 맡겼다.

록펠러는 좋은 아이디어와 돈과 시간이 있다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어떤 사업도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모든 것을 맡겨라.”


록펠러는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했다. 그는 사업에 관한 한 석유 한 가지만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했다.

 

 

 Ⅳ 록펠러 제국


50대에 이르자 록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 전혀 예기치 않은 병마가 그를 덮쳤다. 오로지 사업밖에 모르고 30여 년간 몸을 혹사한 결과였다.

나중에 입원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는 몇 조각의 비스킷과 물로 식사를 대신해야 했다. 점점 미라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 세계 최고의 부자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에 백만 달러씩 벌어들이는 그의 수입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돈을 위해 살아온 그였지만, 결코 돈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록펠러에게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언론은 록펠러의 죽음을 걱정하기보다는 그 많은 재산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더욱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억만장자 록펠러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록펠러는 언론이 자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감을 느끼며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무서운 고통 속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이 부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뛰어왔을 뿐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비록 그동안에도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는 것은 물론 많은 자선사업을 해왔지만, 그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록펠러는 깨달았다.

돈만을 위한 인생의 목표는 곧 파멸이 길임을 비로소 깨닫고, 록펠러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록펠러는 새사람이 되어 돈을 버는 일보다 엄청난 재산을 자선과 기부에 쓰는 일에 더 시간을 투자했다. 그는 막대한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건강을 돌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부디 제 건강을 돌려주십시오.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벌어들인 돈을 세상을 위해 보람 있게 쓰고 싶어서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왔다. 록펠러는 이전의 건강한 몸을 되찾아갔고, 그의 생활도 점차 건강해졌다. 잠도 잘 자게 되고 음식도 잘 먹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 자신이 그동안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오로지 세계 최고의 회사를 만들기 위한 현세적 목표만 가지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1899년 이후부터 록펠러는 사업가가 아니라 자선사업가로 변모했다. 그는 더욱 신실하고 충심을 다해 하나님과 교회를 섬겼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가장 큰 변화는 록펠러의 얼굴에서 나타났다. 미소를 되찾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재산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자선사업만을 하리라 결심했다.

그는 자선사업을 위해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선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록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수입의 십분의 일을 꼬박꼬박 떼어 교회에 헌금해왔다. 그리고 젊은 시절 직장을 다닐 때부터 자선사업에 상당한 돈을 기부했다. 또한 침례교회에 헌금한 액수가 수백만 달러에 달했지만, 그것은 조금씩 꾸준히 헌금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전 재산을 바치는 자선사업임을 록펠러는 깨달았다.


록펠러가 자선사업을 전개하기로 결심을 굳힐 무렵, 미국사회에서는 스탠더드 오일의 트러스트를 해체시키라는 압력이 거세졌다. 스탠더드 오일의 비판자들은 록펠러의 자선이 자신의 거대한 부를 지키기 위한 연막전술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스탠더드 오일의 대규모 사업을 중단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록펠러가 자선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그 일에 매달리자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록펠러는 가는 곳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일주일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1만 5천통이 넘게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록펠러는 자선사업에도 사업만큼의 주의력과 집중력, 면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반드시 필요한 곳에 자금이 지원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록펠러는 자신이 벌인 자선사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께 축복의 씨를 뿌리면서 반드시 20년, 30년 뒤에 어마어마하게 결실을 맺을 것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의 경제학을 철저히 내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록펠러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재산을 자선사업으로 지혜롭게 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굳게 믿었다.


1911년,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해체를 결정했다.

결국 거대한 스탠더드 오일은 34개의 개별회사로 해체되었고 각 회사의 투자자들은 비례에 맞춰서 지분을 배당받았으며, 록펠러는 진정한 의미의 은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해체는 묘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주주들이 각자의 지분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사상 최초로 월스트리트에서 거래되기 시작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의 주식이 유례없는 상종가를 쳐서 이전의 트러스트 가치를 극적으로 부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의 주식 가치는 5개월 만에 4배로 늘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2억 달러였던 록펠러의 총재산은 트러스트 해체 이후 10억 달러를 넘어서게 되었다. 트러스트 해체가 오히려 그의 재산을 5배나 부풀려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록펠러는 이제 어느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록펠러는 이미 1909년부터 5천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위탁하는 서류에 서명함으로써 인류의 복지증진을 목표로 하는 자신의 의사를 밝힌 바 있었다. 

그는 1913년 록펠러재단의 설립인가가 나자 약속대로 ‘세계 인류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라는 단서만을 붙인 채 1억 달러를 내놓았다.


록펠러재단이 내건 주요한 과제는 

기아 근절과 인구문제의 해결, 대학의 발전, 미국 내의 기회 균등 및 

문화적 발전이었다.


록펠러는 자선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네 개의 대규모 비영리 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록펠러 의학연구소, 일반교육위원회, 록펠러제단, 로라 스펠먼 록펠러 기념재단이다. 


그는 점차 그 사업의 운영을 외아들 록펠러 2세에게 맡겼다.

록펠러는 1917년 아들에게 재산을 이양하기 시작해서 1921년 이양을 완료했는데, 

그 금액은 그가 록펠러재단에 기부한 것과 같은 5억 달러에 달했다. 

자기 수중에는 단지 2000만 달러의 돈만을 남겼다.


록펠러 2세는 아무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5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지만, 

자신은 그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이라는 말을 곧잘 했다. 

그리고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출처:미카(danya1)

http://cafe.naver.com/mahanirvanayasamadhi/867

 

2007.06.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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