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티투스 [Titus]

영국신사77 2007. 7. 19. 18:35
                                          티투스 [Titus]
 
정식 이름은 Titus Vespasianus Augustus. 본명은 Titus Flavius Vespasianus.

39. 12. 30~81. 9. 13.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의 황제.

 

  짧았던 통치기간(79~81 재위 2년간)중 국고를 마구 낭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국고뿐만 아니라, 자기 개인 재산도 가리지 않고 마음껏 사용했던 그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79)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가 멸망하자 캄파니아에 지원을 보내기도 했으며, 80년의 대화재가 일어난 뒤 로마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을 완성했다. 준공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축하행사를 벌였다.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근무한 뒤 유대 지방에서 지내며(67) 아버지 밑에서 보병 레기온(군단)을 지휘했다.

 

  네로 황제가 죽자(68) 황제가 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제위 계승자가 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그에게 유대 전쟁의 지휘를 맡겼다.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의 원정은, 예루살렘의 점령과 파괴로 절정에 달했다. 지금도 로마 광장 입구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81) 것이다.

 

  71년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호민관 권한(이것은 황제나 제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징표였음)을 부여받은 그는, 73년 아버지와 함께 켄소르(감찰관)를 지냈고, 몇 차례 공동 콘술(집정관)이 되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권력구조에서 군사적 오른팔 역할을 한 그는 점차 민심을 잃었고, 헤로드 아그리파 2세의 누이동생 베레니케를 정부로 삼으면서, 더욱 로마인들의 신망을 잃었다. 로마인들은 여전히 클레오파트라를 기억하고 있었고, 동방 왕녀와의 혼인은 로마인들로부터 거부감을 사는 처사였다. 이때문에 그는 2번이나 그녀를 쫓아버려야 했다.

 

  79년 티투스는 제위 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역모를 진압하기도 했으나, 아버지가 죽자(6. 23) 아무 소란 없이 즉각 제위에 올랐다. 로마의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가리켜 잘생기고 교양도 있으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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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투스의 예루살렘 파괴-니콜라스 푸생

 

 

                                                  티투스의 개선-Giulio Pippi

 

                                       

                                                                       티투스의 개선-앨마 테디마

 

 

 

                                                                                               출처 블로그 > 하늘거미
                                                                                               원본 http://blog.naver.com/mcm90/130004207782

 

 

 

 

                                         

                                             티투스 황제 개선문

 

 

 

 

 

 

 

베르니케(Bernice): 헤롯 아그리파 2세의 누이
                [“이기다, 정복하다”를 의미하는 어근에서 유래]

헤롯 아그리파 1세가 아내 키프로스를 통해 얻은 딸. 그는 기원 28년경에 태어났으며, 드루실라의 자매이고 헤롯 아그리파 2세의 누이였다.
베르니케와 그의 오라비 아그리파는 기원 58년에 카이사레아에 있는 총독 페스투스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그 두 사람은 페스투스의 초대로 “아주 뽐내는 태도로 와서 사령관들과 그 도시의 저명한 사람들과 함께 공청실에 들어갔다.” 그때 수감 중이던 사도 바울이 불려 들어와서, 허락을 받고 이 모든 고관들 앞에서 강력하고 웅변적인 변명을 하였다. ―사도행전 25:13, 23; 26:1~30.
 
베르니케는 매우 어린 나이에 알렉산드로스 리시마코스의 아들인 마르쿠스와 결혼하였다. 그는 마르쿠스가 죽은 뒤에 자기 삼촌인 칼키스의 왕 헤롯과 결혼하였다. 베르니케는 칼키스의 왕 헤롯을 통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헤롯은 기원 48년에 죽었다.
그 다음에 베르니케는 자기 오라비와 함께 지냈는데, 그들이 근친상간을 범하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유대교로 개종하기로 한 길리기아의 왕 폴레모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폴레모를 버리고, 다시 자기 오라비와 동거하였다. 베르니케와 아그리파가 카이사레아를 방문한 것은 이 기간의 일이었다.
주후 65년에 베르니케는 예루살렘에서 유혈 분쟁을 일으키던 플로루스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옹호하려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다. 후에 베르니케와 오라비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였다. 심지어 그 황제의 아들 티투스는 베르니케가 자기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아내로 삼으려고 로마로 데려갔다. 하지만 로마 국민이 유대인 황비를 맞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티투스는 그 관계를 청산하였다.
 

 

                                                                                                                                           출처:아름다운 친구